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80
189. ELS와 키코(2)
그 시각 유서준은 SJ 투자금융지주 본사에서 한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견기업 사장. 이마가 약간 벗어져 대머리 조짐이 보이는 다소 마른 남자였다.
유서준 앞에 놓인 명함에는 배화섬유 사장이라고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배화섬유 사장이 손을 부들부들 떨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제가 오죽하면 유 대표님께 찾아왔겠습니까?”
유서준은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도움을 바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수출 전문 기업이었던 배화섬유가 곤경에 빠지고 사실상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그를 찾아온 것이었다.
사정은 딱했다.
지난 외환위기 때 달러당 무려 2000원을 넘었던 환율이 점차 안정되면서 수출 기업에 문제가 생겼다. 처음 수출 계약 당시의 환율과 납품 후 돈을 받을 때의 환율이 달랐다. 계약은 원화가 아니라 달러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장은 원화에 의해 돌아간다.
외환위기 때 폭등했던 환율이 점진적으로 하락하자 수출 기업에서는 상대적으로 손해가 발생했다.
유서준은 상대방의 고뇌를 눈치채고 점잖게 물었다.
“배화섬유에서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배화섬유 사장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환율 문제로 고민하던 중에 거래은행에서 키코란 상품을 권하더라고요.”
키코(KiKo, Knock-in, Knock-out)는 환율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판매된 파생상품이다.
“저흰 은행의 권유로 2006년 초에 키코에 가입했습니다.”
2006년에 원달러화 환율은 1000원대 아래로 떨어졌다. 비상이 걸린 수출 기업에 제시된 키코 상품은 당시 평균 환율인 960원을 기준으로 설계됐다.
키코 상품의 손익구조는 다소 복잡하다.
배화섬유가 가입한 키코 상품은 960원에서 1000원까지 환율이 변동하면 은행과 기업은 환율 960원으로 고정거래 하므로 본전이었다. 반면 960에서 더 떨어져 890원 사이까지 하락하면 키코로 인해 기업 수익이 급증하는 구조였다. 즉 960원 전후로 움직이거나 하락하면 기업은 절대 손해 볼 일이 없다. 반면 은행이 그만큼 손해를 본다.
하지만 기업은 이익만 나고 은행은 손실만 나는 그런 상품은 없다.
“키코에 대해 잘 모르고 가입하셨군요.”
유서준의 말에 배화섬유 사장이 수긍했다.
“거래은행이 좋다고 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사장을 보며 유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키코는 정해진 구간 밖으로 환율이 급등 또는 급락하면 기업에 손실이 발생하는 구조다. 이 무렵 발행된 키코 상품은 환율이 890원 아래로 떨어지면 녹아웃이 발생하여 손익은 0이다.
문제가 되는 구간은 녹인 구간인 1010원 이상으로 상승할 때다. 이때부터는 그 손실이 비례해서 커진다.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환율이 하락하며 키코에서 오히려 수익이 났으니까요. 그래서 계속 가입했습니다.”
“혹시 필요 수량보다 더 가입하지 않으셨나요?”
배화섬유 사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유서준은 그가 키코에서 욕심을 부렸음을 눈치챘다. 키코에서 갑자기 돈을 벌다 보니 처음 계획했던 환율 헤지 수량 이상으로 가입한 것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어요. 작년 말까지는 말입니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환율이 안정적이었으니까.
금융위기 이전인 2006년부터 2007년 사이에서 키코는 모든 기업에 환영받았다. 점진적인 환율 하락은 기업에 오히려 수익을 가져다주었다. 어떤 기업은 물건을 팔아 얻은 수익보다 키코 수익이 몇 배나 더 큰 경우도 발생했다.
이것이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며 문제가 생겼다.
“올해 들어 갑자기 달라졌어요. 현재 50억가량의 손실이 키코에서 발생했고요. 하지만 저희 형편상 50억을 지불하면 공장 문 닫으란 소리와 똑같습니다. 그렇게 은행 믿고 돈놀이를 하면 안 되는 것인데…….”
