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17
125. 마지막 다이어리(1)
그 시각 유서준은 거실에서 김현아와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학교는 재밌어?”
“응, 학교에 나가니 다시 젊어진 기분이야. 요즘 학생들 우리 때 보다 더 밝고 즐거워 보이더라.”
김현아가 교수라는 직업을 대단히 만족스럽게 여기고 있는 듯하여 그도 기분이 좋았다.
김현아가 문득 생각난 듯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그에게 물었다.
“아, 물어볼 게 있었어. 요즘 같은 주식시장 분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대학 때 김현아는 앞으로의 주식전망을 유서준에게 자주 물어보았었다. 그때마다 유서준의 대답은 거의 틀리지 않았었다. 이를 기억한 김현아가 느닷없이 전망을 물어본 것이다.
“요즘 주식 하니?”
유서준이 신기한 표정으로 물었다. 김현아가 주식을 한다고 하여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경제학 교수가 주식을 하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안 해.”
“그런데 갑자기 왜?”
김현아가 머뭇거렸다.
유서준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쳐다보자 그녀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나 학교 적립금 운용을 맡고 있어.”
김현아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어려있었다.
유서준은 그녀를 축하해주었다.
“대단해. 임용되자마자 그 중요한 역할을 맡다니. 그 학교가 인재를 제대로 알아보네.”
“응. 적립금은 박강수네 해솔 증권에 예탁하고 있어. 그중 주식 부문을 내가 맡고 있는데 올해 시장이 좋아 생각보다 많이 벌었네. 재단에서도 좋아하더라.”
유서준은 금방 그녀의 상황을 파악했다. 축하는 해주지만 염려되는 측면이 더 컸다.
시장이 좋을 때 이익을 내기란 쉽다. 문제는 시장이 나쁠 때다. 시장이 나쁠 때 손해를 보지 않기란 정말 어렵다. 재단 적립금은 이익보다 손해에 훨씬 민감하다.
그녀는 시장이 하락으로 돌아서는 순간을 알고 싶은 것이다. 과거에도 유서준은 시장이 1000을 넘은 고점에서 꺾어지는 지점을 정확히 맞춘 이력이 있지 않았던가.
유서준은 그녀가 걱정되었다. 아무리 그녀의 전공이라지만 적립금 운용은 너무 막중한 중책이다. 그는 성심껏 알고 있는 바를 알려주었다.
“시장은 오늘로 끝이야. 내년에는 여기저기에서 곡소리가 들릴 거야.”
“정말?”
김현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에겐 실로 중요한 정보였다.
“밀레니엄을 맞아 주식시장이 달아올랐지만 2000년은 폭락일 거야. 생각해봐. 주식은 꿈을 먹고 상승하는데 2000년이 되었으니 꿈이 현실이 되었잖아? 주식으로 치면 소문만 돌다가 소문이 공시로 발표되어 현실이 된 거지. 그 경우 대부분 폭락하지.”
유서준이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김현아는 금방 이해했다.
유서준이 설명을 덧붙였다.
“최근 가장 많이 오른 통신주는 아직 조금 더 남았을는지 모르지만 곧 내려갈 거야. SK 텔레콤은 500만 원을 찍기는 하겠지만 다시 내려서 반 토막인 200만 원대가 될 거고. 한국통신 프리텔은 지금 28만 원인데 그것 역시 곧 명이 다할 거야. 거래소는 1월부터 연말까지 줄줄이 폭락만 남았고 코스닥은 더 심해. 다만 코스닥의 몇몇 벤처주식이 3월쯤까지 발버둥을 치며 세인을 놀라게 해도 그건 일부일 뿐이야.”
유서준의 단호한 말에 김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암울한 거네.”
“그렇지. 예전 외환위기가 왔던 97년을 기억해? 넌 미국에 있어서 잘 모르려나? 그때랑 비슷한 한 해가 될 거야. 2000년은.”
유서준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쉽게 믿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을 무시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럼 적립금을 운용할 때 해결방법은 없을까?”
김현아가 조언을 구해왔다.
유서준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방법을 제시했다.
“코스닥은 무조건 피해. 거래소는…… 주식을 안 하면 좋겠지만 굳이 해야 한다면 선물이나 옵션으로 헤지를 해. 그게 원래 파생의 목적이기도 하고. 너 전공이 파생상품 아니었어?”
