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44
152. 바뀌는 운명(3)
유서준은 잠자코 앉아있었다. 그녀도 참 힘들었구나란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그 뒤로도 김현아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굳이 그에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 백 년보다 더 긴 괴로운 시간을 보내면서 삶을 대하는 그녀의 생각과 사상이 뒤엉켜버린 모양이었다. 그 모든 감정이 마치 폭발해서 흘러나오듯 그녀의 입을 통해 새어 나왔다. 그런 독백을 통해 김현아는 점차 감정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다시 그녀가 테이블에 쓰러지며 나직하게 흐느꼈다.
유서준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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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준은 잠이 든 김현아를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대리운전 기사에게 자신의 집으로 가기를 요구했다. 김현아네 집으로 가는 것도 한 방법이었지만 그녀의 집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녀를 깨웠지만 제대로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고.
한강 변을 달리면서 창으로 들어오는 가로등을 통해 잠이 든 김현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시 보니 꽤 가지런한 예쁜 얼굴이었다. 예전에 그녀를 보고 가슴이 뛰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녀가 입었던 자켓은 한쪽 구석에 던져둔 상태라 지금 그녀의 모습은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이었다. 그것도 술이 쏟아져서 얼룩덜룩하게 젖은 상태라 엉망이었다. 사실 박강수의 사무실에서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도망치듯 나와서 차 안에서 겉옷을 적당히 입었던 옷차림도 몰골이 영 말이 아니었다.
블라우스 단추는 제대로 채워지지 않아 일부분 속옷이 노출되었고 스커트 역시 말려 올라가 허벅지가 안쪽이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유서준은 오래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 서하나가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었을 때 그녀와 함께 김현아네 집으로 갔었던. 그때 서하나가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을까. 두 여인의 역할만 정반대로 바뀌었다.
유서준은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항상 자신감으로 차 있던 그녀가 지금 그를 의지하며 기대고 있는 상황이 매우 낯설었다.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녀에 대한 예전의 감정을 불러왔다.
한때는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없었고, 그녀와 사귀고 싶었었다. 그녀와의 결혼을 꿈꾸기도 했다. 다이어리로 추정해보면 원래대로라면 김현아의 죽음으로 모든 것을 상심하고 결국 독신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했던가.
그만큼 그녀는 그에게 비중 높은 여인이었다. 서하나와의 결혼으로 이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이지만 그렇다고 그녀에 대한 호감이나 사랑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입대하던 날 기차간에서 그녀와 나누었던 사랑의 밀어가 생각났다.
유서준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댔다. 거의 10년 만에 다시 만나는 그녀의 입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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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아를 안고 집안에 들어섰을 때 서하나는 적잖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서하나는 증권사 업무 때문에 밤늦게까지 일하다가 늦게 돌아왔다. 늦은 시각임에도 아직 유서준이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던 참이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911 테러 때문에 증권사가 난리 난 하루였으니까.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유서준이 김현아랑 들이닥쳤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술에 만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김현아를 데리고 왔으니.
그렇다고 유서준이라도 말짱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보기에 유서준 역시 술이 한참 들어간 상황이었다.
“오늘 어땠어?”
유서준과 김현아를 부축하며 서하나가 물었다.
유서준이 김현아를 작은방으로 데려가 눕히며 말했다.
“온종일 난리도 아니었어.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현아는 왜 이래?”
“운용하던 적립금이 약간 다쳤나 보더라.”
유서준의 눈빛이 우울해졌다. 염려의 빛이 가득했다.
서하나는 침대에 쓰러진 김현아를 보니 마음이 우울했다. 무엇보다 당차게 잘 나가던 후배가 이 지경이 되어 왔으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김현아를 살피며 서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옷이 엉망이네.”
그녀가 유서준을 돌아보자 유서준이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난 손도 대지 않았어.”
그의 행동이 우스워 서하나가 핀잔을 주었다.
“손을 안 대긴 뭘 안 대? 볼 건 다 봤겠구만.”
제대로 단추가 채워지지 않은 블라우스와 말려 올라간 치마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다시 뭐라고 변명하려는 유서준을 서하나는 방문 밖으로 쫓아냈다.
“어서 씻고 자. 내일도 만만치 않은 하루가 될 거니까.”
유서준을 내보낸 후 서하나는 김현아를 한참 바라봤다.
생각해보니 과거에 자신이 술에 취해서 뻗었을 때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김현아가 뭐라고 일렀더라. 서준이가 다 봤다고 했던가. 지금 김현아를 보니 정말 볼 건 다 봤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이 쑥스러움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누나 시집 못 가면 책임지라고.
결국 서준이가 책임진 모양이 되어 버린 건가.
서하나는 내심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지금 자신의 자리에 김현아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그녀에 대한 애틋함이 배어났다.
그녀는 김현아의 상태를 상세히 살폈다. 옷이 술에 젖어 엉망이었다. 일단 옷부터 갈아 입혀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옷장에서 예전에 입었던 잠옷을 꺼냈다.
**
[2001년 9월 13일]찌근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김현아는 잠에서 깼다.
간밤에 마신 술이 머리를 아프게 누르고 있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박강수의 사무실에서 치욕을 감수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유서준. 그리고 그와 함께 술을 마셨던 일. 거기서부터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술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완전히 엉망인 상태가 문제였다. 불과 한두 잔의 술에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무슨 말을 했었는지 어떻게 일이 흘러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찌근거리는 머리를 안고 정신을 바로 잡으려 하자 곧바로 무서운 기억이 온몸을 억압했다.
“헉, 며…… 몇 시?”
그녀는 황급히 휴대폰을 찾았다.
그녀의 손가방을 비롯한 물품이 한쪽 옆에 정돈되어 있었다.
시간은 오전 8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이럴 시간이 없어.”
