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13
120. 마지막 랭킹(4)
오도욱은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 앉아 벽에 걸린 커다란 티비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월요일 오전에 이 케이블 방송을 보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그가 보는 프로그램은 바로 대한경제방송에서 생방송 중인 스타리그, 펀드매니저의 브러드워였다.
금감원 소속인 그에게 이 방송 프로그램 시청은 업무에 벗어난 일은 아니지만 매우 이례적이었다. 사실 바쁜 업무 중에 이렇게 한가하게 티비를 보며 여유를 부리는 것도 할 짓이 아님을 알기에 그는 티비를 끄려 했다.
하지만 도저히 티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로 한 사람 때문이었다.
대학 때부터 그의 눈을 사로잡았던 그녀. 그녀가 출현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 생방송 프로그램이 유종의 미를 거뒀다.
장장 7개월간 피나는 혈전을 벌였던 수익률 게임은 서하나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그리고 이어진 댄스 타임.
그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화면에는 올해 히트 친 걸그룹 핑클의 유명한 댄스곡이 흐르고 서하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도욱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거머쥐며 홀린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소와는 다소 다른 옷차림.
밝은 주홍빛의 강렬한 원피스. 어깨를 살짝 가린 짧은 소매 아래로 가녀린 팔이 리듬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었다.
주홍빛 원피스는 몸에 착 달라붙어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냈다. 가녀린 몸에도 꽤 풍만해 보이는 가슴팍과 잘록한 허리는 드라마에서 보는 탤런트와 비교해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짧은 치마. 치마 아래로 드러난 하얀 피부의 허벅지는 그의 눈을 부릅뜨게 했다. 몸에 들러붙은 치마라 춤을 춘다고 하여 뒤집히진 않았지만 은은하게 드러나는 몸의 굴곡과 언뜻 원피스에 비치는 속옷 자국은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흔들릴 때마다 찰랑거리는 머릿결. 어깨너머로 웨이브진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놀랍도록 눈길을 끌었다.
길게 쭉쭉 뻗은 늘씬한 다리는 예술 그 자체였다. 음악에 맞춰 이리저리 리듬을 밟는 다리를 보며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으음.”
오도욱은 신음을 터트렸다. 무언가 가슴을 꽉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예전에 학교를 다닐 때 서하나가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은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또, 그녀가 저렇게 춤을 추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서하나는 항상 여성스러운 옷차림을 즐겨 했다. 바지를 입을 때 보다 치마를 입을 때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그녀의 치마는 항상 단정한 차림새였다.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 가끔 무릎 위로 올라가기도 했으나 그것마저 매우 드물었다.
지금 티비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모습은 정말 낯선 모습이었지만 놀랍도록 귀여웠다. 쑥스러워하면서 마지못해 리듬에 맞춰 몸을 놀리는 나무토막 같은 춤이었지만 그녀의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는 시청자의 눈과 가슴을 저격하고 있었다.
지금 티비에서 보이는 그녀의 행동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오도욱은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눈을 깜박이기도 힘들었다.
“후우.”
잠시 후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도 그녀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어쩌란 말인가. 그녀는 남의 아내였고 자신은 일생을 함께할 배우자가 있었다.
언제나 마음속으로 다시 다짐했지만, 그녀를 볼 때마다 여지없이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안아봤으면, 아니 손이라도 잡아봤으면…….
그의 의식은 예전의 프로포즈로 흘러갔다. 이미 사귀는 다른 남자가 있다고 거절한 그녀를 그때는 믿었었다. 감히 나를 속이다니. 그녀의 입에서 자신을 원한다는 말이 나오게 하고 싶었다.
오도욱은 깊은숨을 내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전화를 들었다.
신호가 울리더니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서울중앙지검 임중건 검사입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도욱은 자신을 밝혔다.
“금감원 오도욱입니다.”
“아, 어쩐 일이십니까?”
몇 차례 업무상 만난 적이 있는 검사였다.
오도욱은 머릿속에서 자신이 할 말을 정리했다.
“예전에 한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작전주 골드뱅크 말입니다. 거기에 정치권의 검은돈이 유입된 정황이 있습니다. 윗선에서 수사를 독촉하시네요. 수사 착수 부탁드립니다.”
