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78
187. 애증의 혼란(2)
구인혁과 다이어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 가끔 이메일로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이렇게 직접 대면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유서준은 다이어리에 대해 할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이 메일로 모두 전할 수 없던 상세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예전에 네가 짐작했던 것 있지? 다이어리를 과거로 보낸 이유.”
유서준이 먼저 운을 뗐다.
“응, 그때 네가 꿈을 꿨다고 했잖아. 크흐흐, 납골당에서 나를 붙들고 타임머신이라도 만들어서 살려달라고 막 울었다며?”
구인혁이 예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그가 예전에 추측한 바로는 그 사건이 궁극적으로 다이어리를 과거로 보낸 이유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측은 훌륭하게 맞아떨어졌다.
유서준은 911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여인은 예상대로 김현아가 맞았어. 결론적으로 다이어리에 적힌 여인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어.”
“오호, 신기하네. 그럼 다이어리를 보낸 이유가 2027년에 있을 너의 죽음이랑 그 여인의 죽음 이 둘을 방지하기 위한 거로 추측한 게 사실이었구나. 역시 난 천재야!”
“그런 셈이지. 하나는 해결한 거야.”
유서준이 옆방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말했다.
“궁극적으로 김현아의 죽음을 막은 것은 바로 구인혁 너야. 너야말로 김현아의 은인이지.”
“내가 아니라 서준이 네가 고생한 거야. 예전의 운명에서는 너의 결혼 대상이 김현아가 확실했구나. 흠, 그럼 난리 났네? 지금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해 버렸으니.”
“응, 그런 것 같아.”
“큭큭, 요즘 현아 만나면 뿌듯하겠다. 어떤 느낌이 들어? 예전의 아내 같아?”
구인혁이 장난삼아 물었다.
유서준은 그동안 변화된 김현아와의 감정을 떠올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정말 특별한 느낌은 있어. 아내가 아니면서도 아내 같은 느낌이랄까. 이 여자가 원래는 나의 아내였다는 생각이 드니까 정말 잘 해주고 싶은 것 있지? 아련한 그리움도 들고.”
“크흐, 좋겠다. 현아야 원래 사랑스러우니까.”
“현아가 뭐가 사랑스러워? 걔 원래는 선머슴이었다. 그나마 요즘엔 많이 좋아졌지만.”
유서준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구인혁이 수긍했다. 그도 과거의 김현아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긴 하네. 현아한테 잘해줘라. 꿈에서처럼 놓친 다음 질질 짜지 말고.”
“잘해주려고 노력 중이야. 현아가 결혼하면 한시름 놓을 텐데.”
“현아 결혼 안 할 모양이더라. 지은이가 하는 말 들어보면. 너한테 단단히 빠졌나 봐.”
“으그, 빠지긴 뭘 빠져.”
두 사람은 김현아에 대한 말을 나누었다.
점차 화제는 다른 내용으로 옮겨갔다.
“네 번째 다이어리도 나타났어.”
구인혁이 깜짝 놀랐다. 이것은 중대 사건이었다.
궁금해하는 구인혁을 향해 유서준이 간략히 설명했다.
“박강수가 갖고 있었어. 그런데 박강수가 그것을 어떻게 갖고 있었을까?”
“음, 언제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는 모르고?”
유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물어볼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구인혁이 한참 고민했다. 네 권 중에 한 권만 떨어져나와 다른 곳에 존재한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히 미래에서는 동시에 보냈을 것이다.
구인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에서 과거로 물건을 보내는 핵심은 시공간의 왜곡이야.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특정 지점의 시공간을 왜곡시킨 다음 이를 다른 시공간과 접하게 만들어 물건을 보내게 돼. 현재 짐작 가능한 이유는 에너지의 부족이야. 과거로 보내던 그 날 에너지 계산 오류가 발생했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로 시도했을 거야.”
“다이어리 세 권은 정확하게 도달할 만큼 에너지가 충분했지만 마지막 한 권에서는 에너지가 부족했단 거야?”
“그렇지, 한 권은 예정된 시각과 장소로 가지 못하고 에너지가 허용한 시각과 장소로 가버린 거야.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박강수는 용케 그것을 주웠고 다이어리의 정체를 알아냈어.”
