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95
205. 미래의 메모리칩(2)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박강수는 자신을 뚫어지라 바라보는 메리웨더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는 일단 이즈음에서 끊어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 뭐 별것 아닙니다. 그냥 그쪽이랑 사이가 별로라서요.”
“SJ 증권이요? 아니면 SJ 투자은행이요? 아니면 둘 다요?”
박강수는 어색하게 손을 내저었다.
“SJ 증권입니다.”
SJ 증권과 SJ 투자은행은 사실상 분리할 수 없다. 법적으로는 분리된 회사이고 영업 지역도 다르나 자본이 연결되어 있다.
메리웨더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습니다.”
그도 거대회사인 SJ 투자은행과 척을 지는 것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물론 미래에서 온 정보의 위력을 체험하고 나면 달라지겠지만.
한동안 고민하던 메리웨더가 박강수에게 물었다.
“혹시 신선영이라고 아나요?”
“SJ 투자은행 사장 말입니까? 현재 거기 이인자로 있습니다.”
“같은 한국인이라…….”
메리웨더가 말끝을 흐렸다.
박강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은 알고 있습니다. 친한 사이는 아닙니다.”
“그 신선영이 예전에 LTCM에서 컸어요. 졸업 후 첫 직장이 LTCM이었으니까요. 그 신선영을 여기로 데리고 왔으면 한데 힘들겠죠?”
메리웨더가 말을 꺼내다가 불가능이란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박강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선영은 유서준 사단의 핵심 멤버다. 사실상 유서준에게 가장 큰 힘을 보태주는 존재다. 신선영을 빼내 올 수만 있다면 SJ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 거기다 서하나까지 엮이면 보통 단단한 게 아니다.
그는 장기적으로 고려해볼 만한 문제라 생각했다.
“하하, 사장 자리를 그리 쉽게 그만두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길게 공작해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신선영은 유서준을 상대할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패다.
메리웨더 역시 동의했다. 지금 당장은 신선영을 데려올 명분이나 당근이 부족하다.
박강수의 고민은 곧바로 다른 곳으로 흘렀다.
“지금까지 미래에서 온 정보는 모두 두 가지입니다. 한국에서 본 다이어리와 이곳의 메모리칩. 또 있지 않을까요?”
메리웨더 역시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라 안색이 심각해졌다.
“이미 두 개가 과거로 왔다는 것은 누군가가 미래에서 더 보낼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메리웨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강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분명히 누군가가 타임머신을 개발해서 시간여행이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게 누굴까? LTCM의 관련자여야 하고 유서준과 연관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 두 곳에 모두 접점을 가진 자는 신선영이 유일했다. 하지만 신선영은 과학자가 아니다.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으로 유추를 해보면 타임머신 개발자는 한국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면서도 LTCM의 레이더망에 걸려있는 인물.”
박강수의 추측에 메리웨더도 동의했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박강수는 과거 동아리 멤버 가운데 그럴만한 인물을 떠올려보았지만 모두 전혀 불가능이었다.
“이 부분은 관련 물리학 저널을 뒤져서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한국인 저자로 시공간 관련 논문을 출간한 자. 그 사람이겠지요.”
메리웨더가 실마리를 잡은 표정이었다.
박강수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메리웨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중에 우리의 일이 잘되지 않으면 그자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또 그자가 필요 없다면 제거해서 후환을 없애는 게 낫겠죠.”
박강수는 메리웨더의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생각보다 메리웨더는 잔인한 면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
유서준은 서하나와 함께 강원도 강릉에 있는 종합병원을 방문했다.
서하나로부터 다이어리의 예전 삶을 들은 이후로 아버지에게 매년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게 했다. 이번에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대장에서 용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늘은 그 용종 제거 수술을 받는 날이었다.
병원을 들어서는 유서준의 발걸음이 급했다.
아버지가 용종 제거 수술에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수술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제는 많이 늙고 쇠약해진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유서준은 눈물이 핑 돌았다.