울음 섞인 목소리였다.
유서준도 한숨이 나왔다. 제조업체가 물건을 팔아 돈을 벌지 않고 돈놀이로 돈을 벌 생각을 했으니 정말 이상한 행위다. 수수료를 노려 그것을 유도한 은행은 더더욱 이상하고.
“혹시 추가상품을 더 가입하진 않으셨나요?”
유서준의 물음에 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저흰 여기서 끝내서 다행이었어요. 저희 옆에 있는 더 큰 중소기업은 손실이 나자 은행과 대책을 강구하다 추가로 또 상품을 가입했어요. 뭐래더라…… 피…….”
“피봇요?”
“아, 네 바로 그거. 피봇.”
“그 기업은 완전히 망했겠네요. 아마 손실만 수천억으로 바뀌었을 겁니다.”
2008년 초반에 키코로 인해 환율 손실이 발생하자 일부 기업에서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은행과 협의 후 또 다른 파생상품에 가입하게 되었다. 주가지수 옵션의 양매도 포지션과 손익구조가 유사한 환율 피봇과 선물 매도 포지션과 유사한 환율 스노볼이다. 이런 파생상품은 예측이 틀리면 그 손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유서준도 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증권사는 기업에 자금을 대출해주는 기관이 아닙니다.”
유서준은 은행도 아닌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배화섬유 사장이 의아했다.
배화섬유 사장이 그와 눈을 맞추며 하소연했다.
“저희를 속인 은행에 소송을 걸 예정입니다. 그런데 파생상품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조언을 구하러 왔습니다. 혹시 저희 쪽에 유리한 증언이 가능한가 해서요.”
유서준은 그의 생각을 대략 읽을 수 있었다. 역시나 사장이 분개한 목소리를 냈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상품을 은행이 꼬드겨서 판매한 거잖습니까?”
심정을 이해는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말도 안 되는 상품일까.
파생상품은 이익 보는 자가 있으면 손해 보는 자도 있다. 지난 2년간 기업이 환율에서 이익을 볼 때 은행은 반대로 손해를 봤다. 그게 올해 들어서 역전된 것일 뿐이다. 거기에다 리먼 사태로 오지 않을 것 같은 환율 상승이 기업에는 치명타가 되었고.
그 모든 가격은 철저하게 변동성에 근거한 확률을 이용해 매겨진다.
유서준은 키코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주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지금 이 사람에게 그런 부분이 중요한 것은 아닐 테니까.
그는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파생상품은 양쪽이 동일한 상품입니다. 기업이 불리하거나 유리한 상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상품이란 말은 틀린 것이고요.”
배화섬유 사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기 생각과 다른 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유서준은 이런 말을 꺼내기가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고객에게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고 상품을 판매했다는 불완전 판매 혐의로 고소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네? 저희가 이익 볼 때는 10억 원 수준이었는데 손해 때는 그 10배인 100억 원 수준입니다. 이게 어떻게 정상적인 상품입니까?”
파생상품에 대해 지식이 없기에, 또 이번 환율 상승이 예외적으로 가팔랐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유서준은 그를 설득하기가 난감했다.
고도의 지식이 필요한 파생상품을 이해시키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제조업체가 굳이 그런 지식을 갖출 이유도 없다.
“상품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상품을 무책임하게 판 부분이 문제입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은행이 우리에게 사기 친 겁니다.”
사장은 연신 고개만 내저었다.
유서준은 그를 진정시키면서 다른 제안을 내놓았다.
“상품의 문제점을 제가 짚어드릴 수는 없고요. 그 대신 현재도 그 키코 상품을 갖고 있다면 거기에 맞춰 최선의 방책을 찾아드릴 수 있겠습니다만 어떠십니까?”
배화섬유 사장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은행이 사기 쳤다는 증언을 해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걸 못하시겠다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유서준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사장이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유서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건의 경우 이전 몇 번에 걸쳐 배화섬유는 키코 덕에 이익을 많이 챙겼다. 그러다 나중에 한방에 큰 손실이 난 것이다. 이것을 상품 자체 문제와 이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달리 보자면 항상 이익만 얻겠다는 그런 심리의 문제다.