“그럼 미래에서 보낼 때 착각했던 건가?”
“그럴지도. 아니면 불가피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그 다이어리는 어떻게 했어?”
구인혁의 음성에 긴장감이 일었다. 다이어리의 비밀은 아무나 함부로 알아서는 안 될 문제다.
유서준이 안심하라는 표시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행히 없애버렸어. 박강수가 그 내용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존재가 사라졌지. 잘한 건가?”
구인혁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중요한 거! 다이어리에 뭐가 적혀있는지 살펴봤어?”
유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서하나에게도 별다른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으음.”
현재로서는 다이어리를 없앤 것이 잘 한 짓인지 잘못한 짓인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그 다이어리 안에 별다른 것이 적혀 있지 않았기를 바랄 수밖에. 2027년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이 적혀 있었다면 난감해질 것이다.
“SJ 증권과 리먼 브러더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됐어.”
“너도 참 힘들게 산다. 생각해보면 대학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오로지 2027년을 대비하며 살아가는 셈이잖아?”
구인혁은 유서준이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겉으로는 부자가 되어 멋있게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훗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중이었으니까. 그가 보기에 유서준은 정말 하나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유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있어. 그래도 현아의 목숨을 구하고 나니까 정말 뿌듯하더라. 2027년을 탈 없이 보내게 된다면 정말 보람될 거야.”
화제는 타임머신으로 넘어갔다.
“타임머신 연구는 잘 돼?”
“물론! 내가 누구냐. 별문제 없이 진행 중. 확실히 답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문제를 푸니까 달라. 타임머신이 가능하다는 해답을 알고 있으니 웬만큼 벽에 부딪혀도 해결하게 돼.”
구인혁의 표정에서 자신감이 내보였다.
구인혁은 이론적인 타임머신 제작은 예전보다 분명히 빨라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마지막 이론적 장애물인 시공간 왜곡 형성이론은 막바지를 달리고 있었다. 향후 십 년쯤 후면 기기 제작도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이를 제작하려면 부품 발전이 필요하다.
“그것보다 말이지, 요즘 과연 타임머신을 만들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져. 만일 타임머신을 만들고 그 시점에서 다시 과거로 뭔가를 보내면 또 세상이 바뀌는 거잖아? 지금의 세상이 만족스럽다면 만들지 않는 것이 답이란 생각이 드니까.”
구인혁의 염려는 금방 이해됐다. 원래는 죽었을 김현아가 지금 세상에선 살아있었다. 그게 또 바뀔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구인혁이란 사람은 정말 중요한 인물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능력을 알게 된다면 이를 이용하기 위해 구인혁에게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을 만들지 않더라도 지금까지의 모든 일은 바뀌지 않는 거지?”
“당연하지. 다이어리는 이미 과거로 가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니까. 앞으로 타임머신을 만드는 것과는 완전무관 해. 내 추측으로는 이미 미래에서 두 가지 물건이 옮겨졌어. 하나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LTCM으로 뭔가가 옮겨졌고 다른 하나는 다이어리가 옮겨졌고. 어떤 경우라도 이 둘은 바뀌지 않아. 없던 것으로 할 수 없다는 말이지.”
유서준은 그의 말을 이해하며 혼란스러움을 줄였다.
“그럼 LTCM에선 이번에도 너를 찾아올까?”
“흐음, 상황이 예전처럼 흘러간다면 굳이 과거를 바꾸기 위해 나를 찾지는 않겠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나란 존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야. 언제 찾아와서 제작하라 해도 이상하지 않지. 아, 조심해야겠다.”
구인혁이 고개를 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정체를 드러낼 LTCM은 분명 과거 90년대의 LTCM과는 다른 존재일 것이다. 구인혁은 그들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 지금 당장 부딪친 문제는 아니어서 두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들이 다이어리 이야기로 고심하고 있을 때 안방에서는 김현아와 이지은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현아야, 너 결혼 언제 할 건데?”
“사람이 있어야 하지.”
김현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결혼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이지은이 김현아의 표정을 이래저래 살피고는 어깨를 툭 쳤다.
“아직도 서준이 못 잊고 있구나?”
“아냐. 서준이가 결혼한 게 언젠데.”
