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75
184. 금감원 보증서(2)
[2008년 9월 16일]추석 연휴가 끝난 16일은 화요일이었다.
밤사이 리먼 브러더스의 부도가 현실로 드러나면서 전 세계 금융가에 파문을 일으켰다.
무려 700조에 달하는 서브 프라임, LBO, CDS, 헤지펀드, CP, MMF 상품이 허공에 떠버렸다.
리먼과 거래하던 전 세계은행과 증권사도 난리가 났다.
미국 FRB는 700억 달러의 유동성을 긴급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유럽 ECB도 300억 유로를 투입했다.
전 세계 금융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단순히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사실 앞으로가 더 큰 문제였다.
우리나라 금융기관이 리먼과 직접 거래한 유가증권과 파생상품 규모는 대략 7억 달러 수준으로 드러났다. 전체 총 해외자산 대비 규모가 크지 않아 국내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크지 않았다.
금융당국은 리먼 사태로 인한 금융위기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밝혀 곧바로 진화에 나섰다.
화요일 오전 서하나는 결전의 마음을 불태웠다.
그녀는 유서준이 리먼의 인수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유서준이 목표하고 있는 2027년의 외환위기 때 국외의 금융기관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란 사실도 공감했다.
해외 금융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북미의 투자은행이며 바로 리먼 브러더스는 최고의 기회가 분명했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건수였다.
그런 기회가 단순히 오도욱이란 한 개인 때문에 물거품이 된다는 것은 큰 손실이었다.
어떻게든 오도욱을 설득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포기해야 할까. 뉴욕에서 고생하고 있을 남편 유서준을 떠올리니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공시켜 안겨주고 싶긴 했다.
서하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옷장에 걸린 옷을 고르며 한참을 고민했다. 방송 촬영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인과 데이트를 하는 날도 아니다.
단지 사업상 결전을 앞두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오도욱의 한마디가 있었다. 붉은색 계열의 속옷을 입고 오시면 더욱 좋겠다고.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상대는 그녀의 몸을 노리고 있었다. 이미 결혼 전부터 그런 낌새를 눈치채고 있었으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갑자기 그녀의 손이 덜덜 떨렸다.
과거 가도건설에서 있었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힘없던 말단 대리 시절 그녀를 억눌렀던 무자비한 지점장과 사장이 압력이 다시 느껴졌다. 지금은 사장이라는 직위에 있음에도 다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권력의 압력을 느끼게 되었다. 참으로 얄궂은 일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한순간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비즈니스 관계로 치부해버린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그녀와 오도욱만 입을 다문다면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절대 그런 관계를 용납할 수 없다면서도 마음 저쪽 깊은 곳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불길한 느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예전에 마지막 다이어리에서 보았던 그녀의 운명이 떠올랐다.
망가진 삶을 살던 그녀는 잠시나마 오도욱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었다고 했던가. 그러다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오도욱의 분노로 혼사가 깨졌다고 했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도욱은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을 사이였음이 분명했다.
참으로 끈질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연이란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모르지만, 유서준과 김현아와의 관계도 그렇고 자신과 오도욱과의 관계도 그러했다. 예전의 인연이라지만 무시하기 쉽지 않았다. 정말 끈질기게 계속 이어졌다.
한동안 떨리던 그녀의 몸이 점차 안정되었다.
서하나는 속옷을 골랐다. 선명한 붉은색을 띤 브래지어와 팬티를 꺼냈다. 물론 특별히 야하다거나 그런 유형은 아니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속옷을 벗고 붉은색으로 갈아입었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한번 살펴본 다음 평소처럼 상의에는 레이스가 복잡한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하의는 탁한 붉은색 계열의 스커트로 골랐다. 스커트의 길이는 평소 입던 것보다는 약간 짧은 편으로 무릎이 드러났다. 그렇다고 그녀의 단정함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붉은색 스커트에 맞추어진 동일한 색상의 자켓을 걸쳤다. 남은 것은 약간의 액세서리.
모든 단장을 마치자 언뜻 보면 다소 전투적으로 느껴질 법한 붉은색 옷을 입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띠리리리-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유서준이었다.
서하나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잘 있어?”
전화기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세라는?”
“세라도.”
“혼자서 추석 때 고생이 많았겠다.”
유서준의 목소리에 그녀는 그리움을 느꼈다. 이제 못 본 지 며칠 되었다고.
“그쪽 사정은 어때?”
서하나가 먼저 궁금증을 꺼냈다.
유서준의 대답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오리무중이야. 영국 은행이랑 경쟁 중이지만…….”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니 그리 유리한 상황은 아닌 듯 보였다.
“너무 무리하지 마.”
“알고 있어. 금감원 반응은 어때?”
유서준의 물음에 서하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심했다. 자칫하면 그의 기를 꺾어버릴 것 같기도 해서였다.
“예상했던 바대로야. 지윤상 부원장님께서 열심히 뛰고 계시지.”
“응, 그럴 줄 알았어. 하나 씨야말로 무리하지 마. 무슨 말 하는 줄 알지?”
“알아.”
“어쨌든 곧바로 일이 되는대로 연락 줘. 여기 시각으로 아침까지는 도착해야 하니까. 만일 안 되면 안 된다고 연락 주고 그땐 다른 방법을 써봐야지.”
유서준의 밝은 음성을 들으며 서하나는 힘을 냈다.
그녀는 마음을 새롭게 다졌다.
**
16일 오후 무렵, 오도욱은 금감원을 방문한 서하나를 맞았다.
붉은색의 강렬한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에 오도욱은 내심 탄성을 질렀다. 그의 눈동자가 몇 차례나 그녀의 아래위를 오르내렸다.
