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76
185. 금감원 보증서(3)
오도욱의 눈이 그녀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서하나는 손가방을 옆으로 치우고 앉은 상태에서 다리를 세웠다.
오도욱의 눈에 그녀의 하얀 다리가 여과 없이 반짝였다. 살구색의 엷은 스타킹.
그의 눈이 저절로 그녀의 허벅지로 옮겨졌다. 비교적 짧은 붉은 빛 치마 아래로 늘씬한 다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살짝 들린 치마 아래로 허벅지 안쪽이 슬쩍 보였다.
치마로 드리워진 그늘 때문에 오도욱은 속옷 색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흰색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정말 확인시켜 줄 생각이었다면 다리를 좀 더 벌리고 보여줬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눈을 들었을 때 서하나가 경멸이 담긴 눈빛을 보내며 노려보고 있었다.
오도욱은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서하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치없는 국장님, 이걸로 끝내기로 하죠. 국장님은 리먼 인수를 반대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서하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올려다보는 오도욱을 향해 서하나가 내뱉었다.
“해솔이 어떻게 된 줄 아시죠? 그거 다 욕심 때문이랍니다. 국장님의 앞날도 이젠 장담하기 어렵겠네요. 나중에 뵙죠.”
서하나는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오도욱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
일단 주사위는 던졌다. 아니, 던지는 것을 포기했다. 남은 것은 지금 단계에서 최선을 다해 수습하는 것이다.
서하나는 지윤상 부원장을 찾았다.
마침 지윤상 부원장은 자신의 사무실에 있었다.
서하나를 본 그는 연신 미안함을 표했다.
“쉽지 않네요. 아래쪽 실무자부터 위쪽 금감원장까지 하나같이 모두 부정적입니다.”
이미 듣고 있던 대로였다.
“저도 오도욱 국장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서하나는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지윤상 부원장은 그녀의 표정에서 만만찮은 일이 있었음을 짐작했다.
“오 국장과는 대학 선후배 사이 아닌가요?”
“그렇죠. 그냥 선후배 사이도 아니고 한때 프로포즈까지 받았던 연인이었죠.”
분개하는 서하나의 입에서 숨겨두었던 말마저 새어 나왔다. 그만큼 그녀가 실망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지윤상 부원장이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곧바로 표정을 수습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일단 금감원의 도움은 포기할까 합니다.”
서하나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이 사실을 빨리 유서준에게 알려 대책을 세우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지윤상 부원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현실의 벽에 좌절했다. 자신의 무능력에 한탄했고 유서준을 도와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며칠 고생 많이 하셨어요.”
서하나가 꾸벅 인사를 했다.
돌아서서 문을 나서는 서하나를 물끄러미 보던 지윤상 부원장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그가 서하나의 팔을 붙잡고 다시 안으로 끌어들였다.
“잠깐, 방법이 생각났어요.”
지윤상이 흥분에 싸인 목소리로 외쳤다.
얼떨결에 다시 안으로 들어온 서하나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오늘 내내 금감원장이랑 담판을 지으려고 기다렸는데 금감원장이 눈치채고 나타나지 않아요. 비서 이야기로는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나 어쨌다나.”
“그래서요?”
“원래 급한 공문은 금감원장이 없으면 일단 부원장 전결로 결정해서 보내고 사후 결재를 받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아! 부원장 전결로…….”
서하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 경우엔 나중이 문제다. 자칫하면 부원장이 월권 행사로 인한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지윤상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하나의 염려를 눈치챈 지윤상 부원장이 손을 내저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아니, 이 일로 설사 쫓겨나도 상관없어요. 이미 올라갈 위치까지 다 올라가서 수명이 얼마 안 남았거든요.”
설사 사실일지라도 쉬운 결정이 아님을 서하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심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윤상 그야말로 이 나라의 금융 선진화를 바라는 진정한 국민이었다.
서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꽉 껴안았다.
지윤상이 놀라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하하, 서 사장, 괜히 늙은이 가슴 뛰게 하지 말고…… 차분하게 일을 처리해봅시다. 시간이 얼마 없어요.”