“비…… 비슷한 분야이긴 해.”
김현아는 유서준의 말을 되새겼다.
**
낡은 고동색 가죽 표지의 다이어리.
박강수는 다이어리를 책꽂이에서 뺐다. 천천히 다이어리를 넘기며 그의 눈동자가 적힌 글을 확인했다.
*
1987년 3월 1일 일요일. 서울대학교 기숙사에서 보내는 첫날 밤이다. 오늘부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앞으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지금부터 내 인생에서 일어날 주요 사건을 이 다이어리에 적을 생각이다. 이 일기가 언젠가는 나의 삶에 작은 보탬이 되어주지 않을까.
*
언뜻 보면 평범한 일기였다.
그는 빠르게 일기장의 중간을 폈다.
*
1989년 1월 9일 월요일. 그동안 잘 나가던 현대종합상사가 하한가로 떨어졌다. 전일 대비 1300원이나 빠진 33400원이다. 지난 토요일 상한가였을 때 팔았어야 했는데 아깝다. 역시 주식은 매수보다 매도가 더 어렵다.
*
“응?”
박강수의 눈이 반짝했다. 89년이면 주식시장이 첫 1000고지를 달성했던 때. 그때 그는 유서준과 내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히 깨졌다. 유서준은 무려 +518%의 수익을 냈었다. 1월에만 +56%의 수익이었던가.
그런데 이 일기 내용은 대체 뭐지? 박강수는 유서준이 미련을 갖고 주식을 잡고 있다가 하한가를 맞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매매를 보는 느낌.
그는 다이어리의 맨 뒤를 넘겼다. 1996년 12월 31일의 일기였다.
박강수는 잠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했다.
“꺅! 너네 둘 여기서 뭐해?”
서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서재로 들이닥쳤다.
그녀는 화보집을 빼서 보고 있는 김동식을 향해 황급히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김동식이 멍한 상태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서하나가 곧바로 화보집을 빼앗았다.
그녀는 화보집을 살피더니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화보집 1집이었다. 그녀의 야한 사진이 담겨 있는 2집이 아니었다.
“야, 너네 둘 빨랑 여기서 나가.”
“누, 누나. 왜 그래요? 화보집 사진 엄청 잘 나왔구먼.”
“몰라, 몰라. 어서 나가.”
서하나가 화보집을 다시 책장에 꽂아 넣으며 두 사람을 밖으로 내몰았다.
박강수는 그사이 다이어리를 원래의 위치에 집어넣고 서재를 벗어났다.
그는 밖으로 나가면서도 다이어리 쪽을 다시 한번 슬쩍 살펴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서하나는 두 사람을 밖으로 쫓아내고는 서재의 문을 잠갔다. 다행히 2집이 아니어서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티비 방송에서 2000년 맞이 카운트 다운을 하고 있었다.
화면에는 종로 보신각 앞과 강남 사거리가 동시에 보였다. 거리는 인파로 넘쳤다. 서울 시민 모두가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듯했다. 화면에 보이는 사람 모두 들떠 있었다.
“넷!”
“셋!”
유서준네 집에 모인 사람들도 티비 소리에 맞춰 같이 카운트 다운을 했다.
“하나!”
“땡!”
티비에서는 카운트 다운이 끝나는 순간 폭죽 소리와 함께 보신각 종소리가 울렸다.
함성이 티비 화면을 메웠다.
유서준네 집에 모인 그들도 서로를 껴안으며 함께 새천년을 축하했다.
유서준은 서하나를 부둥켜안고 몇 바퀴 휙휙 돌았다. 마치 새신랑 새신부처럼.
모두가 즐거워하며 박수를 쳤다.
서하나가 상기한 표정으로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건배를 외치며 맥주를 한 잔씩 들이켰다.
2000년에는 더욱 잘 사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했다.
서로가 축하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박강수는 슬쩍 빠져나왔다.
그는 주위를 살피면서 몰래 유서준의 서재를 향했다.
덜컥 덜컥.
서재 방문이 잠겨져 있었다.
“젠장.”
그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다시 들어가서 다이어리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문득 그는 서하나가 문을 잠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들켰나?”
