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67
176. 다이어리의 행방(2)
임중건 검사는 증거로 압수해온 온갖 서류 더미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금감원의 고발로 해솔 증권에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할 때까지는 별문제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쪽저쪽에서 적당히 수사하라는 압력이 들어왔다.
준재벌에 해당하는 곳을 털었으니 그러리라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압력은 더욱 심했다.
임중건 검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는 애초에 자기 고집을 피우는 꽉 막힌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돈과 권력에 쉽사리 굴복하는 그런 사람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했다.
서류를 가득 담아 쌓아놓은 이십여 개에 달하는 박스를 바라보며 낙담하고 있을 때였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휴대폰 창을 보며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금감원의 오도욱이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짐작이 가는 터라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한참 망설이던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임중건입니다.”
“아, 임 검사님, 저 오도욱입니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오도욱의 요구사항이 들려왔다.
“해솔 증권의 건은 적당히 시늉만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다른 부분은 저희 금감원에서 알아서 처리합니다.”
임중건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예전에도 해솔이 관련된 사건에 이런 비슷한 요구가 있었다. 그때도 금감원의 오도욱이 요구해서 수사를 시작하고 곧바로 적당히 덮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흐름이다. 덮을 거면 시작을 하지 말던가. 알다가도 모를 인물이었다.
임중건은 오도욱이 금감원 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도욱은 장래가 촉망되는 요원이었다. 이리저리 정부 내 인맥을 거미줄같이 깔고 앉은 인물. 거기에다 경제계로도 무시 못 할 인맥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검사라도 그의 부탁을 거절하긴 쉽지 않다.
이번 해솔 건도 언론에서 떠드니 일단 시늉이라도 하라는 것이겠지.
임중건은 오도욱의 생각이 훤하게 보였다.
역시나 전화 저편에서 흘러나오는 오도욱의 말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임중건은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는 전화기를 끄고 욕설을 내뱉었다.
“이게 대체 뭔 짓거리야. 검찰이 할 일 없어서 압수수색 하는 것도 아니고. 시늉만 하라니.”
그는 차마 전화기를 던지지는 못하고 발을 구르며 씩씩댔다.
가슴이 콱 막히며 답답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술이나 한잔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어느 놈이…….”
그는 전화기를 확인도 않고 통화버튼을 누르며 상대에게 일갈했다.
“지금 바쁜데 대체 누구야?”
“아, 검사님 지금 바쁘신가 보네요.”
뜻밖에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중건은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고는 당황하여 목소리를 다듬었다.
“아, 아닙니다. 성…… 성가신 일이 좀 있어서요.”
상대는 SJ 증권 사장인 서하나였다.
서하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오늘 해솔 증권 압수수색 하시느라 바쁘시군요. 마침 제가 시간이 비어서 저녁이나 같이할까 했더니…… 어려울까요?”
임중건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칠 그가 아니었다.
임중건은 황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오늘 저녁 시간 많습니다.”
그러잖아도 술을 마시고 싶었던 차였다. 오늘처럼 기분이 꿀꿀할 때 데이트 신청이 들어오다니. 그의 나빴던 기분이 확 풀렸다. 미녀와 술을? 아름다운 그녀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제가 그쪽으로 가죠.”
고맙게도 서하나가 이쪽으로 오겠다고 했다. 임중건은 하늘을 날아갈 기분이었다.
“네네, 이쪽으로 오시면 제가 한턱 내겠습니다.”
임중건은 예의상으로나마 그렇게 대답했다. 상대는 재벌 부인. 그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돈이 많은 여자다. 거기에다 방송가에서 주식의 여신으로 이름을 날리는 미녀. 그는 오늘만은 자신이 돈을 지불하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를 끊는 임중건의 입이 옆으로 쭉 벌어졌다.
**
검찰청 부근의 한식집에서 서하나는 임중건과 단둘이 만났다.
두 사람의 만남은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주 가끔 한 번씩 연례행사처럼 열렸다.