현실에서 공짜 점심은 존재할 수 없다. 돈을 굴리는 사람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철칙이다.
키코 문제는 환율이 진정되기 전까지 앞으로도 계속 여진을 일으킬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총손해액이 30조를 넘는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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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유서준은 서하나와 긴 이야기를 가졌다.
그는 키코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서하나는 ELS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피해자는 기업과 일반 투자자이고 가해자는 은행과 증권사다. 일견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둘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두 상품 모두 이해가 난해한 파생상품이다.
가입한 자는 상품의 특성을 전혀 모르고 가입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결과는 커다란 피해를 봤다.
그 이유는 상품 가입자의 무지와 욕심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또 일단 팔아서 실적을 올리고자 하는 판매자의 탐욕도 함께 했다.
서하나는 예전 증권사 직원 시절을 회상했다.
“그때 주가 하락 시기에 증권사에서 시위를 일삼는 사람을 보면서 앞으로 절대 저런 상황은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참 어렵네.”
이번 ELS 관련 상품 판매에 SJ 증권도 적잖게 관련되어 있다.
유서준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내가 보는 핵심은 이거야. 팔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판 거지. 원금보장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에게 수익률 높다고 ELS를 권했으니까. 이미 많은 자산을 가진 사람에게 ELS는 분산 투자 측면에서 좋은 상품이 될 수 있지만 은행 예금도 제대로 없는 사람에게 ELS 상품은 사실 말이 안 되는 거지.”
키코도 마찬가지였다. 환율 헤지가 필요한 사람이 그 비용을 감수할 용의가 있을 때 키코가 필요하다. 키코는 돈을 버는 상품이 아니니까. 문제는 이 상품을 돈을 불리는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어렵네.”
서하나가 혀를 내둘렀다.
“우리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상품을 권해야 해. 그들의 장기적인 목표를 듣고 거기에 맞는 금융상품을 설계해줘야지.”
사실상 증권사의 가장 좋은 상품은 고객을 위한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인 랩어카운트다.
지금은 고액 자산가에게만 적용하는 이런 서비스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제공해줄 수 있다면…….
궁극적인 증권사의 목표가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아참.”
유서준이 서하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선물 하나 해주고 싶은데 받을래?”
“응? 갑자기 웬 선물?”
유서준이 선물을 해주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서하나가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물을 필요는 없고 받을지 말지만 결정해.”
유서준의 웃음을 본 서하나가 수상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거 뭔가 이상하다?”
“받고 싶으면 인감도장 줘.”
서하나가 키득거리며 인상을 썼다.
“내 것 막 그냥 팔아버리려는 거 아니지?”
물론 농담이었다.
사실 그녀의 재산이라 해봐야 주식을 제외한다면 여기저기 뿌려져 있는 증권 계좌와 은행 계좌의 현금성 자산이 전부였다. 꽤 많은 돈을 갖고 있었지만, 그녀는 부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아파트나 땅 같은 부동산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사실 유서준도 마찬가지. 그가 가진 부동산이라고는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한 채가 유일했다.
뉴욕 맨해튼의 10억 달러 리먼 빌딩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것은 SJ 투자은행의 것이고 테헤란로의 지주회사 빌딩도 SJ 투자금융지주의 것이지 그의 개인 것은 아니다.
부동산이 없는 이유는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보다 주식을 굴리는 것이 더 수익률이 높은 이유 때문이기는 했다.
서하나는 가끔 이런 부분을 매우 아쉬워했다. 주식 수익률이 높더라도 자산은 적절하게 분배되는 것이 안정성이 높다.
“내가 팔아버리면?”
유서준이 농담하며 그녀의 눈치를 봤다.
서하나가 그의 팔을 꼬집었다.
“히히, 서준이 죽는 날이지. 집에서 쫓겨나는 거지 뭐.”
유서준은 그녀에게 줄 선물을 기획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