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9
19. 여름방학(4)
K전자 노조원과 교직원의 실랑이를 모두가 염려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박강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러니 주가가 폭락이지.”
주위 학생들의 눈이 박강수에게 쏠렸다. 곧바로 박강수의 입에서 K전자 현황과 주가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 특출나지 않은 기업에 대해서도 꽤 자신 있게 그 현황을 읊는 것을 보면 그의 관심과 지식 역시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K전자는 년 초 대비 주가가 -10%나 빠졌어. 다른 기업은 다 오르고 있는데 말이지. 그 이유가 바로 과다한 임금인상 요구이고.”
옆에 있던 김현아가 물었다.
“노조의 요구도 무리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박강수가 그녀의 말에 콧방귀를 끼었다.
“작년 K전자는 대외 여건 악화로 수출에 곤란을 겪었어. 덕분에 전년 대비 순익이 대폭 감소했지. 그런 상황에서 임금을 인상하면 회사는 더 어려워져. 그럼 주주는 대체 어떻게 이익을 얻으라는 거야? 회사의 주인은 노조가 아니라 주주야.”
사실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월급을 많이 주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희생을 감수하거나 회사 운영에 문제가 발생한다.
김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잔업을 포함하여 일주일에 60시간씩이나 일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과도한 거야.”
곧바로 박강수가 반박했다.
“그렇다고 임금을 갑자기 저렇게 올려달라면 안 되지. 그렇게 되면 회사는 임금이 싼 곳으로 공장을 이전할 수밖에 없어. 일본을 봐. 국내에서 동남아로 공장을 이전하잖아? 우리나라도 오래지 않아 그렇게 바뀔 거다. 임금인상은 국내 산업의 공동화를 불러와서 전체가 공멸하게 돼.”
경제 측면에서 보았을 때 틀리지 않은 시각이었다.
동아리 회원들은 대부분 경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데다 주주의 입장이었기에 박강수의 말을 지지했다.
김현아는 ‘그럼 너도 60시간 일해 보던가’라고 대꾸하려다 말을 닫았다. 자칫하면 감정싸움으로 흐를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고개만 저었다.
우쭐해진 박강수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를 날렸다.
“회사가 살려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사람은 다 잘라야 해. 기업은 이익을 내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박강수의 눈이 의기양양하게 빛났다. 그는 노골적으로 K전자 노조원을 싫은 눈으로 쏘아보다가 자신의 차로 이동했다. 그는 학기 중에는 자신의 승용차를 가져오지 않았지만, 방학 중에는 차를 갖고 다녔다. 차종은 최근 수출로 유명해진 현대자동차 엑셀. 하얀색 색상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학교 전체에서도 차를 소유한 학생은 손을 꼽을 때였다. 박강수는 우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두의 눈이 쏠리는 이런 기분은 매우 즐거웠다. 특히 자신과 차를 번갈아 쳐다보는 김현아의 눈빛에 그는 내심 미소를 지었다.
박강수는 차 문을 열며 근처의 동아리 회원에게 말했다.
“자, 뒤풀이 장소까지 내가 태워줄게. 타고 싶은 사람은 타라.”
몇 학생이 승용차에 올랐다.
박강수의 눈이 김현아에게 향했다.
“넌 안타?”
“난 걸어갈래.”
“그러던가.”
박강수가 짜증을 내며 차 문을 콱 닫았다. 그는 여자가 자존심을 내세운다고 투덜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강수의 차가 사라졌다.
그 후에도 약간의 시간 동안 김현아는 K전자 노조원과 교직원의 실랑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직접적인 해법이 모호한 이런 문제에 정답은 없다.
김현아는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유서준이었다.
“뭘 골똘히 생각해?”
“아, 노조 파업 관련해서 생각나는 게 있어서.”
유서준 역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
김현아가 유서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서준이 넌 어떻게 생각해? 해고 노동자 시위 말야.”
유서준이라고 특별한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고개를 저었다.
