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85
194. 해솔 증권의 잔해(5)
황상현 사장의 눈이 유서준에게로 돌아갔다.
뭔가 기분 나쁜 조짐이 온몸을 엄습했다. 이 자리에서 발언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지금 발언을 했다.
그는 내심 욕을 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를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는 법.
그는 유서준을 향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아, SJ 증권 유 대표이시군요. 꼭 표결로 가셔야겠습니까?”
그의 말투엔 어차피 표결로 가더라도 이긴다는 자신감이 담겨있었다. 오늘 주총 회의장 입장 시에 신고된 주주 분포로는 그의 승리가 명확했다.
유서준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표결 한번 해봅시다.”
나지막했지만 확실한 선전포고였다.
한바탕 헛웃음만 짓던 황상현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허, 유 대표께서 꼭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면 해보도록 하지요.”
그는 실무자를 불러 표결을 준비했다.
실무자가 오늘 주총에 참석한 사람의 대표이사 선임 건 의사를 확인했다.
잠시 후 집계가 끝난 사회자가 모두를 향해 공표했다.
“파워에셋의 김성수 상무이사를 해솔 카드의 대표로 선임하는 일에 찬성하시는 분부터 집계해보겠습니다. 파워에셋 증권의 지분 26%, 위임장을 파워에셋에 넘긴 연기금 10%, 기타 여러 증권사 펀드에서 위임장을 넘긴 곳이 모두 5%입니다. 합계 41%이고 주식 수는 총…….”
황상현이 가소로운 웃음을 지으며 유서준을 바라봤다. 그의 계산에 따르면 상대는 절대 이만큼의 지분을 확보할 수 없다.
말을 마친 사회자가 반대자를 발표했다.
“김성수 대표 선임에 반대하는 분은 SJ 증권의 13%, 유서준 대표가 8%, 위임장을 제출한 서하나 사장이 6%, 일반투자자 2%로 29%입니다. 이에…….”
황상현 사장의 입가에 비웃음이 일었다.
그때 유서준이 손을 들었다.
“아직 빠진 부분이 있네요. 여기 위임장입니다.”
유서준이 위임장을 담당자에게 제출했다.
사회자를 비롯한 실무자가 위임장을 점검하더니 놀란 눈으로 황상현 사장을 쳐다봤다. 황상현 사장은 뭔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사회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제출된 위임장에는 해외 투자자본인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를 비롯한 모두 6곳에서 모든 권한을 유서준 대표에게 일임한다는 의사가 적혀 있습니다. 지분은 총 16%로 이를 합하면 SJ 증권 측의 지분은 45%입니다.”
황상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외국인 지분 20% 가운데 16%가 유서준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유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만 대주주가 바뀌었네요.”
“마…… 말도 안돼…….”
황상현은 악수할 생각도 못 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실내에 모인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극에 달했다.
갑작스럽게 해솔 카드가 파워에셋 카드로 변경되는 것이 아니라 SJ 카드로 변경된 탓이다.
유서준은 앞으로 나가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총회 안건을 다시 올리겠습니다. 해솔 증권의 대표이사로 SJ 증권 경영지원실장을 맡고 계신 성용운 실장을 추천하는 바입니다.”
유서준의 손짓에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단상으로 올라가서 인사를 했다. 바로 SJ 증권 성용운 실장이었다.
유서준의 말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해솔 카드를 SJ 카드로 사명을 변경할 것을 알려드립니다. SJ 카드는 앞으로 한 달 내로 이사진을 새롭게 구성할 것이며…….”
**
사실상 한국기업 문화에서 적대적 M&A를 성사시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재벌은 재벌끼리 서로 밀어주고 그 영역을 지키는 룰이 존재한다. 지배 주주의 지분이 조금 낮다 하여 경영권을 위협하거나 빼앗는 경우는 없다. 굳이 주식 50%를 반드시 소유하지 않아도 무리 없이 지배가 가능한 이유다.
파워에셋 증권의 황상현 사장 역시 그런 암묵적인 법칙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가 이번에 지분 경쟁을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어떻게 하나. 모든 결정이 나고 기업은 그를 떠나버렸다.