서하나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따라 책상 옆에 섰다.
금감원 공식 공문을 꾸미는 일은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윤상은 결재 서류와 공문을 가지고 원장실로 들이닥쳤다.
잠시 후 문밖으로 지윤상 부원장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금감원장 비서는 부원장을 막을 힘이 없었다.
금감원 직인을 찍은 공문을 서하나는 팩스로 유서준이 묶고 있는 호텔로 보냈다.
유서준은 16일 화요일 새벽 5시경에 팩스를 받았다.
**
[2008년 9월 16일]파산신청과 승인으로 인한 격동의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다.
유서준은 아침 8시에 캘런 부사장으로부터 최후의 확인 요구를 받았다.
그는 곧 부사장실을 방문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일행을 일단 내버려 둔 채 홀로 리먼 브러더스 본사로 올라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본사 주위는 혼란스러웠다. 잠시 후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사람으로 이 거리는 메워질 것이다. 직장을 잃어 떠나는 리먼 계약직 사원과 리먼 사태 취재를 위해 전 세계에서 몰려든 기자들. 절박한 온갖 군상이 다시 그려질 것이다.
캘런이 초조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서준은 가방에서 전송받은 팩스를 꺼냈다.
“한국 금감원으로부터 온 확인서입니다. 리먼 인수승인과 저희의 능력을 인정하는 보증서지요. 요청하시던 서류가 맞습니까?”
캘런 부사장이 팩스를 뒤적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달리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그녀의 표정에 염려의 빛이 살짝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표정에서 FRB의 의사가 이런 정도로는 호의적으로 바뀌지 않음을 직감했다.
유서준은 곧바로 최후의 승부수를 꺼내 들었다. 만일 금감원의 승인을 얻지 못했을 때 빼 들려고 고민했던 최후의 카드였다.
“캘런 부사장님, SJ의 리먼 인수 의지가 확고함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캘런 부사장이 그를 의아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더 나올 협상 여지는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나 보다.
“인수 금액을 1억 달러 올리겠습니다. 저희 제안은 18억 달러입니다. 이것은 저희 쪽의 의지표현입니다.”
캘런 부사장이 이해하는 표정으로 끄덕였다.
유서준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이건 이면 계약에 해당합니다만, 만일 저희가 인수한다면 리먼 최고 경영자에 해당하는 그룹 최고책임자(CEO)인 회장, 사장, 부사장 세 사람을 내부에서 승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SJ에서는 초기 10년간 소유와 경영을 확실히 분리할 생각입니다.”
사실상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발언에 캘런 부사장은 눈만 껌벅였다.
“10년이라 하심은?”
캘런 부사장이 의문을 나타냈다.
“아마 지금부터 향후 5년간은 파산으로 인한 여파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누가 경영자가 되어도 수습하느라 제 뜻을 펼치기 어렵습니다. 5년 후라야 제대로 뭔가 다시 시작해볼 수 있겠지요. 그래서 10년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내부승진으로 경영자를 채우면 현재 동요하고 있는 임직원 이탈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아마 FRB가 가장 좋아할 제안이라 생각이 드네요.”
유서준은 현실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곳에 오면서 계속 들었던 말이 바로 리먼을 아시아계 기업으로 넘기기 싫어한다는 백인의 자존심이다. 그게 바람직하든 하지 않든 이곳의 정서가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수용해주는 것이 답이었다.
사실상 유서준은 FRB가 은연중에 가장 싫어하는 부분을 해결해준 셈이었다.
이를 안 캘런 부사장의 안색도 환하게 밝아졌다.
“풀드 회장께도 이 사실을 잘 전달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서준의 말에 캘런이 피식 웃었다.
“풀드 회장은 요즘 출근도 하지 않으세요. 일체 면담이나 회견을 사절하고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입니다.”
언론에 시달리고 있는 풀드 회장의 심정을 그는 내심 이해했다.
모든 제안을 전해 들은 캘런 부사장이 FRB와 협의하기 위해 떠났다.
