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41
149. 폭락의 여파(2)
해가 떨어지고 점차 밤이 깊어가는 그때 김현아는 멍한 상태로 자신의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무감각했다.
마치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세상일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멍한 상태였다.
오늘 일어난 일이 꿈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녀에게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
생각해보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무위험을 외쳤던 그 LTCM도 한방에 무너졌다. 백 년에 한 번 일어나기 힘들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무너졌다. 이론에서는 완벽하더라도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 공짜 점심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거래에는 리스크가 존재했다. 그 리스크는 대개 매우 순하고 말을 잘 듣지만 때에 따라 다루기 힘든 괴물로 변하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극외가 옵션 매도도 그러했다. 평소에는 좋은 수입원이었다. 그것이 끔찍한 괴물로 둔갑하는 시간은 불과 하루면 충분했다.
학계에서는 극외가 옵션 가격을 변동성 스마일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따로 취급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비정상일 뿐이었다. 백 년 만에 한 번 온다는 폭우가 현실에선 그보다 자주 일어나 정규분포를 벗어나고 극외가 옵션이 행사되는 것도 이론치보다 자주 발생한다는 의미다.
왜 하필이면 테러가 오늘 발생했을까. 그것도 선물 옵션 만기일 이틀 전에.
테러가 이틀 더 전에 발생했거나 이틀 뒤에 발생했다면 지금처럼 큰 타격을 입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테러범이 원망스러웠다.
남의 나라 사정에 맥없이 꼬꾸라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미웠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금융 강국, 금융 강국을 외쳤건만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녀가 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은 아직 없었다.
김현아는 낮에 본 계좌 잔고를 떠올렸다.
-322억.
오늘 하루 손해 본 금액이었다.
보는 순간 거짓인 줄 알았다. 계산 오류인 줄 알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재단 적립금 300억을 한방에 말아먹었다. 그녀를 믿고 운용을 맡겼던 이사장과 학과장을 볼 면목이 없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배부른 소리인가. 300억은 어떻게 메꿀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해고는 피할 수 없었다.
이러려고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고 온 것이 아니었다. 이러려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 하나만 보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꿈에 그리던 교수 자리를 잡았건만 불과 일 년 만에 쫓겨나게 생겼다. 눈앞이 깜깜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쨌든 자신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다. 남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일단 메울 수 있는 데까지 메워 넣고 이사장 앞에 사직서를 제출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실내에 어둠이 찾아왔다.
김현아는 불마저 꺼진 실내에서 한참 동안 흐느꼈다.
문득 내일이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내일 아침이 되면 어떻게 될까?
아침 일찍 증거금 부족으로 마진콜이 발생할 것이다. 당연히 증거금 부족을 해소할 방법은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외길 수순이었다. 강제 정리와 함께 모든 손실은 확정될 것이다.
만일 내일 아침에 또 주가가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손실은 더욱 커질 것이다. 지금은 -300억이지만 여기서 5%만 지수가 떨어져도 옵션 손실은 -600억을 우습게 넘어갈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가 살아날 방법은 없었다.
김현아에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지금은 남의 남자가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그를 좋아했었다.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이제는 가망조차 없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그를 좋아하고 있다.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볼까…….”
작년이었던가. 그의 재산이 1조를 넘는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1조라면 300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자신이 부탁한다면 어쩌면 들어줄지도. 그래도 아직 친한 사이니까.
휴대폰을 꺼내고 주소록을 뒤졌다. 유서준이란 이름이 떴다.
통화버튼을 누르려다 말기를 몇 번째. 하지만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벌인 일은 스스로가 책임을 지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안정시킨 다음 그는 다른 곳으로 전화를 했다.
재단 적립금을 예탁해 놓은 곳, 해솔 증권이었다. 일단 그곳과 먼저 대책을 세워야 했다.
박강수와 금방 연락이 닿았다.
“현아? 오늘 봤어? 어떡하지?”
염려해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현아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모르겠어. 어떻게든 수습해야지.”
“수습 가능해? 무려 300억이야. 내일은 더 커질지도 몰라.”
다소 능글거리는 목소리였다.
내일이라는 말이 그녀를 더욱 옥죄었다. 어차피 지금도 감당 불가능하니 내일 더 커져도 마찬가진가. 속에서 상대를 향한 욕지거리가 솟구쳤다.
대학 다닐 때부터 박강수는 그녀의 관심 대상은 아니었다. 학교 성적도 그랬고 동아리에서도 그랬다.
박강수가 그녀를 따라다니며 가끔 좋아한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그녀는 철저히 무시했었다.
재벌이든 어떻든 그녀에게 그는 별 볼 일 없는 한 남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지금 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다.
“이사장이 알게 되면 난리 날 텐데? 난리 정도가 아니라 파면이 아닐까?”
상대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왔다. 옆에 있다면 패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녀가 철저한 약자다.
그녀가 대답이 없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 마진콜이야. 회복 불가능이지.”
여전히 얄미운 소리였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김현아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말 잘 들으면 일부 메워줄 수도 있고.”
순간 잘못 들은 것으로 착각했다. 일부라도 메워줄 수 있다고?
그녀는 메워줄 수 있다는 말에 혹해 그 앞의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이상 교수라는 자리에 연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자신 때문에 재단에 큰 피해를 입히기는 싫었다. 지금 같으면 손실을 되돌리기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 지금 그쪽으로 갈게.”
김현아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유서준은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금감원의 지시 때문에 서하나가 온종일 진두지휘를 하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면 그는 수익의 달콤함에 빠져 있었다.
하루 수익 6000억 원. 자산이 1조라는 그에게도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다.