그날 저녁, 쓰라린 마음에 술을 마시면서 황상현 사장은 분노를 삼켰다.
그는 유서준에게 한방 크게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시중에 떠도는 주식 40%와 외국인 지분 20%에서 무려 40%나 확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유서준이 가능했던 이유는 외국인을 우호지분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유서준은 리먼 브러더스라는 초일류 미국 투자은행을 소유하고 있다. 당연히 외국인 주주와 암묵적인 거래가 가능한 위치다.
주주총회에서 지분 경쟁을 벌일 것을 대비하여 외국 자본인 모건스탠리 같은 곳에 협조를 요청했을 것이다. 리먼 브러더스에서 주주권 위임을 요청했고 모건스탠리는 의심 없이 승낙했을 것이다. 적어도 파워에셋 증권보다는 리먼을 통해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대주주를 확보하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으으, 완전히 당했어.”
황상현 사장은 울분을 터트렸다.
금감원이 먹으라고 떠먹여 준 숟가락을 엎어버린 셈이 됐다.
해솔 카드를 다시 찾는 방법은 주주총회를 소집하여 지분 경쟁을 벌이는 길뿐이다. 그것도 시장에서 주식을 매입하여 지분을 더 확보한 후에 말이다.
이것저것 재보니 쉽지 않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황상현의 얼굴이 더욱 우울해졌다.
“잘못하면 파워에셋 증권도 위험하다.”
해솔 카드의 주식을 사 모으느라 이미 여러 곳에서 돈을 끌어다 썼다. 그중 가장 많은 돈을 빌린 곳은 대부업체인 명동 인베스트먼트였다. 문제는 그 대부 기간이 불과 3개월이란 거다. 앞으로 겨우 두 달이나 남았을까.
두 달 후면 돈을 갚기 위해 다시 해솔 카드 주식을 팔 수밖에 없다. 해솔 카드 주식 보유량은 더 적어질 것이다. 반면 유서준 측은 외국인 우호지분을 비롯하여 갑자기 팔아야 할 급박한 사정이 전혀 없다.
설사 지금 무리해서 주식을 더 확보한다고 해도 나중에는 어찌할 것인가.
이래저래 경쟁이 어려웠다. 여유자금과 단기간 차입자금. 경쟁해봐야 결과는 뻔했다.
“으으, 그래도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다!”
황상현은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여기서 더 무리한다면 파워에셋 증권의 앞날마저 위험해진다. 그는 해솔 증권이 SJ 증권에 대항하여 중국에서 무리하다가 부도를 맞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유일하게 남은 방법은 금감원을 비롯한 정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는 방법이지만 카드사란 특수성, 즉 소비자의 권익 때문에 이마저 길게 끌기 어려울 것이다.
황상현은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리카락이 손에서 마구 엉클어졌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처참한 패배였다.
휴대폰 전화가 울렸다.
그는 휴대폰 창에 뜬 이름을 봤다. 오도욱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곧바로 전화기에서 호통 소리가 들렸다.
“너 갑자기 왜 그래? 너한테 퍼준 걸 왜 SJ에 넘겨?”
오도욱의 목소리엔 살기마저 감돌았다.
황상현은 섬찟한 느낌에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미…… 미안하다. 그쪽에서 그렇게 나올 줄 몰랐어.”
“산업은행 지분을 왜 팔아? 으이그.”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자금 마련하다 보니…….”
황상현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오도욱이 한참 불평을 늘어놓더니 마지막 당부를 했다.
“나중에 박강수에게는 네가 잘 말해줘라. 알아서 잘 달래.”
“아…… 알았어.”
황상현은 자신도 모르게 전화기에 대고 고개를 수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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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솔 카드의 사명은 SJ 카드로 바뀌었다.
곧바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새로운 카드를 출시했다.
도도 SJ 카드. 성공한 캐리어 우먼이나 골드미스를 위한 도도한 카드라는 컨셉으로 홍보를 펼쳤다. 카드의 외형 역시 반투명의 세련된 디자인으로 대체했다.