분명히 서하나는 김동식이 보고 있던 화보집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가 다이어리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았겠지만 그녀는 그리 신경 쓰는 낌새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문을 잠갔을까.
박강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는 황급히 거실로 돌아갔다.
거실에 모인 사람들은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았다. 밤 12시가 넘었음에도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Y2K 때문에 정전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더니 이거 완전 뻥이잖아?”
김동식이 투덜거렸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Y2K는 무사히 지나가나 보네.”
“그거 처음부터 완전 개소리였어. 전 세계 컴퓨터가 모두 정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유서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내심 웃고 있었다.
이곳에 모여 있는 그들은 모두 지금까지의 삶보다 앞으로 남은 삶이 더 많은 사람이다. 지금까지 이룬 것보다 앞으로 이룰 것이 더 많다. 비록 지금까지 달성한 성과가 작을지라도 앞으로는 더 크게 키울 수 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먼 훗날 그날 이후에도 여기 있는 이들만은 모두 즐겁고 보람된 삶을 살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
모임은 1시 무렵 끝이 났다.
모두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박강수는 아내를 집에 데려다주고 곧바로 자신의 사무실로 갔다. 새해 첫날, 그것도 밤늦은 시각에 회사를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그에게 있었다.
평소와 달리 여의도는 한산했다.
불이 꺼진 해솔 증권 본사. 높은 건물의 20층에 그의 사무실이 있었다.
모두가 퇴근하고 불이 꺼진 사무실. 그는 어둠을 더듬어 불을 켰다.
탁.
사무실의 불이 켜졌다.
해솔 증권이라 그려진 커다란 유리벽이 세련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유리문을 통해 사무실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바로 그의 사무실이었다.
그는 부사장실의 유리문 앞에 섰다. 유리문은 아래쪽 절반은 가려져 있고 위쪽 절반은 투명했다.
그는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략 열 평가량 되는 비교적 넓은 공간. 창가 쪽 구석에 그가 근무하는 책상이 놓여있었다.
사무실 중앙에는 손님맞이용 소파가 있고 나지막한 유리 탁자가 자리 잡았다.
그 옆에는 장식장 역할의 값비싼 책장이 있고 책이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의 눈이 책장 한쪽을 향했다.
놀랍게도 그의 책장에는 고동색 가죽표지의 다이어리가 한 권 있었다. 바로 유서준의 집에 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다이어리였다.
그는 다이어리를 빼내어 뒷면을 펼쳤다.
그의 눈에 날짜가 들어왔다. 바로 2026년 12월 31일의 일기였다.
박강수가 안경테를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이거였나? 유서준 너의 비밀이?”
그는 유서준의 놀라운 재능의 비밀을 푼 기분이었다. 주가의 등락을 놀랍도록 잘 맞추던 유서준의 능력. 모든 내기에서 자신을 가볍게 이겨버리던 유서준의 신기.
그것은 유서준이 재능이 있어서도 또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바로 다이어리의 힘이었다.
“역시 이 다이어리에 적힌 것은 앞으로 재현될 미래의 기록이었어.”
그는 오늘 유서준의 집에서 보았던 낡은 세 다이어리를 떠올렸다. 그 다이어리에 적혀있던 일기의 날짜와 내용이 눈에 명멸했다.
“이 다이어리가 어떻게 미래의 일을 알려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예상대로라면 그 다이어리에는 1987년부터 1996년까지, 1997년부터 2006년까지, 2007년부터 2016년까지, 10년마다 벌어질 모든 내용이 적혀있어. 2017년부터 2026년 사이에 벌어질 내용은 모두 여기에 있고.”
박강수는 다이어리가 어떻게 지금 시간에 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2027년 미래의 구인혁이 타임머신을 이용해 보낸 네 권의 다이어리란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네 권 중 세 권이 원래의 목적지인 유서준에게 도달했고 마지막 한 권은 에너지 부족으로 세팅된 시공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떨어졌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전체 다이어리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또 그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깨닫고 있었다.
“역시 유서준 네놈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나에 비하면 출신도 비천하고 무식한 허접탱이 그 자체였어.”
동시에 그런 자에게 자신이 그토록 깨졌었다는 사실에 그는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박강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부의 정점에 서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