“아, 그 건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미 상당 부분 수사도 진행되었고요. 언론에 알리고 본격적으로 수사하란 의미이군요.”
“골드뱅크를 언론에 흘리면서 하나 더 부탁드립니다. 최근 투자수익률 대회에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여 랭킹을 조작하는 사례가 발각되었다고요. 곧 수사에 착수해주시고 언론에 함께 흘려주십시오.”
수화기 저편의 검사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은 듯했다. 그는 오도욱에게 몇 마디 추가로 묻더니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오도욱은 전화기를 끊고 중얼거렸다.
“투자수익률 대회에서 우승했다면 부정한 방법이 없었을 리가 없다. 아니, 없더라도 뭔가 걸고넘어지면 생기기 마련. 검찰과 금감원 양쪽에서 증권사를 압박하면 서하나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나에게 와서 살려달라고 빌지 않을까.”
지금까지 용케 그가 쳐놓은 덫을 빠져나가고 있지만 이번에는? 그는 서하나를 순순히 포기할 수 없었다.
**
*
– 서하나 춤추는 것 봤어? 대박이야! 너무 귀엽던데?
– 그게 춤이냐? 나무토막도 그보다 잘 춘다. 그래도 귀엽다는 건 인정.
– 원피스 입혀 놓으니 몸매도 죽이더라.
– 솔직히 탤런트보다 훨 낫지 않음? 미니 입으니까 다리도 후덜덜.
– 난 연말까지 맘 놓고 주식 한다. 주식 여신이 허락했다.
– 몸무게 공개하라. 몸무게공개추진위원회.
*
인터넷에서 난리가 났다. 서하나가 어색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동영상으로 편집되어 자료실을 도배했다.
팬카페는 가입자가 폭발했다. 연예인처럼 팬클럽을 결성하자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다음날 신문에는 코스닥 벤처 기업인 골드뱅크의 주가조작설이 실렸다. 골드뱅크는 주가조작 및 작전으로 주가가 무려 30배나 폭등했다. 여기에다 헐값으로 발행한 전환사채, 역외펀드를 통해 무려 600억이 넘는 막대한 시세차익이 정치권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정감사에서도 야당이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함께 대한증권방송의 실전투자대회가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주가조작으로 랭킹이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해당 대회에 참여했던 증권사의 주가가 폭락했다. SJ 증권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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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주가지수가 큰 폭의 조정을 거치고 다시 상승으로 전환하던 10월 중순, 새롬기술 역시 동일한 패턴을 보였다. 새롬기술은 8월 상장 후 약 10일간 상한가 행진을 벌인 다음 주가는 조정을 받았다. 9월 한 달간은 오히려 조정을 받으며 하락했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신규 상장종목의 주가 흐름과 그 궤적을 같이 했다.
10월 4일, 새롬기술은 하한가를 기록하며 40500원이 되었다. 유서준이 산 평균가격은 34000원이었기에 손해는 아니었지만 추락 기세를 보면 하루 이틀 후면 손익분기점마저 망가질 기세였다.
서하나는 유서준이 매수한 이후 거의 두 달이 되도록 주가에 큰 변화가 없자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서준 씨, 내기는 내가 이긴 것 같아. 4만 원도 버거워하는 주식이 무슨 수로 300만 원을 가? 설마 10년 뒤 주가를 말했던 건 아니지? 내기는 내가 물러줄게.”
유서준은 아무런 말 없이 웃음만 머금었다. 물론 중간과정의 가격 변화는 그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내년 3월에 어마어마한 가격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킥킥, 이런 식이면 진짜! 뭐든지 다 들어줄 수 있어.”
서하나는 자신의 승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새롬기술은 10월 5일부터 상승으로 전환했다. 마침 조정을 마친 코스닥의 다른 벤처종목과 함께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종목처럼 점상으로 날아가진 않았다. 중간중간에 매물을 흡수하여 꾸준히 올랐다.
10월 말이 되었을 때 새롬기술은 15만 원을 돌파했다. 대략 한 달 동안 거의 4배에 달하는 주가 상승이었다.