당연히 대중적 인기가 높은 서하나가 SJ 카드 CF를 맡았다. 서하나의 이미지와 딱 어울렸다.
사람들은 처음에 SJ 카드란 이름을 낯설어했지만, 곧 서하나와 SJ 카드를 연결지었다.
SJ 카드의 시장 점유율이 인수 전보다 더 높아졌다.
SJ 그룹의 인지도 역시 이전보다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역시나 흔히 접하고 사용하는 신용카드는 인지도 면에서 확실한 상품이었다.
사람들의 SJ 그룹에 대한 호감도는 꽤 높았다. 그들은 과거 한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유서준을 기억했다. 이 시대에 드물게 자수성가한 대단한 사람으로 인식했다. 게다가 방송에서 활약하는 서하나의 호감도가 그대로 SJ로 넘어왔다.
재벌 그룹 내에서 SJ 그룹은 도의를 깨버린 기업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SJ의 진취적인 성향을 칭송하는 분위기도 암묵적으로 존재했다.
타 그룹에서도 SJ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외환위기부터 불과 10년. 10년 만에 국내에서 거대 금융그룹을 완성시키고 대외적으로는 유명 은행인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했으니까.
유서준은 내친김에 SJ 증권의 유무상증자를 단행했다.
특히 유상증자 가격은 파격적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벌어들인 SJ 증권의 성장 과실을 주주에게 배분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SJ 증권은 자본금 2000억 원에 달하는 대형 증권사로 간판을 바꿨다. 국내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증권사로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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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5일]2009년 5월,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복이 벌어지는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8월 25일에는 국내에서 최초로 개발한 우주 발사체인 나로호를 발사했다. 러시아의 기술을 그대로 들여왔으나 페어링 분리 이상으로 나로호에서 쏘아 올린 인공위성은 궤도진입에 실패했다. 그동안 노력했던 우주기술 개발 노력이 무위로 돌아갔다.
더운 여름이 물러가던 이때 서울로 들어오는 홍콩발 비행기에 박강수가 타고 있었다.
박강수가 다시 한국에 돌아온 것은 그가 홍콩으로 떠난 지 약 1년 만이자 해솔 증권 부도 후 9개월 만이었다.
해솔 증권의 부도 관련 사법처리 부분은 오래된 가신 몇이 책임을 지고 감방에 들어감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다행히 그에게 지워진 짐은 없었다.
국내로 들어온 박강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마지막 다이어리를 찾는 일이었다.
해솔 증권 부사장 사무실에 있었던 다이어리는 검찰의 압수수색과 함께 검찰로 옮겨졌다고 했다. 압수되었던 물건이 조사가 끝나고 되돌아왔건만 다이어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상당수의 물건이 버려지고 사라진 뒤였다. 그로서는 다이어리를 누가 가져간 것인지 아니면 쓸모가 없다고 버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측근에게 물어보았으나 모두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박강수는 절망했다.
자신이 중국에 잘못 투자해서 해솔 증권을 말아먹었다는 자책을 만회할 방법이 사라졌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유서준과 권대만을 향한 원한이 사무쳤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술로 보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보내던 그는 오도욱으로부터 위로의 전화를 받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실상 그를 수렁에서 구해준 전화였다.
박강수는 냉정하게 자신의 처지를 정리하며 계산했다.
부도로 산업은행 산하로 들어간 해솔 증권은 앞으로 5년쯤 뒤에 정상화되어 매물로 나올 것이다.
그의 아버지의 계산에 따르면 비록 해솔 증권은 망가졌지만 그의 집안이 망한 것은 아니었다. 대주주 지분은 소각되어 사라졌으나 차명계좌에 쪼개어 소액으로 숨겨둔 지분은 살아남았다. 게다가 여기저기 숨겨둔 재산을 모으면 다시 해솔 증권을 인수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다른 곳과 경쟁이 붙으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한국 정서상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해솔 증권은 창업자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195. 적들의 동향
박강수 그에게도 여기저기 숨겨둔 재산이 많았다. 대충 다 합하면 삼백억 가량은 될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이 돈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지금 당장 새로운 사업을 벌인다거나 해솔 증권 인수에 보태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현재 분위기에서는 몸을 사려야 한다.
