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39
147. 운명의 911(3)
티비 화면에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대형 여객기는 아니었고 수십 명이 탈 정도의 비교적 작은 중형 여객기처럼 보였다.
그 여객기가 눈먼 장님처럼 하늘을 제멋대로 날아가더니 커다란 건물에 부딪혔다. 영화에서만 보던 한 장면이 눈앞에서 일어났다.
“저 비행기 왜 저래? 미쳤나?”
유서준이 놀라서 소리쳤다.
대형건물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자막에는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라 했다.
서하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충격을 받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나운서가 화면에 나타나 20세기 이후 미국이 본토에 공격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티비에서 반복적으로 내보내는 비행기 충돌 장면을 보며 유서준은 경악에 잠겼다.
America is under attack!
다이어리에 적혀있던 바로 그 문구였다. 익숙한 그 문구가 티비 자막에 반복적으로 떴다.
유서준에게 911 테러 여파로 증권시장이 어떻게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이어리에 적힌 내용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는 것이 중요했다. 게다가 지금이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며칠 후가 문제였다. 다이어리에 적혀있던 그 누군가의 사망. 그렇다면 앞으로 김현아로 추측되는 그 여인의 죽음도 따라오는가.
유서준의 안색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걱정으로 할 말을 잃었다. 막아야 할 것 같은데 죽음이 무슨 일 때문인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서하나 역시 티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유서준과 달리 당장 그녀의 염려는 국내 주식시장으로 향했다.
테러 여파로 미국은 며칠간 주식시장을 쉬기로 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미국 역시 밀레니엄 거품 붕괴로 인하여 투자 심리가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이 테러는 미국의 투자 심리를 더욱 악화시켜 시장을 급랭시킬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불안으로 소비심리도 위축되어 경기가 하락할 위험 또한 확실했다.
그럼 국내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당장 내일이 걱정되었다. 내일 주식시장에서 급락이 예고됐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서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이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충돌한 110층 건물이 무너져내렸다. 건물 내부에 수천 명의 사람이 상주하고 있었다는 속보가 전해졌다. 다른 비행기가 미 국방성을 공격했다는 속보도 떴다.
대체 무슨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티비에서 방영된 110층 건물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
김동식은 속보로 전하는 뉴스에서 무너지는 건물을 보고 있었다.
항상 무슨 일이 발생하면 다음날 주식이 폭락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주식이 폭락하면 꼭 자신이 들고 있던 종목은 하한가를 쳤다. 그리고 그의 자산은 여지없이 줄어들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주식에 좋은 영향을 미칠 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남의 나라 일 때문에 자신이 오늘 사들인 풋 옵션이 크게 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캔을 하나 꺼냈다.
답답한 가슴을 풀기 위해 맥주를 마시면서 안주로 오징어를 찾았다.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그는 티비를 향해 욕을 했다.
“아, 죽겠네. 안되려니 별일이 다 일어나는군. 이제 비행기까지 빌딩에 처박히냐. 어휴, 내일 또 망가지겠네.”
방 저편에서 마누라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욕을 하며 티비를 껐다.
**
[2000년 9월 12일]새벽 5시.
서하나는 금감원으로부터 긴급호출을 받았다.
증권사, 투신사를 비롯한 전 금융사 책임자 긴급 대책회의가 7시부터 있다는 연락이었다.
간밤에 있었던 911 테러 여파였다. 미국은 금리가 폭락했고 주식시장은 아예 문을 닫았다.
미국이 기침하면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독감에 걸렸다.
당연히 금융당국에서는 대책을 세우느라 부산을 떨었다.
부랴부랴 제대로 단장도 못한 채 그녀는 금감원으로 떠났다.
유서준도 함께 가려 했지만, 그녀는 극구 만류했다.
그 대신 그는 집에서 딸에게 우유를 먹일 임무를 부여받았다.
오전 7시.
금융감독원 대책회의에 참여한 면면은 화려했다. 사실상 모든 증권사와 투신사의 사장이나 부사장급의 직위를 가진 사람이 참석했다. 정부 측에서도 금감원장을 비롯하여 각부의 국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하나는 한쪽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는 오도욱을 발견했다.
