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14
121. 서울중앙지검(1)
김현아는 난데없이 이사장실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2학기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강의가 시작되면서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오죽하면 요즘처럼 좋은 주식시장에서 그녀는 주식을 매매해볼 엄두도 못 내고 있을까.
대학교 재단 이사장이라면 이제 막 임용된 초임 교수로서는 감히 눈을 마주치기도 힘든 어마어마한 신분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녀를 부른 것이다. 무엇 때문에 호출을 한 것인지 모르는 그녀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 교정을 지나 건물 외벽에 담쟁이덩굴이 얽혀있는 다소 고풍스러운 양식의 하얀 건물로 들어갔다. 본관 옆에 붙어 있는, 학교 총장과 이사장이 머무는 곳이다.
이곳에는 교수로 임용된 직후 총장에게 인사하러 왔던 기억밖에 없었다.
이사장실이라 적힌 문 앞에서 김현아는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노크하고 들어갔을 때 그녀는 의외의 인물을 맞이했다.
이사장실 안에는 모두 세 사람이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선홍 재단 이사장. 그는 나이 60을 넘어선 인자한 인상의 남자였다. 머리는 이미 벗어져서 매끈한 상부에 하얀 뒷머리만 남았다. 후덕한 인상의 안면에는 주름이 가득했고 전체적으로 둥근 얼굴형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를 연상하게 했다. 학교 소개 책자에서만 접했던 인물이었다.
백도일 경제학부 학부장. 50대의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이 교수는 김현아의 직속 상관이었다. 국내 경제학 분야에서 나름 권위를 인정받고 있고 재단에서도 신임하는 교수였다. 사실상 그녀의 채용을 주도했던 사람이었다. 그녀와는 거의 매일 얼굴을 맞대다시피 했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이 사람이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바로 박강수였다. 현재 해솔 증권 부사장.
김현아는 머리 숙여 인사를 한 다음 자리에 앉았다. 이사장의 맞은편에 백도일 교수와 박강수가 앉아있었으므로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사장 옆에 앉아야 했다.
“아, 김현아 교수? 만나서 반갑습니다.”
문선홍 이사장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현아는 가볍게 손을 맞잡으며 다시 머리를 숙였다.
그녀가 앉자 백도일 교수가 바로 안건을 꺼냈다.
“갑작스럽게 불러서 당황했지?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네. 학교 재단 적립금 운용에 대해 알고 있나?”
김현아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백도일 교수가 상세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재단에는 현재 1800억 원의 적립금이 있어. 학생이 낸 등록금이나 재단 기부금 등 여러 곳에서 들어온 돈을 모아놓은 거지. 장기적으로 이 돈은 학교 건물을 새로 짓는다거나 부지를 확장한다거나 또는 제 2캠퍼스를 건립한다거나 하는 용도로 쓰이지.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립대학에 비하면 적은 거라네.”
국가에서 연기금을 운용하듯 대학에서는 적립금을 운용한다. 절대 손실이 나지 말아야 할 돈이기에 대부분 보수적으로 운용해왔다. 그러다 보니 주식을 배제하고 주로 국채, 공채 위주로 운용했다. 당연히 수익률이 별로였다.
외환위기 직전에는 금리 인상으로 채권 수익률이 엉망이었다. 외환위기가 안정되면서 그나마 수익률은 회복되었지만 최근의 주식 상승과 비교하면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대학 재단에서는 외국의 사례를 분석했고 그들은 미국 유명 사립대학의 기금 운용방법을 조사했다. 예상외로 위험자산인 주식에 꽤 많은 부분이 투자되어 있었다. 위험하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주식만큼 수익을 내주는 자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연기금도 점차 주식 부분의 비중을 늘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던가.
백도일 교수가 핵심을 꺼냈다.
“현재 우리 재단 적립금 1800억 가운데 부동산에 투자되어 있거나 운용 불가능한 자산이 대략 1000억이야. 가용자산은 대략 800억. 이 중에 절반을 채권에 투자한다고 보면 주식에는 대략 200억에서 400억가량을 투자할 수 있네. 김교수에게 이 자산 운용을 맡기고 싶은데 어떤가?”
김현아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재단의 중요한 일이 자신에게 떨어지다니?