거품이 꺼진 중국은 앞으로 점차 회복하며 오르겠지만 중국이라면 신물만 났다.
문득 박강수의 머리에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다이어리를 유서준만 이용하란 법이 있나.”
그는 자신이 읽었던 마지막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쓰여 있던 주가지수와 종목의 가격이 일부 떠올랐다.
모두 2017년 이후의 주가에 관한 것이었다. 앞으로 대략 10년 후의 주가다.
박강수는 자신의 부활을, 아니 유서준에 대한 복수를 성급하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은 유서준의 천하였다. 그가 지금 현재 날짜에 해당하는 다이어리를 가진 이상 그를 이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렇다면 기다려야 했다.
2017년만 되면 유서준과 자신은 동등한 상황이 된다. 아니, 이 시기의 내용이 적힌 미래의 다이어리를 한 번이라도 보고 일부라도 기억하고 있는 그가 더 유리했다. 능력으로 대결한다면 그는 유서준을 능가할 자신이 있었다.
“2017년까지 기다린다. 그동안은 무리하지 말고…….”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몇 가지가 있었다. 바로 마지막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2017년 하반기에 코스피 종합주가지수는 무려 2500선을 넘나들었다. 지금은 1500대. 이를 바탕으로 본다면 앞으로 10년간 주가는 오른다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놀라웠던 종목은…….”
그가 첫 번째로 생각해낸 종목은 삼성전자였다. 다이어리에서 2017년 하반기에 삼성전자의 주가가 무려 280만 원을 찍었던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지금 현재는 최근의 급등으로 70만 원선을 약간 웃돌고 있다. 그래도 무려 4배였다.
두 번째 생각해낸 종목은 아모레퍼시픽. 지금 현재는 액면가 5000원에 60만 원 부근이지만 2017년에는 액면가 500원에 30만 원대였다. 즉 5000원으로 환산하면 300만 원이란 의미다. 이것은 무려 5배였다. 물론 그사이의 주가는 알 수 없다. 도중에 300만 원을 상회하는 때가 있으면 적절하게 팔아치워 추가수익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떠올린 종목은 한미약품. 현재가는 액면가 5000원에 대략 11만 원 선. 하지만 2017년 하반기에 한미약품은 액면가 2500원으로 50만 원대였다. 대략 10배 가까이 오른다는 의미였다. 이상한 점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한미사이언스란 종목도 있었다. 한미사이언스는 액면가 500원으로 12만 원대. 5000원이면 120만 원. 이 역시 10배 오른 것과 같다.
박강수는 한미약품과 한미사이언스의 관계를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기업의 지주회사나 합병 분할로 대략적인 정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세 종목에 투자하면 8년 후에 적어도 5배는 벌 수 있고 운이 좋다면 10배도 가능할 것이다. 그의 자산 300억이 1500억이나 3000억으로 불어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무엇을 할지도 고민했다.
그의 기억에 유달리 신경 쓰이는 다이어리의 한 부분이 있었다.
2020년 이후 다이어리에서 자주 언급된 외국계 금융회사. 바로 LTCM이었다.
“LTCM은 지난 1990년대 말에 망했는데…….”
분명히 뭔가 이상했다.
그가 본 다이어리에서 2020년 이후 2026년까지는 LTCM 천하였다. 국내에서도 국외에서도. 이 기간 LTCM은 국내 금융시장에서도 해외 금융시장에서도 놀라운 실적을 올린 것으로 나타나 있었다.
“다이어리로 본다면 LTCM이 다시 부활한다는 의미고…….”
박강수는 LTCM에 붙어야 최종적인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LTCM이 그 무렵 위세를 떨친다면 아마 지금, 아니면 얼마 후에 LTCM이란 기업이 다시 재탄생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2020년부터는 무조건 LTCM에 붙어야 살아남는다. 그렇다면…….”
그는 LTCM이 성장하기 전 초기에 LTCM에 빌붙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일 자신이 LTCM 창업의 초기 멤버가 될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실수를 만회 가능하지 않을까.
