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
2. 미래와 과거(2)
택시를 타고 두 사람은 이동했다.
구인혁은 일단 유서준의 집에 잠시 들러 어떤 물건을 가지고 가기를 주장했다.
물건을 가지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마포의 구석진 곳에 자리한 작은 빌딩이었다. 거리의 가로등에 비쳐 흐릿하게 빛나는 작은 빌딩은 주위의 다른 빌딩과 비교해서 특별한 점은 없었다.
5층으로 생각되는 빌딩의 창은 모두 불이 꺼져 어두웠다. 크리스마스이브인 탓에 회사원들이 일찍 퇴근한 때문일 것이다.
유서준은 입구에서 간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상하게도 입구에는 그 흔한 표식이나 간판 이 하나도 없었다. 약간 기이한 느낌을 받은 그가 구인혁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디야?”
구인혁은 대답을 하지 않고 집에서 가져온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멘 다음 손짓만 했다. 컴컴한 복도를 따라 앞서가는 구인혁을 유서준은 말없이 뒤따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작은 빌딩임에도 지하가 꽤 깊었다. 유서준은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지하 6층을 가리키는 것을 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음 어두운 복도를 걸어 들어간 끝에 구인혁은 창고처럼 생긴 밀폐된 장소로 들어갔다. 유서준은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붙었다.
탁.
불이 켜지자 창고 내부의 광경이 들어왔다. 유서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략 서른 평가량 될까. 온갖 첨단기기가 화려하게 펼쳐진 창고 내부는 먼 미래의 실험실처럼 신세계였다. 언뜻 보기에도 꽤 비쌀 것으로 보이는 장비가 수두룩했다.
그의 눈을 번뜩 뜨이게 하는 기계가 있었다. 중앙에 설치되어있는 탑처럼 생긴 거무튀튀한 기계였다. 기계의 주위로 수십 대의 모니터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중요한 장치처럼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유서준은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물었다.
구인혁이 메고 온 가방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여기? LTCM 한국지사의 숨겨진 연구소.”
처음에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LTCM이 무엇인지 기억이 났다. 같은 분야이니 근무하는 지인을 통해 듣기도 했지만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약 두 주일 전 파생상품 시장에서 유례없이 대박을 맞았다는 외국계 투자회사. 그를 파산으로 이끈 장본인이나 마찬가지인 외국 투기자본이었다.
이곳이 LTCM이라면, 이곳과 구인혁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LTCM이란 말에 경기를 일으키는 유서준을 향해 구인혁이 말했다.
“이상한 것 못 느꼈어? 지난 12월 9일 만기일에 벌어진 사건. 마치 잘 짜인 드라마처럼 국내 금융회사는 모두 초토화되었지. 그 결과는 제 이의 외환위기로 발전했다. 그 결과는 너처럼 자살자가 속출하고…….”
입만 벌리고 있는 유서준에게 구인혁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내가 벌인 일이다.”
구인혁의 말은 쇠망치처럼 그의 머리를 내려치고 있었다.
구인혁의 놀라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구인혁은 대학 입학 무렵 이미 천재라고 불렸다. 그는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의 신봉자였다.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유달리 관심을 가졌다. 우주 탄생 이후 현재까지 진화해온 시공간이 그의 관심사였다.
학계의 부름도 외면한 채 평생 자신의 관심사만을 연구하며 각종 고차원 방정식을 풀던 그는 2년 전인 2025년에 시간과 공간의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고리를 이용해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이 놀라운 발견을 증명해줄 타임머신을 개발하고 싶었다. 자신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타임머신의 개발비는 너무 엄청나 감히 개인이 엄두를 낼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몇몇 기업에 타임머신 개발 의사를 타진했지만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시였다. 심지어 물리학계마저 그의 발견을 믿지 않았다.
그때 그의 앞에 등장한 것이 바로 외국의 투자자본인 LTCM이었다. 금융상품 투자회사로 알려진 LTCM은 구인혁의 이론을 믿었고 그에게 무제한의 지원을 약속했다. 구인혁은 뛸 듯이 기뻤다. 모든 난관이 한 방에 해결됐다.
LTCM의 요구조건은 단 하나였다. 타임머신을 이용하여 작은 메모리칩 하나를 그 때부터 5년 전인 2020년의 과거로 보내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구인혁은 그들의 제안을 수락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연구를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으니까.
무한대에 가까운 지원에 힘입어 불과 일 년 만에 구인혁은 타임머신을 개발했다. 타임머신으로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에너지의 제한 때문에 과거로 보낼 수 있는 질량에는 한계가 존재했다.
그는 LTCM이 요구한 메모리칩을 2020년으로 보냈다. 자신의 연구를 지원해준 그들에 대한 보답이었기에 구인혁은 별달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메모리칩이 과거로 간 이후 세상은 다르게 흘러갔다. 구인혁이 맞이한 2026년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LTCM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 기업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5년 만에, 아니 정확하게는 6년 만에 상전벽해가 일어난 것이다. 5년 전, 미래의 정보를 취득한 LTCM은 5년 동안 국제 금융시장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작은 투자회사였던 이 기업은 세계의 금융을 지배하는 거대한 공룡으로 변했다.
그리고 불과 일 년, 거대 투기자본으로 변신한 LTCM은 세계에서 금융 시스템이 취약한 몇 나라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자비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계략과 술수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몇몇 투기자본과 연합하여 그들은 교묘하게 한 나라의 금융시스템을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여러 나라가 쓰러졌다. 그 나라 가운데 우리 대한민국이 있었다.