그녀는 오도욱의 시선을 무시하고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금감원 실무자가 나와 911 테러 요약과 미국 금융시장의 현황, 우리나라에 미칠 여파를 설명했다.
하루도 되지 않아 저렇게 브리핑 자료를 마련한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미국 테러 여파로 국내 경기 악화는 불을 보듯 뻔했고 그 대책 역시 별달리 내세울 것도 없었다. 원인 자체가 우리나라가 아니라 외국이었으니까.
중요한 사안은 그다음 언급됐다.
9월 만기일은 13일인 목요일이다. 오늘은 하루 전인 수요일.
만기일을 앞두고 큰 변수가 발생했다.
현재 분위기로 보아 주가가 폭락해서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어제까지의 결과로 보면 행사가 62.5인 풋은 미결제약정이 모두 35만 계약이고 행사가 60인 풋은 미결제약정이 24만 계약입니다. 이 미결제약정의 대부분을 쥐고 있는 곳은 바로 증권사 파생팀입니다. 어제 마감을 기준으로 전체 풋 매도 계약 수는 60만 계약이 넘습니다. 만일 오늘 선물이 하한가로 떨어지면 전체 증권사의 손실은 3000억으로 예상되고 만기일인 내일마저 하락한다면 증권사의 총 손실은 1조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금감원 직원이 나와 분석한 내용을 설명했다.
“사실상 살아남을 증권사가 없겠군. 대부분 증권사가 파산이야.”
금감원장이 신음을 터트렸다.
서하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회의에 참여한 모두가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분위기지? 주가가 내린다고 이런 표정일 리가 없는데?
그제야 서하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평소 만기일에 옵션 매도를 치면서 극외가 옵션에서 이익을 챙겨왔던 증권사 파생팀이 911 테러로 사실상 그로기 상태에 빠진 것이다.
“현재 각 증권사 별로 풋 옵션 매도 분량을 취합해서 보고하세요.”
금감원의 명령이 떨어졌다.
서하나는 조사할 것도 없었다. SJ 증권과 SJ 투신 파생팀에서는 풋 옵션 매도 수량이 0이었다.
앞쪽 대형 스크린에 각 증권사 별 풋 옵션 매도 수량이 올라왔다.
파생팀을 운영하지 않는 증권사는 어차피 0이었다. 나머지 증권사는 풋 매도 수량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몇몇 대형 증권사의 옵션 매도 수량은 심각했다. 평소 이렇게 많이 개미의 눈먼 돈을 먹었나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였다.
스크린에 올려진 자료를 보며 서하나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파생팀을 운영 중인 증권사 중에 풋 매도분이 없는 증권사는 정확히 두 곳이었다. 한 곳은 SJ 증권. 다른 한 곳은 해솔 증권.
해솔 증권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옆에 앉은 한 대형 증권사 사장이 서하나를 향해 부러움을 표시했다.
“SJ 증권은 놀랍게도 풋 매도를 치지 않았네요. 우리는 파생팀이 허구한 날 옵션 매도만 치더니…… 이럴 줄 알았어요. 눈먼 돈이라고 우기더니 내가 미치지. 이것들 모조리 잘라버리던지 해야지.”
서하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다시 정면의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두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다른 증권사는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증권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실상 파산 위험이란 것은 국가 전체로 보아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급박한 위기를 며칠 전에 인지하고 피해간 유서준의 혜안이 놀랍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사고로 인한 것이니까 혜안과는 좀 다른 문제가 아닌가?
서하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감원 직원이 앞에서 대책을 이야기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증권사의 파산만은 막아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가를 끌어 올려야 한다는 이야기죠. 일단 각 증권사, 투신사는 주식의 매도를 줄이시고…….”
주식 대책만으로 본다면 별 이상할 것도 없다. 문제는 선물 옵션 상품인 파생이다.
