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45
153. 바뀌는 운명(4)
만기일인 9월 13일 주식시장은 전날보다 +3.37% 상승한 491.61로 시작했다. 선물은 어제보다 1포인트 상승한 61.00이었다. 어제 마감 때 선물이 하한가에 막혀 더 내려갈 수 없었던 탓에 오늘 선물 상승은 주가지수 대비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제 마감 때 예상되었던 폭락이 아니고 상승, 그것도 큰 폭 상승으로 시작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911 테러로 미국 시장이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시장은 하락으로 끝났지만 밤사이 유럽시장은 오히려 상승했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큰 손실을 방어하기 위한 국내기관의 눈물겨운 주가 떠받치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폭락하지 않을까 고민하던 투자자에겐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투자 심리가 극악하여 시작하자마자 다시 아래로 주저앉기 시작했지만, 지수를 떠받치려는 증권과 투신의 노력은 놀라웠다.
시가에서 1%가량 아래로 밀린 상태에서 치열한 공방이 전개됐다. 대략 코스피 200지수 60부근. 등가인 풋 옵션 60은 지수 급변동 속에 다른 때에 비해 대단한 프리미엄 가격을 보였다.
김현아는 유서준네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 거래를 시작했다.
지수 상승으로 풋 옵션의 가격이 폭락했다. 무려 300억의 손실을 보였던 그녀의 계좌는 거의 절반으로 손해가 줄었다.
그녀는 만일 어젯밤에 박강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니 끔찍했다.
첫 번째 제안은 사실상 어제 보았던 손해 전부를 물어주는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 제안대로 그녀의 포지션을 어제 마감 상태로 끝내버렸다면 어제의 손실분만 고스란히 떠안았을 터였다. 물론 오늘 상승으로 시작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긴 하다.
어쨌든 어느 제안을 선택하든 그녀에겐 상처만 남았을 결과였다.
김현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서준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흘낏 유서준에게 고개를 돌렸다.
“우쭈쭈쭈.”
“빠빠빠빠.”
거실 바닥에 어린 아기를 내려놓고 함께 놀아주고 있었다. 잠시 그녀는 저 아기가 자신의 아기가 아님이 아쉬웠지만, 곧바로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다.
선물지수가 60 부근에서 출렁이는 동안 그녀는 등가 풋 옵션 60을 매도 치기 시작했다. 증거금 때문에 한 번에 왕창 다 할 수 없고 몇 개 매도치고 또 치고 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못할 과감한 매매였다. 어제부터 몇백억이 오가는 판이었으니 간이 커진 것도 있고 한편으로는 유서준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의 풋 옵션 매도량은 어제 이미 보유하고 있던 것에 더해서 점점 늘어났다.
어제의 대박 영향이었을까.
풋 옵션 거래량이 급증했다. 주가지수에 따라 풋 옵션 가격이 정신없이 오르내렸다.
김현아는 점차 옵션거래에 빠져들었다.
오후 2시 50분.
선물 가격은 60.70에서 멈추었다. 거래가 마감되고 마감 동시호가 10분이 흘렀다. 피를 말리는 10분이 시작됐다.
갑작스러운 프로그램 매수물량이 흘러들었다. 지수를 떠받치기 위한 기관의 담합이었다.
오후 3시. 종가가 발표됐다.
종합주가지수는 어제보다 +4.97% 상승한 499.25에서 끝났다. 마감 10분간 대폭 올랐다.
선물 옵션 기준인 코스피 200지수는 61.58에서 마무리됐다.
어제 무려 500배를 보였던 풋 옵션 62.5는 0.92, 즉 9만2천 원으로 끝났다. 어제 종가 50만 5천 원에서 1/5 토막 난 값이다. 풋 옵션 60은 휴지가 됐다.
이날 선물 거래량은 24만 계약으로 사상 최대를 보였고 옵션 거래량은 무려 802만 계약이었다. 그 대부분이 풋 62.5와 60 종목이었다.
모든 것이 끝나자 김현아는 맥이 탁 풀렸다.