서하나로서는 검찰과의 인연이 필요했고 임중건 역시 재벌 한 사람을 알아두면 좋은 점이 많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더구나 서하나 같은 미인을 만나는 것이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불고기 쌈에 돌솥밥을 먹으면서 두 사람은 가볍게 맥주를 나눴다.
단정한 옷차림에 화려한 미모를 발산하는 그녀를 앞에 두고 임중건은 눈을 떼지 못했다.
임중건이 먼저 해솔 증권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해솔 증권을 압수 수색했어요.”
“저도 들었어요. 이래저래 검사님께서 할 일 많으시겠습니다.”
서하나는 예의상 상대를 추켜세웠다.
임중건이 낮에 열 받았던 일을 토로했다.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금감원 그 자식들 하는 짓이 가관이어요. 하라 말라 아주 자기네가 시나리오를 다 쓰고 있어요.”
“정부 기관, 특히 금감원 하는 일이 다 그렇죠.”
서하나가 동조했다.
점차 임중건이 해솔 증권과 관련된 일을 낱낱이 내뱉었다.
오도욱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서하나는 안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오도욱이 하는 짓이 지저분했다. 예전의 그 좋았던 감정이 너무 낯설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서하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임중건이 쑥스러운 듯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제대로 수사하고 싶지만 아마 힘들 겁니다. 기껏 기소해서 집어넣어도 위쪽에서 압력을 넣어 유야무야 시킬 게 뻔하니까요. 이건 제 의지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요.”
“검사님의 고민은 잘 이해해요.”
임중건은 장단을 맞추어주는 서하나가 오늘따라 더 예뻐 보였다. 이런 여자를 옆에서 볼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저희가 수사해보니 해솔 증권의 실질적인 범죄자는 박강수 부사장이어요. 그런데 수사에 들어가면 해솔 증권 임원 중 다른 누군가가 덮어쓸 겁니다. 보통 재벌이 다 그렇잖아요. 꼬리 자르기. 충신이 대신 감옥 가기. 그렇게 빠져나가죠.”
임중건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익히 예상되는 결말이었다.
서하나는 과거 박강수가 자신의 납치 사건을 기획했음을 떠올렸다. 당장 박강수를 감옥에 넣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번 일로 과연 해솔 증권이 무사할 수 있을까.
서하나는 쉽지 않을 것이라 봤다. 물론 해솔 증권이 가진 모든 자산과 대주주의 사유재산마저 털어 넣는다면 7000억 정도의 손실이야 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유재산을 쉽사리 내놓지는 못하겠지.
“아마 해솔 증권은 부도가 불가피할 겁니다.”
서하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임중건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왔다.
“부도요? 그럼 회사가 망하는 거잖아요?”
“부도난다고 다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금융기관은 부도 시에 사회문제가 많아서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살려줍니다. 공적자금 넣어서 말이지요.”
“정부 세금을 그렇게 써요? 그럼 해솔 증권이 살아나나요?”
임중건이 안면을 찌푸렸다.
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부도 후 산업은행 산하에 데려다 두겠죠. 그다음 공적자금을 넣어 정상화하고 그 후 매각. 아마 지금의 대주주에게 다시 되돌려줄 겁니다. 이게 예상된 수순이죠.”
서하나의 설명에 임중건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대주주는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는군요.”
“그렇죠.”
“허탈하네요.”
임중건이 맥주병을 들었다.
“한잔 더 하시죠.”
“고마워요.”
서하나가 잔을 받았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건네며 대화를 나눴다. 서로 대화가 잘 통했다.
임중건은 자신과 대화하는 서하나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결혼한 몸이라 더 바랄 수는 없지만 결혼만 하지 않았더라도 당장 프로포즈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또 남녀 사이다 보니 임중건은 서하나보다 술을 배는 더 많이 마셨다.
얼큰하게 술에 취했을 때 서하나가 마침내 목적을 드러냈다.
“검사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서하나를 보고 임중건은 혼백이 나갔다.
“아, 네. 서 사장님 부탁이라면 뭐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서하나가 탁자 앞으로 바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코앞에서 어른거렸다.
“해솔 증권에서 압수 수색한 물건 있죠? 그거 지금 검찰청에 있나요?”