전 세계적으로 위력을 떨칠 초거대기업 LTCM이라면 유서준에게 복수하는 정도는 아주 쉽지 않겠는가.
그는 자신의 인생이 LTCM을 얼마나 빨리 찾아낼 수 있는지에 달렸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
리먼 브러더스에 근무하는 송예은은 투자전략팀 회의에 참석했다.
리먼 브러더스의 실질적인 실세라 할 투자전략본부장 신선영이 주재하는 회의였다.
국제 투자은행의 핵심부서인 이 전략팀에는 SJ에서 리먼을 인수한 후 많은 우수 두뇌가 빠져나갔지만, 외부에서 그만큼의 우수 인재가 새롭게 영입되기도 했다.
주로 신선영이 과거 LTCM에서 함께 했던 인사들로 미국 내에서는 꽤 우수하다고 평해지던 자들이었다.
어찌 되었든 적절한 사람으로 채워지고 부도 시에 벌여놓았던 각종 파생상품 포지션 또한 대부분 정리되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포트폴리오를 채우기 시작했다.
리먼 자체가 워낙 역량 있던 회사였기에 빠르게 위기를 극복하고 과거의 영화를 되찾아나갔다.
송예은은 다른 리먼 직원에 비해 다소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대주주인 유서준의 친구라는 배경이 있는 데다 리먼 인수에 음으로 공을 세운 전적이 있었다.
신선영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중용했다.
위기 발생 전에도 자신의 이름을 건 펀드를 운용하는 파트너였던 그녀는 지금은 그런 파트너를 총괄하는 중간 관리자 위치까지 지위가 격상했다.
남들이 보면 대단한 승진이었지만 그녀는 내심 괴로워하고 있었다.
바로 유서준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리먼 인수가 결정되었던 그때 그녀는 유서준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
마침 유서준이 아내와 떨어져 홀로 이곳 미국에 와있었으므로 적어도 그녀 생각에는 함께 밤을 보내며 그 기쁨을 나누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남몰래 흠모해온 그를 가까이할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의 시도는 거절당했다.
그녀의 기분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게다가 더욱 그녀를 힘들게 한 사건이 있었다.
그 직후 그녀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유서준을 몰래 뒤따랐다.
유서준과 김현아는 MIT가 있는 케임브리지에서 일박했다. 지인의 집으로 보였다. 거기까지는 그나마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줄 알았던 두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유서준과 김현아가 폭포 부근에 있는 힐튼호텔에서 둘이서만 묵는 것을 확인했다.
자신을 거부해놓고 김현아와 놀아나다니.
그녀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때부터 송예은은 리먼 브러더스를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투자전략 구상을 위한 열띤 회의가 정회되자 참석자 일부가 사내 휴게실로 몰려가 커피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송예은은 그곳에서 내린 원두커피를 들고 한쪽 구석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마음을 안정시키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녀는 흘낏 그 두 사람을 바라봤다. 두 사람 모두 최근에 리먼에 입사한 파트너였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뚱뚱한 외형이었고 한 사람은 키가 크고 홀쭉한 외형이었다.
“LTCM 이야기 들었어?”
“거긴 왜?”
“LTCM 창업자였던 존 메리웨더가 파산 후에도 계속 재기하려고 몸부림쳤잖아?”
“아, 그거 또 망하지 않았어? 파산 1년 후인 1999년에 2억 5천만 달러를 들여 재출발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오래지 않아 다시 망했다던데?”
“그 이후 이야기 말이야.”
송예은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월가에서 투자자를 모집해서 헤지펀드를 꾸리는 예는 흔했다. 많은 만큼 대박이 난 펀드도 흔했고 한순간 쪽박이 난 펀드도 널려있었다. 굳이 관심이 갈 이유가 없었지만, 그녀를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LTCM이라는 명칭이었다.
어찌 되었건 LTCM은 그 이름만으로도 월가에서 뜨거운 감자였다.
“존 메리웨더에게 아들이 하나 있거든. 톰 메리웨더인가. LTCM 파산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대학을 졸업했어.”
“그 아들이 왜?”
“그 아들이 날을 갈고 있다고 하더라고.”