“몸에 별다른 이상 없죠?”
“서준이구나. 바쁜 데 왜 왔누. 평소랑 마찬가지다.”
“아버님, 이럴 때라도 저희가 찾아뵈어야죠.”
유서준의 옆에서 서하나가 살갑게 인사했다.
아버지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아가도 왔구나. 세라는 잘 있지?”
“예, 오늘 같이 오려 했는데 어째 잘 안 되네요.”
“공부하느라 바빠서 그렇겠구나.”
서하나가 아버지의 침대 시트를 다시 정돈했다.
유서준은 서하나에게서 들었던 다이어리의 내용을 떠올렸다.
원래대로라면 배추밭을 2000년 초에 팔고 난 다음 소작농으로 고생하시다가 2017년에 대장암 판정을 받고 2019년에 돌아가셨다고 했던가.
지금은 2021년이니 애초의 운명보다 2년 더 사신 셈이다. 유서준은 아버지를 볼 때마다 항상 염려되고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아버지가 편안하게 침대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서준아, 배추밭 말이다. 그거 평창 올림픽 이후에도 계속 오르더라. 10년 전이랑 비교하면 몇 배가 오른 건지…….”
그의 아버지는 유서준이 얼마나 부자인지 잘 모른다. 그냥 서울에서 돈과 관련된 큰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한평생 배추 농사만 짓고 사셨으니 세상 물정에 어두운 탓이다.
유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 땅 앞으로 더 오를 겁니다. 꽉 쥐고 계세요. 10년 후면 또 몇 배 될 겁니다.”
“10년? 내가 그때까지 살까?”
서하나가 곧바로 손사래를 쳤다.
“어휴, 아버님, 10년은 금방 가요. 그때까지 당연히 사실 겁니다.”
“벌써 병에 걸렸잖아?”
“용종은 누구나 다 조금은 있는 거래요. 암으로 전이될까 염려해서 미리 제거하는 것이니까요. 아파서 그런 것 아니어요.”
서하나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녀 역시 다이어리를 통해 배추밭 사건을 알게 된 이후 유서준의 아버지를 더 알뜰하게 챙겼다. 물론 오빠와 함께 사는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열심이었다.
아버지 역시 그런 서하나를 고마워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웃음 짓는 두 사람을 보며 유서준은 뿌듯했다.
집안일에 신경 쓰기 쉽지 않은 그녀이건만 이렇게 챙겨주는 것이 고마웠다.
간호사가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곧 수술 들어갈 시간입니다. 보호자 되시죠?”
유서준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수술에 대한 간략한 내용과 주의사항을 알려줬다.
“지금 수술실로 이동할 거예요.”
간호사가 침대를 밀었다.
유서준도 옆에서 같이 이동했다.
곧바로 수술실이라고 크게 적힌 유리문이 눈에 띄었다.
수술실 내부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그는 마음이 울컥했다.
원래의 삶에서는 그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셨지만 이번에는 오래오래 사시게 도와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염없이 수술실을 바라보는 그의 옆에 서하나가 다가와 손을 꼭 잡았다.
서하나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폐암으로 고생만 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돈이 없어서 항상 암 치료비를 걱정하며 돌아가셨던가. 돌아가시면서도 그녀를 염려하여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하셨다. 그때 유서준에게 그녀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한바탕 울고 말았었다.
방금 수술실로 들어간 유서준의 아버지와 폐암 투병으로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 모습이 겹치면서 그녀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젠가는 죽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영원히 함께 살고 싶은 것 또한 사람의 마음일지니.
**
SJ 투자은행 사장으로 승진한 후 신선영의 권한은 한층 강화됐다.