물론 유서준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을 때 다소 충격을 받긴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독신을 고집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쩌다 결혼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본인도 잘 몰랐다. 그냥 시간이 흐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
“네 마음 알 것 같아. 그 사람이 계속 주위에 있으니까. 게다가 엄청난 부자지, 능력 있지…….”
이지은이 반은 놀리는 투로 김현아의 마음을 떠보았다.
김현아는 새삼 유서준과의 관계를 떠올렸다. 911 때 큰 도움을 받은 이후 더 가까워졌다. 이젠 그와 함께 있으면 마치 남편과 같이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심리적으로도 상당 부분 의지가 되고 있기도 하고.
“서준이도 참 무심하네. 어떻게 널 두고 딴 여자랑 결혼할 수 있는지.”
“아냐. 하나 언니랑 결혼한 게 그이에게 더 행복한 건 사실이야. 두 사람 보고 있으면 천생연분이란 생각이 들어.”
“그래도 너란 애가 정말 아깝다. 왜 아무도 주워 가지 않을까.”
이지은이 웃음을 터트렸다. 김현아도 마찬가지로 씁쓸하게 웃었다.
이지은이 거실에 있을 유서준을 슬쩍 염탐하더니 조용히 속삭였다.
“어떨 때는 서준이랑 사고치고 싶지 않아?”
김현아는 대답 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지은이 김현아의 팔을 치며 은근히 말했다.
“사실 요즘 그게 그리 중요치 않아. 미국의 경우를 보면 결혼 후에 배우자 말고 관계를 맺는 경우가 절반이 넘는데. 한국도 비슷하지 않겠어? 그가 그렇게 좋으면 그냥 사고 쳐버려.”
고개를 젓는 김현아를 향해 이지은이 중얼거렸다.
“너 정도의 미모면 유혹하면 다 넘어온다. 서준이도 남자니까. 마침 둘이서 외국으로 여행도 나왔고. 누가 봐도 사고 치기 딱 좋은 경우잖아. 사고 안 쳤다고 해도 누가 믿어줘.”
김현아는 물끄러미 유서준이 있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대로 처녀로 늙어 죽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혼자서 그런 광경을 떠올리던 김현아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하나 언니를 생각하면 절대 못 할 것 같아. 그 언니를 배신할 수는 없어.”
그녀가 느끼기에 서하나는 다소 이상한 구석이 많았다. 자신과 유서준이 붙어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그런 경향이 더 심해져서 마치 두 사람 사이를 허락해준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서 끙끙 앓지 마. 어쩌면 서준이도 너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이지은이 김현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말했다.
김현아는 눈을 감았다. 그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이지은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오늘 둘이 한방에서 잘래? 너 때문에 그의 가정이 깨어지는 게 아니라면 크게 고민할 필요 없어. 눈 딱 감고 일 벌이고 보는 거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질 거야. 따지고 보면 너도 희생 많이 한 거잖아. 그 때문에 결혼을 안 하고 있으니까.”
점점 심해지는 김현아의 고민을 알고 있기에 이지은은 이런 충고를 했다. 고민이 더 심해지면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리란 것을 짐작하기에.
김현아는 이지은의 조언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면 같이 하루 잠자리를 하는 것은 별문제가 아닐 것 같기도 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후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만일 지금 현재의 관계와 달라진다면 그것은 더 나쁜 결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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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혁의 집에서 하루를 숙박한 다음 유서준과 김현아는 보스턴으로 떠났다.
김현아는 유서준에게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고 돌아가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유서준은 김현아를 갑작스럽게 끌고 미국으로 왔기에 그녀의 의견을 매우 존중했다.
그들은 곧바로 나이아가라로 이동했다.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들어간 다음 폭포를 구경했다.
폭포 굉음과 함께 뿌연 안개가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크루즈 배를 타고 폭포 바로 아래까지 들어갔다. 사실상 폭포를 처음 접하는 유서준에게 이 폭포는 자연의 위대함을 체험시켜주는 장관을 보여주었다.
폭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스카이론 타워 전망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은 두 사람은 인근의 전망 좋은 힐튼 호텔에 투숙했다.
유서준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히 그녀를 따랐다.
그날 밤, 둘 사이에서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