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68
177. 다이어리의 행방(3)
서하나는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SJ 증권 본사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불 꺼진 건물에 오직 그녀의 사무실만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서하나는 책상에 앉아 숨을 골랐다.
마지막 다이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 미래를 알게 된다는 사실이 그녀는 꺼림칙했다. 내일 죽는다고 하면 오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미래를 알게 되었다는 안도보다 알게 되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그래서 그녀는 유서준이 가진 다이어리도 그냥 쓱 훑어보았을 뿐 상세히 살펴보진 않았다.
이 다이어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 다이어리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나 유서준도 쓰지 않고 박강수도 쓰지 못하도록.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만일 유서준에게 줄 생각이었다면 이 다이어리를 들고 곧바로 집으로 갔을 것이다.
그녀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이유가 있었다. 이 다이어리가 마지막 다이어리라는 것이다.
유서준에 따르면 2027년에 자살해서 죽었다고 했던가.
마지막 다이어리는 2026년까지의 일이 적혀 있을 것이니 뭔가 단서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유서준 그가 자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 자살하기까지의 과정이 일부분 드러나 있을 것이다.
한참 멍하니 정면만 바라보던 서하나는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왠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다이어리를 꺼내는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다이어리를 폈다.
짐작대로 첫 페이지는 2017년의 내용이었고 마지막은 2026년의 내용이었다.
다이어리를 펴자 익숙한 글씨체가 드러났다. 유서준의 글씨체였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겼다. 주가나 주가지수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참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의 눈에 한 부분이 들어왔다.
유서준의 일상이 적힌 부분, 놀랍게도 김현아의 이야기와 그녀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충격이었다.
글을 읽던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원래 흘러갔어야 할 미래를 마침내 알게 됐다.
인생에서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 내가 지하철을 탄 것을 만약 버스를 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해답은 없다. 존재하지 않았고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남자랑 결혼하지 않고 다른 남자랑 결혼했다면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런 만약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서준의 일기에는 놀랍게도 그 해답이 적혀 있었다.
서하나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진정으로 고민하고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그 순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까지도. 유서준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선택했을 그쪽의 결말이 적혀 있었다.
서하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그때의 수모와 공포가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서하나는 자신이 항상 똑똑하고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왔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녀의 인생은 그러했다.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나무랄 것 없는 인생이었고 비록 증권사 취직 후 다소의 부침이 있긴 했지만, 유서준과 결혼 후 지금 현재 인생의 화려한 꽃이 피었다.
그런데 원래 그녀의 인생은 그렇지 못했다.
가도건설에서의 그날, 그 수모를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전개되었을 그 이후의 인생이 다이어리에 나타나 있었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결말이었다. 설마 자신이 그런 인생을 살아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현명함은 이 세상의 치열하고 각박한 현실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던 걸까.
그녀를 놀라게 한 내용은 또 있었다.
김현아의 이야기였다.
김현아 역시 911 테러 때의 일로 죽을 운명이었던가. 그리고 원래 유서준의 연인은 김현아였었다고. 서하나 자신이 아니었다.
그제야 서하나는 유서준이 자주 김현아를 떠올렸던 사실을 기억했다. 특히 911을 전후하여 김현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때 그녀는 유서준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김현아를 살리기 위해 유서준이 얼마나 고민을 했었는지 새삼 이해했다.
서하나는 전반적인 큰 그림을 깨달았다.
유서준에 의해 그녀와 김현아의 미래가 바뀌었다. 한 사람은 비참하게 살았을 운명이 화려하게 바뀌었고 한 사람은 죽었어야 할 운명이 삶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원래는 김현아가 차지했어야 할 유서준의 옆자리를 그녀 자신이 차지하고 있었다.
서하나는 김현아에 대해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 때문에 김현아는 평생을 결혼도 하지 못하고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원래는 서하나 그녀가 평생 독신으로 비참하게 살아야 했었다.
서하나는 다이어리를 덮었다. 그 이후로 다이어리에 무엇이 적혀 있을지 겁이 났다.
그녀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잠시 후 그녀는 결심이 섰다.
그녀는 다이어리를 들고 사무실의 한쪽 구석으로 갔다.
2017년부터의 마지막 다이어리를 찢고 문서 세절기에 밀어 넣었다.
드르르륵-
다이어리가 완전히 파쇄되어 사라졌다.
한 장 한 장 밀어 넣으면서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안정시켰다.
이제 2017년 이후 미래의 기록은 사라졌다. 그 내용마저 누구도 볼 수 없도록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
그날 밤늦게 들어간 서하나를 유서준이 반갑게 맞았다.
문을 열어주면서 유서준이 물었다.
“늦었네? 어디 갔었어?”
“사무실에 있었어.”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서준은 그녀의 행동이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개의치 않고 물었다.
“마실 것 줄까?”
“맥주캔 하나만 줘요.”
그녀가 돌아오자마자 술을 찾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유서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찾았다.
서하나가 안으로 들어와 재킷을 벗으며 물었다.
“세라는 자?”
“응, 요즘 학원 다니는 게 재밌나 보더라.”
유서준이 냉장고에서 하이트 맥주를 하나 꺼내 넘겼다. 그의 다른 손에는 땅콩이 담긴 쟁반이 들려져 있었다.
거실 식탁에 둘이 마주 앉아 서하나는 맥주를 마셨다.
유서준은 잠자코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서하나는 한참 혼자서 멍한 상태로 생각에 잠겼다.