옆에 앉은 이사장이 부드럽게 말했다.
“김교수야 예일대를 졸업한 투자전문가 아닌가? 전공도 딱 그쪽 분야고.”
“경제학부 교수끼리 의견을 나누었는데 김교수가 적임자란 추천이 있었네.”
백도일 교수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때 박강수가 끼어들었다.
“하하, 김현아 교수님은 저랑 예일에서 같이 있었죠. 자산 운용에 대해선 저보다 더 전문가이십니다.”
김현아는 자신을 둘러싼 세 사람의 분위기를 살폈다. 뭔가 묘했다. 이 자리에 박강수가 끼어있는 것을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의문은 잠시 후에 풀렸다.
“내 아주 가까운 지인이 바로 해솔 증권 회장이야. 그래서 적립금을 해솔 증권에 맡겨서 운용하고 있어.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고. 김교수가 마침 여기 박강수 부사장을 잘 알고 있다니까 지금부터는 김교수가 맡아서 운용하면 어떻겠나?”
이사장이 박강수와의 관계를 설명했다.
백도일 교수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권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실상 해솔 증권에 일임하고 있었다네. 해솔 증권의 입장에서도 리스크를 안은 적극적 운용이 불가능한 상황. 그러니 국채 위주 안정투자가 될 수밖에 없었어. 경제학부 교수협의에서 주식 배분 비율을 정해주곤 했지만, 실제 운용에선 그게 쉽지 않잖아?”
김현아는 상황을 이해했다.
백도일 교수가 말을 이었다.
“물론 김교수가 일일이 거래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시간이 없다면 주식 채권 비율 정도만 지정해도 되고, 아니면 주식 종목까지 추천해도 되고. 그게 아니면 전공까지 살려서 선물이나 옵션으로 하방 위험을 관리해도 되고. 어떤가? 전권을 주겠네.”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포트폴리오를 설정해서 전달하면 해솔 증권 담당자가 알아서 실행해 줄 거니까. 시간도 그리 많이 뺏기지 않을 것 같았다.
이사장이 그녀에게 말했다.
“김교수. 이곳에서 학생을 열심히 가르치는 것도 나쁜 삶은 아니지. 하지만 그냥 그저 그런 교수로 남는 것보다 재단의 자산을 굴리면서 제대로 실적을 올려준다면 자네는 단숨에 재단 핵심 인사로 진입할 수 있어. 지금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생각해보게.”
김현아는 이 제안이 자신에게 엄청난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여기서 몇 년 제대로 실적을 올려준다면 그녀는 그야말로 재단을 운영하는 핵심 실세로 자리를 굳히게 될 것이다. 그녀의 평생이 보장될 수도 있었다. 반면, 거절하면…….
“전권을 일임하네. 편입비율을 조정해서 주식이든 채권이든, 나아가 파생상품이든. 800억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대로 운용해보게. 실적은 일 년마다 한 번씩 재단에 보고해주기만 하면 되네. 아, 그리고 일 년 단위의 수익에 연연하지 않아도 돼. 일단 5년 정도 종합해서 평가내릴 거니까. 적어도 주식투자라면 그 정도 기간은 필요하지 않겠나.”
백도일 교수가 그녀에게 눈짓했다. 맡으라는 신호였다.
김현아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제가 부족하지만 맡아보겠습니다.”
마침 최근의 장세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 처음부터 얼마 정도는 먹고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장이 손뼉을 치며 흡족해했다.
“김교수와 박부사장이 만나면 그야말로 드림팀이 만들어지는군. 젊은 두 사람이 잘 어울리기도 하고. 두 사람 모두 성심껏 잘해주게.”
이사장의 주도로 김현아는 박강수와 악수를 했다.
박강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박강수가 미소를 띤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김현아는 이것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큰 전환의 기회가 될 것은 분명했다.
**
10월에 무려 +14%를 상승한 코스닥지수는 11월에는 그 두 배인 +28%가 상승했다. 벤처 기업의 상승률은 그보다 더욱 컸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밀레니엄을 앞두고 모두 광분했다. 무슨 테크, 기술 이런 이름이 붙은 종목을 사두면 무조건 올랐다. 1, 2억을 버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때아닌 주식 부자가 넘쳤다.