유서준도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었을 때 유서준은 리먼 측 실무자의 방문을 받았다. 그가 말로 언급했던 인수 금액이 18억 달러로 고쳐진 협의계약서와 내부승진을 보장한다는 이면 계약서였다.
유서준은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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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FRB의 발표가 있었다. 리먼 브러더스의 본사를 포함한 북미 사업 부문을 SJ 투자은행 홍콩법인과 18억 달러에 매각계약을 성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리먼의 아시아 호주 부문을 2억 5천만 달러에 일본 노무라증권에 넘기기로 합의했다는 내용도 공개되었다.
산하 계열사는 채권단의 주도하에 여러 기업과 협상 중이라는 발표도 있었다.
미국을 격동시켰던 투자 랭킹 4위 은행, 리먼 브러더스의 매각이 모두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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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객실에서 티비를 통해 FRB의 발표를 지켜보던 유서준과 일행은 환호성을 올렸다.
“성공했어!”
유서준은 주먹을 불끈 쥐고 대소를 터트렸다.
신선영을 비롯하여 모두가 손뼉 치고 야단법석을 피웠다.
유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김현아를 힘껏 껴안았다.
김현아 역시 환호성을 지르며 스스럼없이 그에게 안겼다.
그는 김현아를 안고 제자리에서 몇 바퀴를 빙 돌았다. 마치 신혼부부 같은 행동이었지만 환호에 휩싸인 일행 누구도 이를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갑자기 객실 문이 덜컥 열렸다.
송예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SJ의 리먼 인수를 축하해주러 왔다가 유서준이 김현아를 안고 있는 장면을 봤다.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잠시 후 그녀의 등장을 알아챈 신선영이 반갑게 맞았다.
“송예은 씨 오셨어요?”
“인수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송예은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유서준은 그녀를 보고는 김현아와 떨어졌다.
그는 무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은이 덕분이야.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어.”
그는 송예은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송예은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샘, 축하해요. 이제 리먼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셨네요. 드디어 세계적인 인물로 발돋움하셨어요.”
유서준은 그녀와 악수했다.
송예은이 일행의 눈치를 살피더니 재빨리 말했다.
“저녁때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 열심히 즐거움을 누리시고요. 아마 뒤처리할 일도 많으실 거예요.”
송예은이 일행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황급히 객실을 빠져나갔다.
유서준은 그녀의 행동이 다소 이상하기는 했지만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리먼 인수 기쁨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한참 들뜬 시간이 지나고 나자 신선영이 그제야 리먼 인수 선정에 대한 의문을 표했다.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생각했었어. 그런데 갑자기 선정되다니 뭔가 이상한데?”
신선영이 유서준에게 물고 늘어졌다. 그녀 역시 전날까지의 FRB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감원에서 갑자기 술수를 부려주지도 않았을 거잖아?”
김현아 역시 의아함을 표명했다. 그녀는 서하나에게서 오도욱의 이야기를 어렴풋하게 듣고 있었다. 그녀 역시 서하나, 오도욱과 동문이었으니까.
유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승부수를 던졌어.”
“뭔데?”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유서준이 아침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10년간 사실상 인사권을 포기했다고?”
“그게 현실적이었어. 사실상 우리가 인사권을 쓸수록 리먼에서 이탈자가 늘어날 거야. 유능한 직원이 떠나가버린 금융회사는 껍데기만 남아 쓸모가 없어지는 거지.”
아깝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10년 후부터는 확실하게 되찾아오면 된다. 그때는 SJ 측에서도 능력이 생길 테니까.
유서준은 신선영을 향해 확고하게 말했다.
“이제 선영이 누나가 해줘야 해. 선영이 누나는 지금부터 리먼의 서열 4위인 투자전략본부장을 맡아줘. 실권만 따진다면 사실상 서열 1위지. 살림집도 뉴욕으로 모두 옮기고. 어때?”
신선영은 꿈꾸던 대로 금융 중심지 월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유서준은 그날 곧바로 리먼과 채권단으로 이루어진 이사진 회의에 참석해 회장, 사장, 부사장을 내부승진으로 임명하고 투자전략본부장에 신선영을 추천했다.
리먼 브러더스는 빠르게 안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