그녀는 안면을 찡그렸다.
9월 둘째 목요일인 오늘은 선물 옵션 만기일이다. 거기에다 어제 입은 큰 손실로 오늘 아침에 그녀의 계좌는 증거금 부족인 마진콜 상태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잠시 후면 반대매매가 진행될 예정이고…….
주식시장이 열릴 시각은 오전 9시. 그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몸을 일으키던 그녀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눈길이 갔다.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알록달록한 잠옷이었다. 무늬로만 보면 딱 여고생 수준이랄까. 잠옷 치마가 다소 짧긴 했지만, 다행히 천은 얇지 않아 내부가 많이 비쳐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이 잠옷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짐작 가능했다.
“서준이 집으로 왔나 보네. 하나 언니가 돌봐준 건가…….”
그녀는 한쪽 옆에 자신이 입었던 슬립이 개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겉옷은 보이지 않았다.
김현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일어났어?”
거실에서 유서준이 아기를 안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김현아는 그 모습을 보며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아기를 안은 그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는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하나 언니는?”
“어제부터 난리잖아. 오늘도 일찍 증권사로 갔어. 오늘 지나면 좀 편해지겠지.”
서하나는 아침 일찍 증권사로 출근한 모양이었다.
“애가 귀엽네. 몇 살이야?”
“이제 9개월이야. 간신히 기어 다녀.”
유서준이 아이를 품 안에서 어르고 있었다.
“내 옷은?”
김현아가 안색을 붉히며 물었다.
“아, 그거 얼룩이 져서 하나 누나가 출근하며 세탁소에 맡긴다고 했어. 한두 시간 후면 아마 가져올 거야.”
유서준이 대답하며 그녀의 행색을 쓱 훑었다. 잠옷 치마가 짧아 다리가 많이 노출되는 것을 제외하면 꽤 잘 어울렸다.
“그렇게 입으니 나름 예쁘네.”
“피.”
김현아가 피식 웃었다.
그 앞에서 잠옷 차림이란 생각이 약간 쑥스럽게 느껴졌지만 이럴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유서준이 먼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현아야,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응?”
유서준의 진지한 분위기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자세한 것은 몰라. 하지만 하나는 알고 있어. 네가 지금 위기에 빠져 있다는 거.”
김현아는 대답 없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이 현실이 되어 되돌아와 있었다.
“손실이 얼마야?”
유서준은 곧바로 핵심을 건드렸다. 이래저래 설명할 시간도 없었으니까.
김현아가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사…… 삼백억.”
유서준은 전혀 놀라는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는 표정.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삼백억을 지금 바로 보내줄게.”
믿을 수 없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그러나 김현아는 곧 고개를 저었다.
“도움받고 싶지 않아. 내가 벌인 일이니까 어떻게든 내가 해결해야지.”
“음.”
유서준이 잠시 심사숙고했다.
그는 아기 세라를 내려놓았다. 세라는 좋아하며 거실 바닥을 기었다.
다시 유서준이 말했다.
“현아야, 너 나 믿지?”
김현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서준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일단 지금 내가 삼백억을 보낼 거야. 이거 너 도와주는 것 아냐. 그러니 일단 받아. 삼백억이 들어가면 증거금이 채워지고 마진콜에서 벗어나게 돼. 일단 마진콜은 벗어나야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
그 말은 맞았다. 순간 김현아는 어제 박강수가 했던 제안을 떠올렸다. 마진콜을 벗어나게 해주는 조건이 뭐였더라? 알몸을 보여주는 것이었나?
유서준이 불안한 눈빛을 보이는 김현아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얼마가 남지? 아마 약간은 계좌에 남겠지? 그걸로 풋 옵션 60을 매도 쳐. 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아마 채권이 대용으로 잡힌 계좌라면 꽤 더 칠 수 있을 거야.”
“그건 위험을 더 크게 만드는 꼴이 돼.”
김현아가 뾰족한 음성으로 반대했다. 어제의 고통이 자발적으로 풋 매도를 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유서준이 그녀와 눈빛을 맞추었다.
“나 믿는다며?”
예전부터 유서준은 이런 구석이 있었다. 그는 주가의 움직임을 자주 예측했고 신기하게도 잘 맞추었다. 만일 오늘 이 위험한 순간에도 맞추기만 한다면…….
김현아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서준이 계속해서 말했다.
“날 믿으면 풋 옵션 60을 매도해. 가능한 많이.”
“지금 가진 풋 옵션 매도 분은 어떡해?”
“그대로 가져가. 오늘 만기 정산받아.”
“정산!”
보유한 옵션을 마감 시간인 3시까지 가져가서 만기결재지수에 맞춰 돈으로 돌려받으란 뜻이었다. 만일 풋 옵션 60을 매도 쳤을 때 장 마감 코스피 200지수가 60이면 0원이고 59면 1.0에 해당하는 10만 원을 물어내야 한다. 반면 결재지수가 61이면 풋 60은 휴지가 된다.
“그거 좀 위험하지 않아?”
이미 손실이 큰 상태에서 마감 때 하락하여 더 큰 손실로 이어질까 걱정하는 김현아였다.
“날 믿어. 오늘 종가는 어제보다 무조건 오른다고 생각하고 버텨. 그렇게만 하면 오늘 밤 다시 내게 300억을 되돌려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그제야 유서준이 300억을 넣어주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란 의미를 이해했다. 물론 도와주는 것은 맞다. 하지만 단지 몇 시간 동안 300억을 빌려주는 정도다. 300억을 대신 갚아주는 그런 도움이 분명 아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자존심 때문에 도움을 거절할 처지도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그녀를 세심하게 배려해주는 유서준이 고마웠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에게 유서준이 어깨를 툭 건드렸다.
“힘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