새롬기술만은 아니었다. 코스닥의 무차별 주가 상승이 시작됐다. 벤처 기업 주식은 자고 나면 상한가였다. 실적이 없는, 순익도 없는 회사가 이름값 하나만으로 폭등했다. 특히 회사명에 영문이 섞여 있으면 투자자로부터 우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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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1월 1일]유서준과 서하나는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서하나는 10월 한 달간 벌어졌던 새롬기술의 상승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말미에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단한 주식이긴 하지만 요즘 그 정도 상승을 보이는 주식은 널렸어. 3백만 원에 도달하려면 아직 20배나 더 올라야 해. 벌써 6배나 올랐는데 앞으로 뭔 재주로 그렇게 더 올라? 뭐…… 날 괴롭히고 싶은 그 마음은 알지만. 킥킥.”
유서준은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두고 보면 알겠지. 요즘 SJ 펀드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내가 통 시간이 없어서…….”
“새롬기술 덕에 수익률은 좋아. 아니, 전반적으로 벤처기업 주가가 상승이라 환상적인 수익률을 보이고 있어. 이건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아, 이달에 상장하는 기업, 다음 말이야. 다음에도 투자할까?”
다음은 인터넷 이메일 주소인 한메일을 기반으로 성장한 포털 사이트였다. 전 국민 가운데 한메일 주소를 갖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인 유명 인터넷 기업이었다.
“미국 나스닥의 야후를 생각하면 다음도 엄청 뜨긴 하겠다.”
비슷한 사업구조를 가진 야후가 요즘 나스닥에서 인기몰이하고 있었다. 이를 감안하면 다음 역시 얼마나 오를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장 주가는 다소 비쌀 것 같네.”
서하나가 고민하며 말했다.
물론 유서준은 다음의 주가 변화를 알고 있었다. 다이어리에 적혀있던 코스닥 광풍의 실상을 종합한 부분에 다음의 주가는 상장일인 1999년 11월 11일 11200원에서 2000년 3월 10일 406500원으로 무려 36배 상승한다. 액면가 500원 주식이니 일반 주식으로 생각하면 한주당 무려 406만 원이다.
“다음은 당연히 올라. 문제는 과연 살 수 있느냐의 문제지. 아마 상장한 후에 점상 찍으며 오르지 않을까. 살 수 있으면 사.”
현재의 분위기로 본다면 다음은 상장 후 거래량이 거의 없이 점상을 찍으며 날아갈 것이 확실한 주식이었다. 오르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팔지 않으니 살 수 없는 그런 주식이다.
“그럴 것 같긴 해. 사기 힘들 거야.”
서하나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탁자 위에 놓인 우편물로 넘어갔다.
검찰 소환 통지서. 소환 당사자는 서하나. 지난 수익률 대회와 관련하여 참고인 조사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어떡해?”
서하나의 안면에 걱정이 가득했다. 아무리 증권사 부사장이라지만 그녀도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었다. 검찰 통보를 받고 나면 괜히 마음이 위축되고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불법을 저지른 게 없잖아? 걱정하지 마. 나도 함께 가 줄게.”
유서준이 그녀를 위로했다.
서하나는 함께 검찰에 가준다는 말만으로도 고마웠다.
“검찰에선 무엇을 조사하려 할까? 골드뱅크? 대회?”
“당연히 골드뱅크부터 조사하겠지. 다행히 우리는 골드뱅크를 한 번도 건드린 적 없어. 수익률 대회에서뿐 아니라 SJ 증권 펀드 전체에서 매입한 적이 없어. 골드뱅크로는 우리를 걸지 못해.”
유서준의 대답은 자신감이 넘쳤다. 골드뱅크가 뜰 줄 알면서도 골드뱅크를 건드리지 않은 것은 역시 신의 한 수였다.
서하나도 그 사실을 깨달으며 안심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 우리 둘이 골드뱅크 이야기는 정말 많이 했었는데.”
“수익률 대회에서 매매한 종목 가운데 SJ 투신에서 운용하는 펀드와 종목이 겹치는 것은 SK 텔레콤이나 삼성전자 같은 초우량주 외에는 없어. 사실상 주가조작이 불가능한 것이지.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당당해져도 돼.”
유서준이 서하나의 손을 잡았다. 그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면서 서하나는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가난한 집안의 딸이 아니었다. 보다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살아도 좋을 신분이라는 사실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