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47
155. 밝혀지는 비밀(2)
서하나는 유서준에게 다가갔다.
유서준이 살짝 놀라는 사이 그녀는 유서준을 품에 안았다.
“난 자기를 이해해.”
그의 마음이 눈이 녹듯 편안해졌다. 서하나의 이해가 그가 일군 거대한 부 때문인지 그의 마음가짐을 이해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유서준의 이마에 살짝 키스한 그녀가 투덜댔다.
“그래도 조금 섭섭하네. 원래대로라면 내가 아니고 김현아랑 엮어질 운명이었다는 거지? 그럼 나 때문에 현아가 독신으로 살게 된 셈인가? 현아한테 미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질투도 나. 서준 씨의 열렬한 사랑을 받은 몸이라 생각하니.”
유서준은 미소만 지었다.
정작 서하나 본인은 몰랐다. 그녀의 원래 운명이 어떠했는지, 또 그녀가 얼마나 유서준에게 도움을 받았는지. 물론 정작 유서준 본인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서하나가 그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래, 이해심 많은 이 누나가 봐준다.”
“현아랑 둘이서 술 마셔도 봐준다는 거지?”
“너, 죽을래?”
서하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투덜댔다.
“이미 모두 결정 나 있는 것을 갖고 괜히 내기까지 해서 비너스가 되었잖아. 너무해.”
유서준이 그때를 떠올리며 킥킥거리며 웃었다.
“크, 그래도 덕분에 우리 예쁜 세라가 생겼잖아?”
두 사람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서하나가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리면서 고민했다.
한참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이제 자산이 얼마나 돼? 어제와 오늘 많이 벌었으니…….”
“2조가량 되지 않을까?”
“2조!”
서하나가 깜짝 놀라더니 곧바로 정신을 수습했다.
그녀가 물을 한 컵 마신 다음 숨을 돌렸다.
“그래 좋아. 그 큰돈을 미래에 영향을 끼치지 않고 굴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다이어리가 큰 역할을 했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란 어려울 거야. 앞으로는 다이어리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하려고 노력해봐.”
그녀의 생각은 유서준과 같았다.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유서준은 문득 떠오른 사실이 있었다.
“아, 문제가 생겼어. 어제 알아낸 거야.”
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네 번째 다이어리의 행방을 알아냈어.”
그는 어젯밤에 박강수의 사무실에서 본 다이어리를 이야기했다. 더불어 박강수가 이 사실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위험하다는 의견과 함께.
“하필이면 강수가 그걸…….”
무심코 대답하던 서하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지난 밀레니엄 연말에 박강수가 서재에서 다이어리를 손대고 있었던 사실을 어렴풋하게 기억했다. 당시 그녀는 화보집을 보는 김동식을 제지하느라 박강수에게 그리 신경 쓰지 않았었다. 다이어리의 정체도 몰랐었고.
“그럼 강수는 그때 이미 다이어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까?”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바라보며 몸이 경직됐다.
서재의 그 많은 책 가운데 낡아빠진 다이어리에 먼저 손이 가는 것은 상식적으로 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누구라도 서하나 화보집에 가장 먼저 손이 갈 수밖에 없다. 겉보기에 가장 화려하니까. 게다가 속 내용물도 눈을 떼기 힘들고. 특히 남자라면.
유서준과 서하나는 그동안 있었던 박강수의 행동 일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항상 유서준을 무시하며 깔보기를 일삼던 박강수가 SJ 증권의 매매 내역을 훔쳐보기 시작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이번에 해솔 증권에서 풋 옵션 매도를 친 수량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마저.
박강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서준이 미래에서 온 다이어리를 갖고 있음을.
“그래서 강수가 우리를 그렇게 견제했구나. 그냥 단순한 경쟁심리는 아니었어.”
서하나가 단정 지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야. 우리도 대비해야 하고.”
유서준이 맞장구를 쳤다.
언젠가는 다이어리를 회수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2017년이 되기 전까지는.
**
[2001년 9월 14일]유서준은 출근하자마자 오늘 할 일을 고민했다.
어제 출근하지 않는 바람에 결재해야 할 서류가 쌓였다.
일단 급한 일을 대충 먼저 처리하면서 오늘의 매매를 고민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매매할 일은 없었다. 911 테러 때문에 일어난 급변으로 많이 번 데다 그 여파로 인해 잔 지진이 계속될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 서하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시 보았던 오늘의 일기 내용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선물 매도 사고라 했던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오늘 중간에 한번은 와장창 내린다는 의미인데…… 사고라면 대체 어디까지 내리는 것을 의미할까?”
그는 일기 내용에서 오늘 아침 시가부터 계속 하락을 암시하고 있었음을 떠올렸다.
유서준은 동시호가 마감 직전에 선물 100계약만 매도로 진입했다. 더 많은 수량을 실을 수도 있었지만 괜히 미래가 바뀔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바뀐 미래는 서하나를 아내로 맞은 것과 김현아의 목숨을 구하는 것만으로 족했다.
9시가 되자 선물지수는 어제보다 -0.4포인트 내린 60.30에서 시작했다.
만기일 다음 날 움직임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만일 만기일에 지수를 의도한 위치에 맞추기 위해 무리를 했다면 이를 되돌리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기일 지수를 폭락시키기 위해 주가를 임의로 내렸다면 다음날 다시 채우기 위해 그 주식은 상승으로 돌아선다.
또 다른 주요 현상은 만기일 다음 날에는 시장에 주인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직 옵션 포지션을 제대로 구축한 세력이 없어서 지수는 흘러가는 데로 그대로 흐른다. 즉 지수를 적극적으로 방어할 주체가 없는 시기다.