갖가지 상념이 사라지고 결국 남은 것은 유서진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생각해보니 결국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준 것은 단 하나였다. 유서준과 함께 만들었던 그 증권위탁계좌.
그녀가 가도건설 사장의 강압을 뿌리치고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위탁계좌에 있던 돈 때문이었다. 지금 바로 그만두더라도 그 돈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 행동 하나가 그녀의 인생을 새로운 영역으로 인도했다.
서하나는 미소를 지으며 유서준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는 유서준이 보였다. 항상 그녀를 옆에서 응원해주는 그였다.
서하나는 다시 방긋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일 있나 보네.”
유서준이 함께 웃으며 중얼거렸다.
서하나는 그제야 말을 꺼냈다.
“나 오늘 사고 쳤다.”
“무슨 사고?”
유서준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서하나가 유서준의 표정을 관찰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임중건 검사 만나서…….”
여전히 유서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서하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 남자는 재미없게 도무지 반응이 없네. 질투도 안 하고.”
“뭐, 별일 없었을 거잖아?”
유서준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서하나가 피식 웃었다.
“이 남자는 내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 줄 모르나 봐.”
그제야 유서준이 그녀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관심을 기울이는 척했다.
“검사랑 만나 뭐했는데?”
“밥 먹고, 술 마시고, 또…….”
“재밌었겠네.”
“그런데 사고 쳐버렸다. 당신에게 미안한 거”
“응?”
유서준이 그녀를 두 팔로 안아 번쩍 들었다.
서하나가 순순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렸다.
유서준이 그녀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말하는 투를 보니 오늘 내가 고픈가 보네.”
“킥킥.”
유서준이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서하나가 일어서려는 유서준의 목을 계속 잡으며 속삭였다.
“오늘 마지막 다이어리를 봤어.”
유서준은 그제야 서하나의 기분을 모두 이해했다.
오늘 해솔 증권 압수수색이 있었다더니 그 때문에 임중건 검사를 만났나 보다. 그는 다이어리에서 그녀가 뭔가 심적으로 흔들릴 만한 내용을 보았던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 다이어리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그도 전혀 모른다.
서하나가 놀라운 말로 뒤를 이었다.
“그 다이어리 없애버렸다.”
유서준의 몸이 멈칫하며 정지했다. 다이어리를 없애버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유서준은 다이어리 속의 내용을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필요하다면 나중에 그녀가 다시 말해줄 것이다.
서하나가 그의 목을 감은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끌어들였다.
유서준은 가볍게 그녀에게 키스했다.
서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당신에게 정말 감사하고 있어. 또, 김현아에게도.”
“왜?”
“나에게 이런 좋은 삶을 주었으니까. 세라도 안겨주었고.”
서하나는 진심으로 말했다.
유서준이 그녀의 옆에 자리 잡았다.
“흐흐, 그럼 그 감사를 몸으로 표현해봐.”
서하나가 그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몸이 자연스럽게 합쳐지며 침대 위를 뒹굴었다.
서하나가 그의 귀에 대고 수줍은 듯 속삭였다.
“비너스 해줘?”
유서준은 깜짝 놀랐다. 그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자진해서 예술 작품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건 내가 해달라고 할 때.”
“응, 그때는 꼭 해줄게.”
유서준은 다이어리가 사라진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일단 박강수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단 사실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다이어리 때문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미래를 바꿀 생각을 못 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오히려 자유로운 기업 경영과 확대에서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는 다이어리의 소멸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
[2008년 7월 16일]2007년 미국에서 일어났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미국 모기지 담당 업체인 뉴센추리 파이낸셜과 아메리칸 홈 모기지 인베스트먼트의 파산은 미국 금융시장에서 미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란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담보 대출의 일종이다.
2004년 이후 금리가 상승하며 주택 가격이 붕괴하자 높은 수익률을 보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에 투자한 많은 기업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때까지 만해도 이 사태는 미국 국내에 한정된 문제였다.
미국 모기지 시장의 절반을 담당하여 모두 5조 달러의 모기지를 보증한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주가는 2008년 초 35달러 선에서 거래됐다. 6월 이후 가파른 하락세를 보인 두 기업의 주가는 7월 중순 8달러까지 떨어져 1/4로 하락했다. 모기지 채권의 부실 우려 때문이었다.
2008년 7월 16일, 두 기업의 파산이 우려되는 가운데 일본의 은행과 보험에서 두 기업의 채권을 모두 9조 엔가량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국외로 확대된 시발점이었다.
동시에 한국은행으로 관심이 모아졌다. 한국은행 역시 70년대 후반부터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투자해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한국은행은 이 두 기업의 채권을 모두 380억 달러나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전 세계의 중앙은행도 실정은 비슷했다. 모두 합쳐 1조 달러 이상의 채권을 보유했다.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의 파산으로 각국 중앙은행의 파산이 우려되면서 삽시간에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번졌다.
전 세계로 번져나가던 9월 6일, 미국 연방준비위원회(FRB)는 사실상 파산한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총 2000억 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국유화를 결정했다.
미국 국내 금융기관의 파산이 줄을 잇는 가운데 미국 FRB는 주요 보험회사인 AIG에 8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고려하고 있었다. 반면 투자은행인 리먼 브러더스에는 구제금융 제공을 거부할 예정이었다. 리먼은 미국 랭킹 4위의 글로벌 금융서비스 업체였다.
남은 것은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이었다. 이때 리먼의 부채 규모는 모두 6130억 달러로 미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기업 파산이 도래한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