그녀가 보유하고 있는 모든 콜 옵션은 당연히 휴지가 되어 계약당 1천 원씩 챙겼다. 모두 8천만 원이었다. 풋 옵션은 풋 옵션 62.5를 계약당 9만2천 원 물어주어야 했고 모두 4만 계약이었으니 그녀의 손실은 불과 36억 8천만 원이었다. -300억이 -37억으로 줄어든 것이다.
여기에 아침부터 추가 매도했던 풋 옵션 60에서 대략 20억의 수익이 났다.
최종 결과는 -16억이었다. 그녀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손실 규모였다.
“하아.”
김현아는 큰 숨을 내쉬었다. 수백 톤의 무게에 짓눌리다 그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했다.
그야말로 기사회생이었다.
김현아는 잠시 눈을 감고 감정을 추슬렀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눈을 떴다.
옆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유서준이었다.
“어떻게 되었어?”
“고마워.”
김현아는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무리 감사를 해도 그 마음을 모두 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그녀를 죽음에서 구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김현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아침에 입었던 잠옷 차림이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 매매에 몰두하다 보니 옷차림을 미처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뭐 하고 있었어?”
그녀의 물음에 유서준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뭐 하긴, 너 보고 있었지. 다리가 예쁘더라.”
“헉.”
김현아는 곧바로 몸을 움츠리며 옷을 찾았다.
“내 옷 어디 있어?”
“방에 걸어 두었는데?”
그녀는 곧바로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유서준이 그녀에게 투덜댔다.
“지금 옷차림도 보기 좋은데…….”
“너 까불다 죽는다.”
김현아가 그에게 주먹을 내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
잠시 후 두 사람은 부근의 국밥집에서 밥을 먹었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통틀어 처음 먹는 밥이었다.
배고픈 줄 모르고 주식 시세에 몰두했었다. 수십 수백억이 오가는 판국이었으니 밥 먹을 정신도 없었겠지만.
“그래도 다행이네. 잘 마무리되었으니까.”
유서준이 국밥을 후루룩 마시며 말했다.
김현아도 밥을 맛있게 먹었다. 그녀는 어제 아침부터 사실상 거의 굶다시피 했다. 수백억의 손실이 나는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굶은 다음 밤늦게 빈속에 술을 엄청 마셨으니 속이 멀쩡할 리 없었다. 거기에 심리상태도 불안정했으니 빨리 술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가 오후 늦게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현아가 젓가락질하며 물었다.
“오늘 출근 안 해도 돼?”
“급한 일이 없으니 안 가도 돼.”
“좋은 회사네.”
“좋은 회사가 아니라 내 직급이 좋은 거지. 내가 대표잖아. 내가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거지.”
그의 말에 김현아가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 유서준의 조언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상황에서 최고의 조언이었다.
“넌 오늘 오를 것을 어떻게 알았어?”
“조금만 이성을 차리고 종합해보면 어렵지 않아. 어제 증권사 손실만 무려 3000억이라 발표됐어. 만일 오늘 또 내리면 1조. 발표가 그렇다면 실제 손실은 그 두 배 이상이지 않을까? 증권사에서 그것을 용인할 수 있을까? 당연히 주가를 올리려고 애를 쓰겠지.”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추론은 아니었다.
유서준이 덧붙였다.
“오늘 보도를 보면 증권사의 최종 손실이 700억이라고 발표됐어. 어제보다 많이 줄었지. 실상은 얼마일지 모르지만.”
“너희 증권사도 손실 났어?”
“아니, 우리는 풋 매도를 하지 않았어. 운이 좋았지.”
김현아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녀는 이론과 실제 매매가 차이가 크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김현아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넌 이번에 얼마나 이익 났어? 너 개인 계좌 말이야.”
유서준은 머릿속으로 이틀간의 수익을 계산했다. 이틀간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 수익을 올렸다. 어제 이익만 무려 7000억이었다. 오늘은 대략 500억 원. 합계 7500억의 수익을 냈다.