“노조나 사 측이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야. 서로 한발 양보해야지. 문제는 서로 감정적으로 되어 고소 고발이 난무하고 있다는 거. 장기적으로 가면 모두에게 불리해져.”
유서준이 김현아와 걸음을 나란히 했다.
김현아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올해 들어 산업계에 파업 시위가 유독 심한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당분간 더 심해지겠지. 외국의 시각에서는 경제발전으로 인한 뒤늦은 권리 찾기란 설명도 있어.”
유서준이 대답을 계속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잖아? 경제학 면에서는 말이 안 되는 것이지만 모두가 잘 되는 방향으로 해결되면 좋겠어. 성장의 과실이 기업만이 아니라 그 주주와 근로자에게까지 골고루 돌아가는 그런 방향이 좋은 거지.”
“예를 들면?”
김현아가 유서준의 말에 호응하며 물었다.
“음, 회사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회사의 성장 열매는 우리사주를 보급함으로써 나눌 수 있어. K전자는 과다한 노동시간이 문제니까 근로시간을 다소 줄인다면 생산성이 분명 높아질 거야. 고용을 늘려 시간을 나누면 과다한 근로시간 문제는 일단 해결될 거야. 다만 그에 따른 임금 감소를 서로 잘 타협해야겠지.”
우울했던 김현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물론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서로의 극한대립보다 희망적이었다.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는 교직원과 노조원이 보였다.
“그래, 모두가 잘 사는 사회, 불가능하겠지?”
김현아가 유서준을 향해 중얼거렸다.
유서준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김현아는 문득 지난 6월의 시청 시위 때가 생각났다. 자신이 발을 삐었을 때 적극적으로 그녀를 돌봐주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준이는 참 가슴이 따스한 사람이구나.’
내심 그런 생각을 하니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한편 유서준은 걸음을 옮기면서 다이어리에 적힌 2027년 최후의 순간을 떠올렸다.
편지에 적힌 한 구절이 그의 가슴을 괴롭혔다.
*
달러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기업은 부도가 나 넘어졌으며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난다.
*
제 이의 외환위기로 인하여 국가와 사회는 사실상 기능이 마비되었다. 여러 힘든 상황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어려울 때는 바로 해직을 통보받았을 때다. 어떤 심리학자는 해직이 양친의 죽음과 비슷한 정도의 심적 고통을 준다고 말한다.
직장에서 쫓겨나는 순간 대부분 사람은 해결 자체가 불가능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어쩔 수 없이 은행 빚을 지고 있다가 갚아나가야 하는 사람이라면 회생 불가능한 상황으로 발전한다.
해직 노조원 수 명의 시위를 보며 유서준은 먼 훗날 맞게 될 그 상황이 얼마나 힘든 고난의 시간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실직자가 이 나라 전반에 퍼지게 되는 위기는 절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다이어리가 자신에게 온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자신 한 사람의 영화가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 전체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그가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졌다. 바로 국제투기자본과 맞서기 위해 남아있는 40년 동안 그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이.
**
[1987년 8월 1일]7월이 끝난 다음날,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이 동아리방에 모였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바로 동아리 벽면에 붙여진 주식투자대회 결과표였다.
7월부터 시작된 하반기 투자대회 결과표에는 아직 참가자의 이름과 원금만이 표시되어 있었다.
7월이 끝난 오늘은 하반기 첫 달 성적이 기록되는 날이었다. 대부분 학생은 각자가 거래하는 증권사에 들러 잔고 증명과 거래 내역을 받아왔다. 부득이한 때에는 말일 종가 기준 잔고를 전화로 최종 확인하여 제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그 경우 다음날 반드시 제대로 된 잔고 확인서를 제출해야 했다.
유서준도 어제저녁에 증권사에 들러 잔고 증명을 받아왔다. 그는 주식투자대회를 위해 새로 개설한 100만 원 계좌의 것만 제출했다.
동아리 임원이 각자가 제출한 잔고 증명을 취합하여 순위를 매기고 표를 다시 만들었다.