지금도 그녀의 위로 고든 회장이 자리하고 있지만 사내 임원 대부분은 그녀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신선영은 공대 금융 엔지니어 출신에 트레이딩 기법 개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다 보니 사내 정치에 휘말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필요한 때가 아니면 앞에 나서서 인사권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덕분에 고든 회장 역시 그녀와 부딪칠 일이 없어 권력 다툼은 먼 나라 소리가 되었다. SJ 투자은행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신선영은 최근 유서준에게서 받은 이메일에 신경이 쓰였다.
그 이메일의 핵심 내용은 LTCM의 움직임을 상세히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LTCM의 동향은 다른 곳에 비해 꽤 많이 파악하고 소식도 빨리 접했다. 그녀의 지인이 그곳에 많이 있었으니까.
송예은이 LTCM으로 옮겼다는 것을 처음 파악한 사람은 그녀였다. 얼마 전 박강수가 LTCM에 합류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린 것도 그녀였다.
그런데 최근 이메일로 날아온 지침은 다소 이상했다.
“LTCM의 거래 내역을 파악하라고? 그곳의 기법 동향도 주시하라고?”
지금까지처럼 인사 관련 동향이 아니라 상품거래 관련 동향이었다.
신선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LTCM에 뛰어난 천재가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거래 기법이 가장 앞서 있는 기업인 것도 맞다. 하지만 과거만큼은 아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그렇게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다.
“우리도 거기 못지않은데…….”
신선영은 다소 불만이었다.
대학 때부터 알아온 유서준은 주식에 관한 감이 탁월했다. 그런 그가 이상한 지침을 내렸다는 것은 뭔가 특이한 감을 잡았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했다.
그녀는 그 지침이 박강수의 LTCM 입사가 일어나고 얼마 후였음에 주목했다.
사실 박강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많이 달라졌다. 대학 동아리 때에는 그냥 고만고만한 후배였다. 해솔 증권 부사장으로 활약할 때는 다소 밉상이었다. 그러다 서하나 납치 사건과 관련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박강수를 인간 이하로 취급했다.
같은 여자 입장에서 그런 범죄는 도저히 용서 불가한 것이었으니까.
“강수 때문일까?”
신선영은 고개를 흔들어 갖은 잡념을 떨쳐냈다.
“어쨌든 최근에 LTCM의 동향이…….”
그동안 수집된 다양한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던 그녀는 문득 특이한 낌새를 눈치챘다.
바로 인공지능(AI) 투자였다.
인공지능이 주식 매매에 뛰어든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초기의 단순 자동거래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스스로 알아서 거래를 성립시키는 경우도 많아졌다.
인공지능에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은 2016년 구글이 개발한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전환점이 됐다. 체스에서 컴퓨터가 인간을 이긴 것은 오래전이었지만 바둑은 알파고가 처음이었다.
이후로 인공지능은 각 분야에 다양하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주식 투자에서도 로보스탁이니 스탁봇이니 하는 이름으로 유행했다. 하지만 아직은 걸음마 수준에 불과했다. 단순 매매 로직을 심어둔 것이지 인공지능은 아니었다.
“LTCM에서 구글의 AI 개발 자회사인 딥마인드의 인재 한 사람을 영입했다는 의미가…….”
신선영은 머리를 싸매며 고민했다.
뭔가 느낌이 왔다. LTCM이 인공지능 개발에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시작점이랄까.
물론 금융회사에 인공지능 개발 붐이 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LTCM은 그런 분야를 선도하기에 회사가 너무 작다. 몸집에 걸맞지 않은 큰 옷을 걸친 느낌이랄까.
그래도 이런 움직임을 무시하긴 어려웠다.
유서준의 의도도 그러하고 투자할 돈도 충분했다. 게다가 그녀의 호기심 역시 인공지능 투자 매매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참에 우리도 인공지능 분야 인재를 영입해야겠어.”
그녀가 내린 결론은 인공지능을 이용한 거래 기법 개발 분야에 투자를 늘리는 것이었다. 거창하게 본다면 투자로 볼 수 있지만 단순하게는 명백한 LTCM 따라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