“오늘 풋 옵션 매도 친 것에서 대략 500억가량 벌었나 보네.”
“와우!”
김현아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녀가 유서준을 요리조리 훑으며 말했다.
“대단하다. 어째 넌 그런 기회를 귀신처럼 잘 잡네. 신기해.”
유서준은 그녀의 탄성을 들으며 오늘 것만 말한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마 어제 번 것을 말했다면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지 않았을까.
주식 이야기에서 이리저리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김현아는 어젯밤의 술자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 술집에서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너희 집으로 데려갈 생각을 했어? 하나 언니가 화내지 않아?”
“하나 누나랑은 사실 제대로 얼굴도 못 봤어. 어젯밤 늦게 들어와서 그냥 잤고 오늘 아침에는 누나가 먼저 휙 나가버렸으니.”
“오늘 밤에 혼날지도 모르겠네.”
유서준이 그녀의 염려에 농담을 보탰다.
“아마 그렇겠지? 유부남이 처녀랑 단둘이 술 마셨으니.”
김현아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유서준이 한마디 더 나갔다.
“그래도 괜찮아. 하나 누나도 예전에 똑같은 일 있었잖아?”
“응?”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었다가 그녀는 곧 그 말을 알아들었다.
“예전에 하나 누나랑 밤늦게 우리 집으로 온 거?”
“그렇지. 그때랑 똑같았어.”
김현아는 그때를 떠올렸다. 유서준과 서하나의 관계를 어렴풋하게 눈치채었던 첫날,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그리운 시간이었다.
잠시 당시를 그려보던 김현아가 정색을 했다.
“설마 그때 하나 언니처럼 나도 다 본 거야?”
“뭘 봐?”
“그…….”
김현아가 대답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유서준이 히죽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아니, 못 봤어. 하나 누나 때는 다 봤는데 어제는 너 연하늘색 팬티 입은 거 절대 못 봤어.”
“아악. 너 죽는다.”
김현아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툭탁거렸다.
**
그날 밤 유서준은 서하나의 기분을 살폈다.
911 테러 때문에 걸렸던 금융권 비상이 만기일을 지나면서 상당수 해소된 상태였다. 자연히 서하나도 큰 짐을 벗었으니 기분이 좋아져야 함에도 겉보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며 서하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평소와 다소 분위기가 달랐다.
보다 못한 유서준이 먼저 운을 띄웠다.
“기분 나쁜 일 있어?”
“아니, 없어.”
“에이, 있는 것 같은데?”
유서준이 서하나의 옆구리를 쑤시며 찝쩍거렸다.
서하나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제 발 저린 유서준이 말을 꺼냈다.
“김현아 데리고 온 것 때문이야?”
그는 옛 연인인 김현아랑 단둘이 만난 것을 서하나가 싫어한 때문으로 생각했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럼 현아랑 둘이서 술 마신 것 때문에?”
서하나의 시선은 여전히 티비에 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현아 옷차림새가 좀 그랬지? 나 그래도 손 안 댔다.”
유서준이 그녀의 오해를 풀려고 이런저런 변명을 했다.
서하나가 정색을 하며 유서준을 돌아봤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에이, 맞는 것 같은데?”
유서준이 그녀의 마음을 돌리려고 재롱을 떨었다.
“아니라니까.”
“너 질투 하는구나? 내가 현아랑 만난다고.”
유서준이 그녀의 마음을 슬쩍 떠보았다.
서하나가 웃긴다는 표정으로 단언했다.
“현아한테 질투할 일은 없어. 현아는 나의 멋진 후배니까.”
“그럼 뭘까?”
유서준이 그녀의 얼굴 앞에서 요리조리 손을 흔들며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썼다.
보다 못한 서하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와 오늘 얼마나 벌었어?”
예상치 못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유서준이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치…… 칠천오백억.”
“뭐?”
깜짝 놀란 서하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틀에 칠천오백억 원은 상상하기 힘든 큰 금액이었다.
서하나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그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녀의 입에서 냉랭한 질문이 쏟아졌다.
“테러 나는 것 어떻게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