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98
208. LTCM과 SJ의 비상(3)
유서준이 고민에 잠겨있는 동안 김현아는 저 멀리 호수로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유서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과거의 상념에 잠겼다.
이지은의 조언을 듣고 나이아가라로 함께 여행을 떠났으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함께 보낸 시간은 매우 좋았지만 그녀는 원래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자신을 믿고 있는 서하나를 배신할 수 없었고 유서준과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유서준이라도 강하게 끌어주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유서준은 둘 사이 관계를 주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수동적으로 임하는 느낌이었다.
결국 나이아가라 호텔에 투숙을 했지만 애초의 계획과 달리 다른 방을 썼다.
그리고 그날 그녀는 유서준에 대한 욕심을 접었다. 지금까지처럼 그냥 이대로 친구로서, 어떨 때는 친구보다 조금 가깝게 그 거리를 유지해나갈 생각이었다.
“들어갈까?”
유서준이 그녀의 무릎을 베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김현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유서준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가볍게 그녀를 한차례 품에 안았다가 곧바로 떨어졌다.
그는 그녀의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는 앞장서서 건물 입구로 향했다.
김현아는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랐다.
**
10월에 유서준과 서하나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인도네시아는 국토면적이 세계 15위, 인구 4위의 대국으로 G20에 포함된 나라다. 아시아에서는 중국, 인도 다음으로 앞으로의 경제성장이 기대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자원 대국답게 목재, 천연가스 등을 수출하여 먹고 살고 있다.
유서준을 초대한 곳은 인도네시아의 최대기업인 아스트라인터내셔널. 일본 도요타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아 자동차를 조립 생산하고 일본 혼다의 기술을 이전받아 오토바이를 만드는 곳이다. 사실상 그룹 지주회사로 산하 자회사만 200개가 넘는 공룡기업이란 점도 특징이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자카르타의 최고급 호텔에서 아스트라인터내셔널의 최고경영자 프리조노 수기아토를 만났다.
호텔의 소회의장에서 수기아토 회장은 수행원 두 사람만 대동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수기아토 회장은 예순을 넘보는 인물로 말끔한 이미지의 신사였다.
유서준은 수기아토 회장과 친우라는 표시로 악수를 했다.
자리에 마주 앉아 간략한 인사를 나눈 다음 곧바로 회담에 들어갔다.
수기아토 회장의 말을 옆에 앉은 수행원이 한국말로 번역해서 전했다.
“우리는 아스트라인터내셔널의 자동차가 동남아 전역에 수출되기를 원합니다.”
아스트라인터내셔널은 인도네시아 자동차 시장의 절반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차종은 일본 도요타 구식 모델.
유서준이 뜬금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정중히 다시 설명했다.
“저희는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공장 증설을 위한 자본이 부족합니다.”
이미 짐작했던 일이었다. 자동차 관련 기술이 필요했다면 현대자동차 같은 제조기업과 만났을 것이다. 유서준을 만나기를 원했다는 것은 자본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물론 SJ 증권이 아니라 뉴욕의 SJ 투자은행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유서준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며 물었다.
“아스트라가 인도네시아 내수시장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출은 다릅니다. 경쟁이죠. 그 경쟁을 이길 자신이 있습니까?”
사실 인도네시아 자동차 시장은 철저하게 자국인 위주로 설계되어 있다. 수입차의 경우 관세를 거의 두 배나 부담해야 해서 사실상 수입차는 경쟁력이 없다. 이런 온실 같은 환경에서 커온 아스트라가 수출이 가능할 리가 없다.
유서준도 알고 있는 이런 사실을 당사자인 수기아토 회장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수기아토 회장이 열정적으로 반박했다.
“그게 모두 자본이 부족해서입니다. 기본적으로 자동차는 거대 장치산업입니다. 적어도 생산량이 100만대는 넘어서야 제대로 가격 절감 효과가 생기니까요. 동남아 수출을 시작하면 이 분기점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공장을 확장해야 하고요.”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결국 판매 대수를 늘려 규모의 경제를 이룩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장 증설이 필요하지만 돈이 없어 공장을 더 짓지 못하는 것이다. 그 돈을 SJ 투자은행이 감당해달라는 의미다.
개도국은 항상 자본이 부족하다. 구미 선진국은 수백 년간 축적해온 자본이 존재한다. 이 자본으로 전 세계를 대상으로 돈놀이를 하고 있다. 반면 개도국은 그렇지 못하다. 항상 돈이 부족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과거 1960년대와 70년대에는 자본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외국에서 달러를 빌려와서 공장을 지었다. 이것이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전 세계가 한강의 기적이라고 언급하는.
한 가정을 생각해보면 그 처지를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수입도 없고 빚만 남은 상태에서 일어서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은 안다.
실제로 그런 상태에서 일어선 나라는 전 세계에서 손을 꼽을 정도다. 그만큼 힘든 것이고 우리나라는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
수기아토 회장이 지금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이유는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공장 증설을 위한 자본을 저리로 제공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은행에 대출을 신청해본 사람이라면 지금 저 심정을 안다.
유서준은 은행에서 대출받을 일이 없었지만 서하나는 과거 증권사 직원 시절에 아버지 병원비다 뭐다 해서 대출을 받았었다. 그녀는 당시의 가슴 졸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유서준은 상대를 직시하며 문제점을 늘어놓았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만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일본 도요타의 반응입니다. 기술 제공자인 도요타에서 자본을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수기아토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게 가장 간단하다는 것 말입니다. 문제는 도요타가 지금 자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게다가 도요타는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각지에 자동차 조립공장을 갖고 있습니다. 저희가 동남아에 진출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겁니다.”