파생은 주식과 다르다. 한 곳이 이득을 보면 다른 곳은 손해를 본다. 제로섬 게임이다. 지금 대립하는 부류는 개인과 증권사. 911 테러로 개인은 대박이 났고 증권사는 쪽박이 났다.
이것을 국가기관이라는 금감원에서 임의로 주가를 움직이려 한다. 또 전체 기관이 담합하여 주가를 왜곡시키려 한다. 이것이야말로 법으로 금지된 작전이 아닌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가? 평소 작전세력을 찾으려고 눈을 부라리던 파수꾼, 금감원이 지금 담합을 획책하고 있었다.
증권사가 파산하면 금융기관 신인도 하락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 또한 해당 증권사 잘못이다. 국가의 개입으로 주가가 올라 증권사가 파산을 모면하면 반대로 개인은 그만큼 손실을 봐야 한다. 그 개인은 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하나.
서하나는 개인은 영원한 약자일 수밖에 없음을 다시 실감했다.
“일단 오늘 금감원에서도 금리 인하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립 서비스를 날리겠습니다. 경기부양조치 카드도 만지작거리고 있다고 운을 떼고요. 중요한 것은 원 달러 환율입니다. 오늘 될 수 있으면 달러 구입을 자제해주시고…….”
금감원 직원이 중요 사항을 계속 전하며 자료를 넘겼다.
금감원의 대책이 일단락 되었을 때 한 대형 증권사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오늘 주식시장을 폐장합시다.”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주식시장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도 선물 옵션 만기일 직전이다.
곧바로 대부분의 증권사에서 찬성을 표했다. 주식시장이 열리지 않으면 증권사가 파산할 일도 사라지니까.
“그건 좀…….”
금감원에서 난감함을 표하자 발언했던 증권사 사장이 곧바로 반박했다.
“오늘 대만은 주식시장을 열지 않기로 했답니다.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고요.”
다른 증권사 사장이 찬성했다.
“오늘 일본은 상하한가를 절반으로 축소하여 운영한답니다. 우리도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미국은 일주일 동안 문을 닫기로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회를 잡은 증권사가 난리법석을 피웠다.
어떻게든 파산을 면해보려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남의 나라 건물이 두 개 무너졌다고 이게 무슨 난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하나는 회의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부분 폐장을 주장한다 하여 금감원 역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만기일 직전이라 잘못하면 대규모 소송에 휘말릴 수 있었다. 국가기관으로서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시장을 열면서도 주가 하락을 용인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했다.
과거라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국내 주식시장은 국내기관의 놀이터였으니까. 지금은 외국인이 들어와 있다. 외국인마저 통제하긴 어렵다. 또 국내기관을 통제한다 해도 관치 주가란 오명을 남기게 된다.
오전 9시 개장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옵션 매도에 물려 있는 증권사 입장에선 지옥의 문이 점차 열리고 있었다.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결국 한 사람이 묘안을 짜냈다.
“그럼 우리는 오후장만 열기로 합시다. 오전에 일단 증시를 닫고 대책을 더 협의한 다음 오후에 문을 열면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위기가 닥치면 대부분 사람은 일단 회피하려는 심리가 있다. 무작정 결정을 뒤로 미루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전장을 없애고 오후장만 열자는 발언에 모두가 동의했다.
“과연 잘 하는 짓일까?”
서하나는 의문이 들었다.
갑자기 증시가 열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더 불안해한다. 뭔가 큰일이 발생해서 증시가 문을 닫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상적으로 운영하거나 아니면 아예 문을 닫거나 그게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서하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발언을 꺼낼 수는 없었다.
풋 옵션 매도를 하지 않은 SJ 증권은 사실상 제 3자의 입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괜히 말을 꺼내 구설에 오를 필요는 없었다.
국내 증시가 현대화된 이후 지난 93년 전격적으로 실시 된 금융실명제 때 오후장만 열렸었다. 그리고 이날 911 테러 때 두 번째로 오후장만 열리게 되었다.
국내 증시도 점심시간 휴장이 없어진 때라 9월 12일 증권시장은 낮 12시 정오에 개장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