송예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흔히 보던 동양 무협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모의 원수를 아들이 이를 악물고 심산에서 무술을 수련한 후에 갚는 그런 설정인가.
“그 아들도 펀드매니저 하겠데?”
“벌써 명성이 꽤 높은가 봐. 톰 메리웨더를 중심으로 예전 LTCM 멤버가 모인다는 소문이 도니까.”
“캬, 그 괴물들이 모이면 대단하겠는데? 과거에 LTCM은 천재들의 집합소로 유명했으니까.”
송예은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유서준이 관리하는 이곳 리먼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LTCM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에 문자 도착 신호가 울렸다.
송예은은 휴대폰을 열었다. 권대만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
유서준과 서하나는 테헤란로의 SJ 투자금융지주 본사 대표실에서 회의를 했다.
두 사람만의 회의이다 보니 집과 같은 분위기가 났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최근의 현안을 다루었다.
서하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유무상증자는 주주 반응이 최상이야.”
“주주 입장에선 거의 공짜로 주식을 받은 기분이니 그럴 만도 하지.”
사실상 주식 수가 100% 불어났음에도 주식 가격은 예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니 주주 개인별 자산이 두 배 불어난 효과가 있었다.
“증권사를 설립할 때 고객의 자산을 불려주는 증권사가 되고 싶었는데 주주의 자산을 먼저 불려주네.”
서하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겉으로는 대주주와 소액주주를 공평하게 대한다지만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 주주의 권익을 교묘하게 무시하고 자금을 빼돌려 대주주의 배를 채우는 일이 횡횡하는 곳이 바로 기업이니까.
유서준은 그런 일을 무척 싫어했다. 그는 모든 주주를 존중했고 비록 그 주주 각자가 인사권을 행사할 수 없지만 적어도 수익 면에서는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하나는 새로 편입시킨 카드사에 대해서도 호평했다.
“SJ 카드도 생각보다 잘 나갈 것 같아. 새로 취임한 성용운 카드 사장 의견에 따르면 소비자는 예전 해솔 카드보다 SJ 카드라는 브랜드를 더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어. 특히 성공한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엘리트층에서 호평이야. 포인트 적립 서비스를 대기업 계열 카드사 수준으로 늘리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봐.”
“현재까지는 잘 돌아가고 있네. 모두 하나 씨가 잘해준 덕분이야.”
유서준은 서하나에게 감사했다.
서하나가 웃음을 짓더니 곧바로 한숨을 내뱉었다.
“문제는 사람이야. 자꾸 확장하다 보니 쓸만한 사람이 부족해. 특히 초기부터 우리와 함께했던 믿을만한 사람이 너무 없어. 게다가 괜찮은 대학생은 우리 쪽으로 지원을 안 해. 전부 대기업 계열사로만 몰리고. 이게 문제야.”
“그나마 우리가 상장사라 다행이야. 상장사 아니었으면 직원 뽑기 더 힘들었을걸.”
두 사람의 의중을 잘 이해하는 핵심 실세는 이미 각 계열사에 임원급으로 포진 중이다. 각 계열사에서 능력 있는 사원 역시 빠른 속도로 승진시켰다. 그렇지만 인력이 부족했다. 아래쪽 하부 인력은 더욱 부족에 시달렸다.
“이젠 선영이의 도움을 받기도 힘들어. 선영이도 그 동네에서 인력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가 보더라.”
서하나가 신선영의 리먼 브러더스를 언급했다.
두 사람 모두 신선영의 노력을 무척 감사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리먼에 배치되어 그 혼란을 적절하게 잘 수습했으니까.
신선영은 가족 전체가 뉴욕으로 이사 갔다. 그녀의 남편인 천재욱 메가소프트 사장은 미국에서 게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신선영이 언급되자 유서준의 머리에 연이어 떠오르는 중요내용이 있었다.
“아, 선영이 누나가 얼마 전 연락을 보내왔어. LTCM의 최근 동향에 대해서.”
서하나는 LTCM에 대해 유서준만큼 염려하지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데?”
“LTCM 창업자의 아들이 움직이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