서하나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모니터로 주가를 검색하고 있었다.
12월 1일 현재 SK 텔레콤의 주가는 266만 원. 새롬기술은 81만 원.
서하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미쳤어.”
일 년 전만 해도 상상치도 못한 주가였다. 작년 연말에 SK 텔레콤의 주가가 얼마였더라.
서하나는 아미를 찡그렸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인데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한참 머리를 싸맨 끝에 그녀는 SK 테레콤의 주가가 60만 원이었음을 생각해냈다. 무려 네 배나 올랐다.
“대체 어디까지 오르려고 하지?”
서하나는 99년을 맞이하던 날 유서준이 임원진을 모아놓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밀레니엄을 대표하는 주식이 바로 SK 텔레콤이라고.
아직 새천년은 한 달이나 남았다. 적어도 남은 한 달 동안 SK 텔레콤의 주가는 꺾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300만 원은 우습게 넘어선다는 의미였다.
역시나 유서준은 대단했다. 지난 연초에 유서준이 언급했던 말을 되새겨보니 그는 이런 상황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 같지 않은가. 그녀는 그의 주식 감이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새삼 부러웠다.
SK 텔레콤의 300만 원을 고민하다 보니 새롬기술 300만 원이 떠올랐다. 새롬기술이 300만 원을 넘기면 무엇을 해준다고 했더라. 치마 입고 물구나무서기로 했었나? 아니면 춤추기로 했던가. 어쨌든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불가능하게 보였던 고지였다. 그런데 주가가 막 오르고 나니 어째 가능할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현재가로 80만 원이니 앞으로 4배가량만 오르면 될까? 지금까지 20배가 올랐는데 앞으로 4배 정도야…….
서하나는 내기를 생각하니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에휴, 남자들이란…….”
문득 그녀는 유서준이 사 모은 새롬기술의 주식 수가 떠올랐다.
“일부만 사겠다고 했었지? 그때 산 수량이 20만 주였던가? 그럼 지금 얼마지? 1600억? 응?”
이게 뭐지?
서하나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계산했다. 다시 계산해도 1600억. 이게 가능한 숫자였어?
그녀는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부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백만장자는 대략 10억을 의미한다. 인플레로 10억은 흔한 돈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10억을 두고 부자라 하지 않는다. 하지만 100억은 다르다. 100억쯤 되면 부자가 맞다. 일반인이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돈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리저리 찾아보면 그 정도 자산가는 많았다.
하지만 천억대는? 천억대는 완전히 다른 숫자였다. 그 정도 되면 재계에서도 이름이 알려지는 수준이 된다. 물론 조 단위의 자산을 가진 몇몇 재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천억이 상징하는 바는 크다.
그 불가능하리라고 보였던 숫자에 유서준과 그녀가 막 입성하고 있었다.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한 달 월급 몇백만 원 때문에 온갖 고민을 다 하던 그녀가 불과 얼마 전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정도 금액은 돈으로 보이지도 않는 그런 삶의 수준에 들어섰다.
태어나서부터 항상 가난에 허덕였던 그녀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것이 누구 때문이었을까. 바로 유서준으로 인한 변화란 사실에 그녀는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결혼은 잘했네.”
그녀는 그를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키폰이 울렸다. 비서실로부터의 연락이었다.
“부사장님, 손님 오셨습니다.”
“누구지?”
“심정국 씨라 하는데요.”
본사 트레이딩 룸에서 매매를 하는 개인투자가였다. 명동 인베스트먼트에서부터 인연이 있던 자이기도 하고.
잠시 후 심정국이 부사장실에 들어섰다. 그는 양손에 캔커피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심정국이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우와. 역시 부사장실이 좋네요. 전망도 죽이고요.”
“어쩐 일이세요?”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심정국이 캔커피를 내밀었다.
“커피를 사다가 문득 생각났습니다. 예전 명동에서 자주 함께 커피를 마시던 기억이 나서요. 아, 이젠 캔커피는 안 마시나요?”
심정국의 손에서 까딱거리는 캔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서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캔커피를 받았다.
“고마워요.”
심정국이 캔커피를 건네준 다음 자신의 손에 있는 다른 캔커피를 따서 한 모금 마시며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