오늘의 경우 이 두 가지가 모두 해당했다. 어제 증권이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무리하게 지수를 끌어올린 여파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주가를 아래로 흐르게 만든다. 즉 심증은 하방이란 의미다. 설사 다이어리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는 아래쪽으로 베팅했을 것이다.
역시나 시작은 그럴싸했지만 지수의 움직임은 불안했다. 투자 심리가 식어있어서 주체 세력의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흔들렸다.
그의 생각보다 의외로 장은 끈질기게 버텼다. 오전 장 내내 시가 부근을 오르내렸다. 그의 계좌 역시 이익과 손실을 반복했다.
선물 매도 사고 현장을 보기 위해 유서준은 점심도 먹지 못하고 끈질기게 기다렸다.
1시가 약간 못 된 시점이었나.
갑자기 선물지수가 폭락했다. 누군가의 실수였는지 한꺼번에 엄청난 매도 수량을 퍼부어버린 것이다. 매수세가 실종된 상태에서 선물지수는 현물과 달리 한방에 아래로 밀려버렸다.
사실상 선물 하한가인 55.50. 전날 대비 -8.6%까지 폭락했다. 매수세가 없어 의외로 오랜 시간 반등을 하지 못하고 이 지점에서 지수가 머물렀다.
유서준은 선물 매도 사고가 발생했음을 확인했다. 곧바로 그는 선물을 매수하며 아침에 샀던 선물 매도분을 정리했다. 그의 평균 매수단가는 55.70. 100계약에 해당하는 수익은 2억3천만 원. 과거의 그였다면 헉 소리가 날 큰돈이었지만 지금은 무덤덤했다.
잠시 후 서하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물 매도 사고 확인했어.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할 말을 주저하는 모습이다.
유서준은 일단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혹시 오늘도 이익 냈어?”
유서준은 내심 웃으며 대답했다.
“응, 나도 매도 사고 확인만 해봤어. 2억가량 벌었어.”
“대단하네.”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다음 유서준은 전화를 끊었다.
이젠 이런 식의 수익은 그에게 큰 의미가 없으려나.
그는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다이어리에 적혀있던 바에 따르면 김현아의 죽음 소식을 듣고 그가 납골당에 갔던 날은 9월 22일 토요일이었다.
유서준은 이후로도 계속 마음을 졸이다가 그날인 9월 22일이 되어서야 한시름 놓았다. 그날까지 그에게 어떤 알고 있는 여인의 부고 소식도 들어오지 않았다.
9월 22일 오후, 그는 김현아에게 전화했다.
김현아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연구실에 나와 경제학 논문을 쓰고 있다고 했다.
유서준은 반가운 마음에 그녀가 있는 대학교로 갔다. 직접 그녀를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역시 미래를 알고 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은 만만치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대학교 교정은 아름다웠다.
특히 아담하고 예쁘장한 학교로 이름이 높은 이 사립대학교는 교내 곳곳에 데이트하기 좋은 공간이 많았다. 주말이라 학생도 그리 많지 않아 비교적 한가했다.
유서준과 김현아는 잘 가꾸어진 교내 정원을 거닐었다. 잔디밭과 양옆으로 줄지은 나무가 그들을 반겼다. 모두 정원사의 손길을 탄 흔적이 역력했다.
김현아는 연신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그런 그녀를 접한 그는 즐거웠다.
그녀를 살렸다는 뿌듯함이 한편으로는 그를 들뜨게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제대로 돌봐주지 못해 원래 정해진 미래에서는 자살했을 그녀라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과 결혼했을 그녀가 서하나 때문에 앞으로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란히 발을 맞추어 교정을 돌며 김현아가 미안함을 표시했다.
“내 마음 같아선 학교 적립금 예탁을 SJ 증권으로 바꾸고 싶은데 이사장 때문에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해솔 증권에서 빼내지 못하게 하네. 앞으로 강수를 만나기도 좀 그런 상황이라…….”
말이 나온 것만도 고마웠다. 그만큼 그를 믿고 있다는 뜻이니까.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 아래서 김현아는 작정한 듯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이제야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그때의 일을 말할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그날 큰 손실이 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 나 자신이 감당 불가능한 사고를 쳐버리니 삶의 의욕도 없어졌어. 무슨 짓을 하든 일단 재단에 피해를 주지 말자는 생각밖에 없었어. 생각난 곳이 해솔 증권이었고, 전화했더니 강수가 오라고 하더라.”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유서준은 그녀의 바로 옆에 서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강수가 그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어. 그래도 친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나만의 생각이었는지. 그에게 난 친구도 아니었고 그냥 정복하고 싶었던 여자였을 뿐이었어. 하지만 방법이 없더라. 막다른 골목에서 기껏 생각한 것이라곤 일을 수습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김현아의 말을 들으며 유서준은 원래대로라면 어떻게 흘러갔을지 짐작 가능했다.
그녀는 그날로부터 며칠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그녀의 유해가 안치된 납골당에 조문하러 간 것이 바로 오늘이었고. 그 장면이 다이어리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고마워.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나를 구해줘서.”
김현아가 다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유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도 고마워. 이렇게 살아있어 주어서.”
유서준은 이 순간 다른 누구보다도 구인혁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죽은 후 그의 절절했던 감정을 잘 이해하고 먼 훗날 그를 위해 다이어리를 보내주었으니까.
유서준의 품에 안긴 그녀는 약간 버둥거리는 듯하더니 곧바로 잠잠해졌다.
한참 동안 유서준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잠시 후 김현아가 품에서 벗어나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유부남이라고 가슴이 별로 따뜻하진 않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석양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김현아는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언젠가는 박강수에게 반드시 복수하리라고 다짐했다. 유서준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지금 당장에는 쉽지 않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