“네, 압수물 보관 창고에 있습니다.”
임중건은 관심을 보이며 다시 물었다.
“그건 왜 그러십니까?”
“제가 해솔 증권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그곳에서 압수한 물건을 살펴보면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저에겐 대단히 중요한 일이랍니다.”
서하나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중건은 금방 상대방의 의도를 이해했다. 서하나는 해솔 증권의 정보를 얻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압수한 물건을 잠시 보여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검사인 그가 쉽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럴 때 서하나 앞에서 자신의 힘도 한번 과시해보고.
“보여드릴까요?”
오히려 임중건이 그녀에게 권했다. 잠시라도 그녀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그의 바람이 쉽게 모든 것을 수락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서하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미소를 본 상대의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당겨 앉았던 서하나가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서하나의 고혹적인 입술이 다시 멀어지자 임중건은 가슴 아픈 상실을 맞보았다.
임중건이 황급히 맥주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그럼 지금 당장 가보실래요?”
서하나는 미소를 띤 채 고개만 끄덕였다.
**
직원 대부분이 퇴근한 검찰청사는 불이 켜진 곳이 많지 않았다.
이래저래 약간의 출입 절차를 거친 다음 서하나는 임중건 검사와 청사 내로 들어갔다.
임중건 검사는 곧바로 그녀를 해솔 증권 압수수색 박스가 쌓여있는 증거물 보관실로 데려갔다.
증권사 본사를 털어 온 것이라 서류 분량이 상당히 많았다.
임중건이 박스를 향해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냥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어느 부분인가요? 해솔 증권의 자금 흐름 이력인가요? 아니면 경영전략 부분인가요?”
서하나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박강수 부사장 사무실에 있던 물건을 원합니다.”
임중건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녀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번호표가 붙어 있죠? 10번부터 13번까지가 그 사무실에서 나온 것입니다.”
높은 칸에 놓인 박스를 임중건 검사가 직접 내려주었다.
서하나는 박스 내부의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며 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긴 것인가요?”
임중건이 물었다.
서하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이어리를 찾는 일에 열중했다.
모두 4개의 박스 중에 3번째 박스에서 마침내 고동색 가죽표지의 다이어리가 나타났다. 서하나는 다이어리를 금방 알아보았다.
다이어리를 손에 들었다가 슬쩍 임중건의 눈치를 보고는 자연스럽게 다시 내려놓았다. 그녀는 곧바로 다른 물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이어리를 빼내야 했다. 임중건 검사가 다이어리를 갖고 가도록 허락해줄까. 아무리 그녀를 예쁘게 보더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압수한 물품이라도 엄연히 해솔의 것이고 결국 되돌려줘야 할 물건이니까.
임중건 검사의 눈을 피해 다이어리를 몰래 손가방에 넣어야 했다.
서하나는 뒤적거리며 물건을 찾는 척하며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임중건 검사가 염치가 없게도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를 감시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예뻐서 그녀의 행동을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결국 서하나는 네 번째 상자까지 다 뒤졌다. 그때까지 임중건 검사는 그녀의 옆에 서서 도와주려고 했다.
“없나요?”
임중건 검사가 다시 물었다.
서하나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급하게 찾았나 봐요. 보이지 않네요.”
“천천히 찾아보세요.”
임중건 검사가 책을 하나하나 넘기며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을 떼어낼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서하나는 뒤적거리다가 임중건에게 말했다.
“혹시 사무실에 커피 있어요? 밥 먹고 나니 커피가 고프네요.”
임중건 검사의 안색이 밝아졌다.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는 표정이었다.
“제가 금방 뛰어가서 캔커피를 사오겠습니다. 자판기가 있어요.”
“성가시겠지만 부탁드릴게요.”
서하나는 상대를 향해 미소를 보내주었다.
임중건이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보관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서하나는 밖의 눈치를 살피면서 곧바로 다이어리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다이어리를 박스에서 꺼낸 다음 재빨리 손가방 안에 다이어리를 넣었다. 임중건은 분명히 이 사실을 모를 것이다. 훗날 박강수가 알게 되면 난리를 칠 것이지만 그건 그때의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