붉은색 옷을 입은 그녀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단순히 그가 붉은색을 언급한 때문인지 아니면 그를 도발할 생각이 있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것이든 나쁜 조짐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서 사장님 어서 오시지요.”
오도욱은 나름 예의를 차려 그녀를 자신의 사무실 안으로 인도했다.
예전 부국장 시절보다 다소 넓어진 사무실 내는 비교적 깔끔했다. 각종 자료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을 법하건만 벽면의 책장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중앙에 놓인 나지막한 유리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하나는 소파의 중앙에 다리를 가지런하게 눕히고 앉으면서 가져온 손가방을 무릎 위에 두었다. 다소 짧은 치마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비서로 보이는 아가씨가 곧바로 커피를 내왔다.
오도욱이 인사말을 꺼냈다.
“오늘따라 미모가 돋보이는군요.”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서하나가 가볍게 응수했다.
그녀는 가방에서 금감원에 보냈던 공문을 꺼냈다.
오도욱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공문은 잘 검토해봤습니다. 리먼을 인수하려는 SJ 증권의 분투를 높이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금감원 내부에서는 전반적으로 부정적 견해가 강하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지요?”
오도욱의 말은 예상했던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서하나는 잠자코 그의 설명을 들었다.
오도욱은 그럴 수밖에 없는 과거의 각종 기록을 끄집어냈다. 국내 금융기관이 지금까지 해외에 투자해서 제대로 성과를 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행적이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설명이 잇달았다.
한참 듣기만 하던 서하나가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현재 미국 금융계가 리먼의 부도로 시끄럽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고요. 리먼을 인수하려면…….”
“아마 오늘 중으로 금감원 승인이 나지 않는다면 물 건너가겠죠.”
오도욱이 그녀의 말을 곧바로 잘랐다.
서하나는 오도욱 역시 상황을 충분히 제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만큼 관심이 많은 사안일 것이다. 국내 경기에 심하게 영향을 미치는 데다 SJ 증권마저 관련되어 있으니까.
서하나는 오도욱을 바라보며 사정했다.
“그래서 오늘 중으로 처리 부탁드립니다.”
“설사 금감원 승인이 나더라도 의견이 얼마나 호의적으로 나갈지는 의문입니다. 알다시피 SJ 증권은 국내 메이저 증권사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력이라고 해봐야 아직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 증권사입니다. 굳이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짐작이 가죠?”
오도욱이 슬쩍 운을 띄우며 그녀의 표정을 봤다.
서하나는 내심 이를 악물었다. 예상했지만 역시나 반응은 싸늘했다. 현재의 분위기로 보아선 투자를 허가해서 보증서를 보내주는 것도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쓴다고 하더라도 호의적인 내용이 어렵다는 의미였다.
서하나는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신도 우리나라의 금융산업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지 잘 아실 거예요. 리먼의 인수는 금융 선진화의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대국적인 관점에서 허가해주세요.”
오도욱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렇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외국환이 부족합니다. 그렇게 낭비할 달러가 없어요. 외국환 관리규제를 괜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SJ는 그럴만한 역량에 미치지 못합니다.”
대화가 평행선을 달렸다.
이윽고 서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말고요. 후배 잘 되는 길 막지 말고 한번 힘써주세요.”
오도욱의 입가에 만족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드디어 견디지 못한 서하나가 사정하기 시작했다고 여겼다.
오도욱은 서하나의 아래위를 훑었다. 오늘 붉은 옷을 입고 온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 붉은 속옷을 입고 온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화해와 굴복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의 눈이 그녀의 상체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하얀 블라우스 내부로 흘낏 비치는 브래지어 자국이 흥미로웠다. 붉은색처럼 보이긴 했지만 명확하진 않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하나 역시 오도욱의 태도에서 그의 생각을 짐작했다. 역시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 그녀가 선택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 오도욱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서 사장님, 지난번에 전화로 말했던 것 말이지요…….”
의미를 짐작한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도욱이 능글맞은 미소를 떠올리며 물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리라고 봅니다만…….”
“일단 보증서부터 보내주시고 얘기해요.”
서하나가 사정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도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보증서를 써주고 나서 딱 잡아떼면 나만 손해 아닌가요?”
“정말 보증서랑 그런 일을 연결할 생각인가요?”
“오호, 정말 붉은색을 입고 왔나 보군요?”
“당연하죠.”
오도욱의 생각과 달리 서하나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했다.
너무 직설적인 대답에 잠시 당황하던 오도욱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확인시켜 주면 화해 의사로 받아들이지요.”
“으음, 알겠습니다. 정말 그걸로 만족하실 생각인가요? 그렇다면 해드리죠.”
서하나의 눈빛에 은은한 분노가 일고 있었다.
오도욱은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말하는 화해란 그녀의 굴복을 의미했다. 그는 상대가 굴복하겠다는 말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사장님, 확실히 해요. 오늘 밤 그대는 집에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차피 남편도 이 동네 없으니 상관없지 않나요? 대신 보증서는 확실하게 보내드리지요. 어때요?”
서하나는 상대의 집요한 요구에 입술을 깨물었다.
오도욱이 탁자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바싹 당겨 앉았다.
“자, 그럼 블라우스 단추를 풀든 치마를 올리든 당신이 호의로 왔음을 보여줘요.”
오도욱의 눈동자가 빛났다.
서하나는 안면을 딱딱하게 굳혔다.
어째 가도건설의 그날이랑 똑같을까. 그때 그 자리에서 그녀가 굴복했었다면 지금의 그녀는 완전히 망가졌다.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은 미래를 어떻게 바꿀까.
굴복하는 순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오늘 하루로 끝날까. 설사 그렇더라도 남편 얼굴은 어떻게 볼까.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보증서는 영영 날아가 버리고 금감원과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서하나는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가방을 치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