6000억이란 금액은 그의 정신을 멍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저녁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픈 줄 몰랐다. 오늘 하루 밥보다 더 배부른 돈을 무지막지하게 먹었으니.
밤이 이슥해서야 그는 김현아 생각이 났다.
김현아는 평소 만기일 부근에는 옵션 매도로 소소한 수익을 냈다. 작년 연말 모임에서 그녀가 그렇게 이야기했었다.
“그렇다면…….”
문득 그녀가 걱정됐다. 설마?
그는 황급히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 신호는 연결되었지만 전화를 받지는 않았다.
몇 번 연결을 시도하던 그는 포기했다.
다이어리에 적혀있던 내용이 불길하게 떠올랐다.
*
주가 변동 때문에 정신없던 가운데 비보를 들었다. 그녀가 죽었단다. 죽을 이유가 없는데. 납골당에 다녀왔다. 슬펐다.
*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죽음. 이것일까? 큰 손실을 입고 자살을 한 것인가?
만일 그녀가 외가 풋 옵션을 매도치고 있었다면 오늘 입었을 손실은 백억을 우습게 넘었을 것이다. 대학교수인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다.
그녀가 정말 그런 손실을 보았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유서준은 그녀의 행동을 짜내려고 애썼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녀를 살려야 했다.
오늘 그녀가 자살을 감행할까? 문구로 보아 그것은 아닌 듯했다. 지금부터 무려 10일 뒤에 그 소식이 전해졌으니까. 그녀가 자살한 것은 한참 후였다.
“그럼 지금 현아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학교에 있나?”
유서준은 학교로 전화를 했다.
그녀의 연구실은 전화를 받지 않았고 학과사무실도 모두 퇴근 후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서준은 황급히 사무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정신없이 차를 몰고 대화대학교로 갔다.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연구실. 역시 불이 꺼져있었다.
혹시나 하여 연구실 앞까지 가서 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현아야, 연락 좀 해.”
그는 그녀의 연구실 문을 두드리며 하소연했다.
비록 지금은 연인이 아니지만, 한때는 좋아했던 그녀였고 소중했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자살하도록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유서준은 이를 강하게 물었다.
지금 이 시간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을 떠올렸다. 한강 다리는 절대 아니길 빌었다.
**
김현아는 여의도에 있는 해솔 증권 본사에 도착했다.
늦은 시각이라 정문에는 경비만 있고 창에는 불이 꺼져 적막함만 자아냈다.
그녀는 경비에게 박강수 부사장이 아직 사무실에 있는지 확인했다.
역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이 왔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단추를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도달하는 시간이 무척 더디게 느껴졌다.
심호흡부터 하며 마음을 다졌다.
“그래, 지금으로선 유일한 해결책이야. 설사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은 상황을 좋게 할 수 있겠지. 나의 실책이었던 만큼 내 스스로 모두 감당해야 해.”
이곳으로 오면서 숱하게 다짐했던 그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부사장실이 있는 20층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복도에는 어두운 불이 어슴푸레 밝히고 있고 사무실은 불이 꺼져 어두웠다. 이미 모두 퇴근하고 남아있는 자는 없어 보였다.
사방이 방화 유리벽으로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여러 유리문과 벽을 지나 한쪽 편에 불이 켜진 사무실이 보였다.
허리 위치까지는 진한 썬팅이 되어 있어 내부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허리 위로는 투명한 유리로 구획 지어진 세련된 사무실이 보였다.
김현아는 문 앞에서 심호흡한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박강수가 그녀를 맞았다.
박강수는 서재 한쪽에 커다란 삼각대를 세우고 캠코더를 연결하고 있었다.
김현아는 가능한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해?”
“아, 내가 평소에 영상 만드는 취미가 있었잖아.”
박강수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김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와 알고 지낸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그에게 저런 취미가 있다는 사실은 기억에 없었다.
김현아는 손님맞이용 소파에 앉아 그가 일을 끝내기를 기다렸다.
한참 동안 이리저리 손을 보던 박강수가 마침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김현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어떡하지?”
박강수가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슬며시 지으며 반대로 물어왔다.
“얼마지?”
김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말하고 싶지 않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숫자를 꺼내야 했다.
“300억이야.”
“좀 많구나.”
박강수의 대답은 함께 걱정해주는 어투가 아니었다.
김현아는 좌절을 느꼈으나 그냥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이 없을까?”
“주식시장에 대해서는 너도 잘 알잖아. 오늘 망가진 증권사가 한둘이 아니야. 뉴스를 보니 오늘 옵션 때문에 망가진 증권사 전체 손실이 무려 3000억이 넘는다고 하더라. 그것 역시 줄여, 줄여 발표한 것이겠지. 방법이 있을 리가 없지.”
박강수의 말은 딱딱했다.
김현아는 상대방이 야속했다. 그래도 뭔가 대책을 세워줄 줄 알았건만 이건 완전히 차가운 벽이었다.
“일부 메워줄 수도 있다고 했잖아?”
김현아는 다시 하소연했다. 지금 궁지에 몰린 것은 그녀이지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약간 화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박강수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독기 오른 그녀가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좋아. 그럼 이제부터 협상을 해보지.” 박강수가 정색을 하며 그녀에게 시선을 굳혔다.
김현아가 그 기세에 멈칫하는 사이 박강수의 말이 이어졌다.
“얼마나 원해? 어디까지 메워줄까?”
다소 직접적이었다. 김현아는 상대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잠시 고민한 다음 대답했다.
“어차피 되돌릴 수는 없어. 난 재단에만 피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니 피해를 줄였으면 좋겠어. 얼마가 되었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