잠시 후 벽면에 참가자들의 계좌 상태가 공개되었다. 모두에게서 탄성과 좌절의 갖가지 반응이 터져 나왔다.
87년 7월 말 주가지수는 485.48로 끝났다. 7월에는 종합주가지수가 무려 +17.9%나 상승했다. 사실상 폭등장이나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주가가 대폭 올랐던 덕분에 대회 참가자 역시 손실이 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랭킹 1위는 역시 상반기와 동일했다. 바로 총무 신선영이었다. 그녀는 한 달 만에 무려 42%의 수익을 올렸다. +17.9%나 오른 주가지수의 영향 때문이었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압도적이었다. 여전히 그녀의 아성을 깰만한 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서준이 보기에도 그녀의 수익률은 놀라웠다.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매매하는 것 같음에도 지나고 보면 수익이 나 있었다. 그는 그녀의 과거 수익을 검토해보면서 언젠가 그녀의 기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워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위는 동아리 회장 선배였다. 역시나 회장답게 안정적이면서도 고수익을 올렸다. 수익률은 30% 후반. 3위는 일학년인 박강수였다. 그 역시 30%대의 수익을 올렸다. 일학년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최고 성적이었다. 평소 주식에 대해 많이 아는 체를 하더니 역시 대단한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고 모두가 수군거렸다.
유서준은 8위로 24%의 수익을 올렸다. 주가지수가 18% 오른 것을 감안하면 그리 큰 수익은 아니었다. 물론 유서준의 다른 계좌는 거의 40%의 수익을 올리긴 했다. 그는 대회에 참가한 공개계좌는 적절한 수익률로 관리할 생각이었다. 너무 높은 수익률로 주목받아도 골치 아파질 수 있으니까.
김현아는 거의 뒤쪽 순위였다. 그녀의 뒤에는 몇 없었다. 불과 서넛만이 그녀보다 아래 수익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차이도 매우 작았다. 7월의 수익률은 고작 5% 남짓.
평소라면 큰 수익이라 할 수 있겠지만 주가지수 상승에 비하면 오히려 손해나 마찬가지였다. 강세장에서 주식 매매가 처음이라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나만 빼고 모두 잘하네.”
김현아가 자신의 등수를 보며 탄식했다. 주가 시세표를 보면 무조건 벌 것 같았는데 실제 매매를 해보니 어떻게 된 게 상승 종목만 피해서 매수하고 있었다. 게다가 팔면 오르고 사면 옆으로 기었다.
“이건 분명 주식 귀신에 씐 거야.”
김현아가 투덜댔다.
“처음엔 원래 그래. 나도 처음에 매매했을 때는 상승장에서도 오히려 손실이 났거든.”
유서준이 웃음을 지으며 다독였다.
김현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주식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보자 수업료를 대체 언제까지 내야 하는 걸까. 잘못하다가는 대회에서 최하위를 달성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그녀는 실소를 머금었다.
“아아, 연말에 쪽팔리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김현아가 고개만 저었다.
유서준은 그녀 역시 매매에 익숙해지면 곧바로 반등할 것이란 사실을 확신했다. 그가 확인한 그녀의 매매는 인기에 휩쓸리지 않고 조심스러웠다. 인기에 영합한 폭등주가 아니기에 수익 폭은 적을지라도 꾸준할 것이다. 다만 12월 전까지는 이번 달과 같은 폭등 장세는 없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조정장이나 하락장에선 오히려 신중한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박강수는 등수를 보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3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대로 쭉!’
예상대로 일학년 중에서는 그가 일등이었다. 6개월간의 대회가 끝나면 그의 능력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능력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김현아가 보고 싶었다.
능력남 탄생! 바로 그가 그리는 이미지였다. 적어도 자신과 사귀게 된다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말의 의미를 확실히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학과에서도 동아리에서도 모두가 주목하는 그녀를 자신의 여친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박강수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단지 유서준의 수익률이 예상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아직도 그는 유서준 따위에게 지는 일이 발생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