“기술 이전 기업에서 그리 생각하고 있다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게 도요타의 속내가 약간 다릅니다. 도요타도 소형 자동차 공장을 곳곳에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잘 압니다. 동남아 시장이 점차 통합되는 추세에서 결국 어떤 곳은 없애고 어떤 곳은 키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죠.”
수기아토 회장의 말로는 도요타가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줄 수 없어 머뭇거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스트라가 성장하는 것을 밀어주지는 못하지만 절대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아스트라는 오래전부터 다양한 기술 이전 루트를 개발해왔다. 한국의 자동차 산업과도 일정 부분 연관성을 맺고 있었다. 도요타에 얽매인 부분이 생각보다 크지 않다.
유서준은 아스트라와 도요타의 관계를 이해했다.
“두 번째는 아스트라 자체의 규모로만 봐선 공장 증설에 해당하는 자본을 유치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 자금이 너무 크다는 것이지요.”
공장 주변의 밀림을 밀어내고 새롭게 공단 부지를 닦은 다음 공장을 설정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 이를 순수하게 아스트라의 차입으로 해결하려면 적어도 30년 이상의 장기 대출이 된다.
유서준은 이 부분이 부정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성장하는 나라지만 정치가 그리 안정된 나라는 아니다. 30년은 부담이 크다.
난색을 보이는 유서준에게 수기아토 회장이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반은 저희 아스트라가 아닌 국가 신용으로 하려 합니다. 인도네시아 국채죠. 가능하시겠습니까?”
미국 5대 은행에 속하는 SJ 투자은행이 다루는 대부분 상품은 국채가 많다. 미국 국채부터 시작하여 선진국 국채가 대부분이고 개도국 국채도 적잖게 갖고 있다. 기업의 경우 세계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갈 대형 기업이라면 직접 대출도 해주지만 규모가 작은 기업이나 개도국 기업이라면 특별히 성장성이 높거나 중요 기업이 아니라면 대상 자체가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아스트라인터내셔널은 SJ 투자은행이 대출해줄 그런 급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정부가 보증한 국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국채를 사달라고 사정하면 고려해볼 여지는 있다. 이것이 미국 거대 투자은행의 위엄이다.
당연히 그런 투자은행의 실질적인 대주주인 유서준 역시 그만큼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이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국가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했다. 아니, 딱 한 곳이 있기는 하다. 바로 대한민국 금감원이다.
유서준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애가 단 수기아토 회장이 덧붙였다.
“내일 저희 대통령 각하와 독대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만찬을 겸해서 사실상 국빈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실 겁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유서준은 한 나라의 원수가 아니기에 국빈 대접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다르다. 웬만한 국가의 원수보다 더 대접을 잘 받는다.
돈이 없어 아쉬운 쪽은 유서준이 아니라 그쪽이니까.
개도국 쪽에서도 거대 투자은행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국가의 안정성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갑작스러운 외환위기나 자금 경색을 피해갈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수기아토가 국채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절반은 국채로 차입해서 공단 부지를 개척하는 인프라 투자에 쓸 겁니다. 나머지 절반은 저희 아스트라의 신용으로 차입해서 공장을 지을 거고요.”
유서준은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물론 세부적인 조건은 아직 미확정이다.
그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대답했다. 최종 결정은 대통령 독대 후 국채 성사 여부다.
유서준이 손을 내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기아토 회장이 악수하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저희 쪽에서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수기아토 회장 측에서는 유서준이 아스트라의 목줄은 아닐지라도 미래를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그 정성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
그날 저녁 호텔에서 잠이 들면서 유서준과 서하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아스트라에 자금을 제공해줄 거야?”
“응, 해줄 생각이야.”
“아무래도 개도국은 위험하지 않아?”
서하나가 염려의 눈빛을 보냈다.
“그만큼 이자를 많이 받잖아. 안전한 것만 고르다 보면 이익이 줄어들 수밖에 없어.”
금융 부분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 적용되는 곳이다. 과다한 위험을 피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성장국이라 설사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 하여도 몇 년이 지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을 확률이 높다. 성장이 정체되어있는 나라와는 다르다.
아스트라인터내셔널은 사실상 인도네시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거대기업이라 위기 상황에서 인도네시아 정부가 손을 뗄 그런 처지도 아니다.
“뭔가 생각한 게 있나 보네?”
서하나가 유서준의 팔을 끌어 베개를 만들면서 물었다.
유서준이 미소를 지었다.
“난 아스트라가 수출에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열심히 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가능성은 작아. 그 사실은 수기아토 회장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수기아토 회장이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부를 이용하는 거지. 그냥 돈을 빌려달라면 정부가 거부할 거잖아? 그러니 수출하겠다고 일단 밀어붙이는 거지.”
“그럼 수출이 아니라면?”
“내수용이지. 내수용으로 공장을 증설할 자금이 필요한 거야.”
유서준의 판단은 정확했다.
사실 그가 바라보는 아스트라의 앞날도 비슷했다. 수출보다 내수시장이 훨씬 유망한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국민소득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동시에 자동차 수요가 날로 커지고 있다. 아스트라는 자동차를 더 만들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알고도 빌려주겠다고?”
“응, 내수시장에서 아스트라는 절대 무너지지 않아. 또 인도네시아 내수시장도 무너지지 않아. 그럼 답은 나온 거지.”
서하나는 유서준이 의외로 깊이 생각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