“결국 지난 9일 만기일에 일어난 대격변은 LTCM의 계략에 의한 것이다. 다른 투기자본과 함께 몇 달 동안 치밀하게 덫을 꾸민 결과지.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LTCM을 공룡으로 키워 준 나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고. 네 회사가 파산한 것도 바로 나 때문이야. 우리나라가 몰락한 것도 나 때문이라 할 수 있고. 네가 회사를 잘못 운영해서가 아니라 거대 공룡 자본의 간악한 술수에 말려들어 발생한 것이다. 알겠어?”
구인혁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여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다.
유서준은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최근에 일어난 외환위기 과정은 비정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모두를, 아니 이 사회와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가는 그런 시나리오.
“네가 보낸 메모리칩에 뭐가 들어 있었는데?”
“그때로부터 이전 5년간의 모든 정보와 최신 금융기법. 나도 정확히는 알지 못해. 그렇다고 대략 예측만 할 뿐.”
유서준은 내심 수긍했다. 만일 누군가가 미래의 투자기법을 알고 있고 거기에다 미래의 모든 정보마저 알고 있다면 이를 이용해 돈을 버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 현재의 LTCM은 완전한 괴물이다. 그들은 5년 전부터 내가 보낸 메모리를 이용해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고 지금은 전 세계를 주무르는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어. 문제는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무슨 일이든 저지르고 본다는 거야. 그들의 탐욕을 막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아. 자본 면에서 그들에 대항할 세력은 없으니까.”
유서준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어쩌란 말인가. 자신은 이미 파산해서 자살 직전인 상태일 뿐인데.
구인혁이 굳어진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분하지 않나? 한낱 투기자본에 당해서 자살한다는 것이. 아니, 투기자본에 의해 이 나라가 이 모양이 되어버린 것이.”
유서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파악되지 않았다.
구인혁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난 분하다. 내가 꾐에 빠져 이 사회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그들의 꾐에 빠져 이용당했다는 것이 너무 분해. 그래서 다시 바로잡고 싶어.”
“어떻게?”
유서준은 별 기대 없이 물었다.
구인혁이 유서준네 집에서 가져온 가방을 열었다. 안에서 유서준에게 익숙한 물건이 쏟아졌다.
가죽으로 표지가 된 모두 네 권의 다이어리. 바로 그가 대학을 입학하던 40년 전부터 지금까지 쓴 다이어리였다. 그 다이어리에는 그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구인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 모든 것을 바로 잡기 위해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야. 그 핵심이 바로 너의 다이어리야.”
“다이어리는 왜?”
“이것을 지금부터 40년 전의 너에게 보내려고. 이 다이어리를 갖게 된 과거의 너는 분명히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다음에 너는 메모리칩을 얻은 LTCM과 싸우게 되겠지. 계산대로라면 외환위기도 막을 수 있을 테고.”
유서준은 구인혁의 계획을 깨달았다. 그의 다이어리에는 지난 40년간 그가 기록했던 사건들이 남겨져 있었다. 대부분이 주가의 움직임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이용하기에 따라 큰 부를 일굴 수 있을 것이다.
구인혁이 중앙에 자리한 거무튀튀한 기계장치를 가리켰다.
“이게 바로 내가 개발한 타임머신이야.”
그가 네 권의 다이어리를 타임머신 중앙의 원판 위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의 음모를 막고 지금 현재를 바꾸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정보를 과거로 보내야 해.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이거야. 너의 기록을 과거의 너에게 보내는 방법. 다른 방법도 생각해보았지만 이게 최선이었어.”
한 마디로 구인혁의 판단에는 유서준이 최적의 인물이었다는 말이었다.
구인혁이 타임머신에 연결된 자판을 두드렸다. 모니터에 복잡한 그래프가 그려지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멀리서 기계가 작동되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유서준은 안면을 찡그렸다. 머리가 아파 왔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미래가 바뀌나?”
“당연하지. 이미 메모리칩으로도 증명됐으니까.”
유서준은 아무리 생각해도 바뀐 과거와 바뀐 미래의 정확한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타임머신을 만들던 그때의 너에게 만들지 말도록 메시지를 전하는 건 어때?”
“그렇게도 생각해보았어. 그런데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떠오르더라고. 생각해봐. 너도 과거의 너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아?”
순간 유서준은 과거에 자신을 좌절시켰던 크나큰 슬픔과 분노를 떠올렸다. 이제는 아득한 옛일이 되어버렸건만 여전히 가슴을 콕콕 쑤시는 아픔이 전해졌다.
“난 너에게 그 사건을 해결해주고 싶었어. 오래전부터 이 타임머신으로.”
유서준은 격한 감정에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생각났다. 오래전에 구인혁을 붙잡고 펑펑 울면서 타임머신을 만들어달라고 애원했던 기억이.
구인혁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복잡한 감정을 깨트렸다.
“아, 편지를 하나 써. 과거의 너에게 보내는 거. 시간이 없어. 짧게 한 장 정도로. 그래야 과거의 네가 이 다이어리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 아니야?”
유서준은 얼떨떨한 상황에서 간략하게 편지를 한 장 썼다. 무엇을 적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는 생각나는 대로 지금 현재 자신의 상황과 LTCM과 연관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름을 몇 개 적어 넣었다.
구인혁은 편지를 다이어리 책갈피 사이에 집어넣었다.
우우-웅-
타임머신이 작동되자 주위로 불이 반짝거리며 모니터에 어지러운 그래프가 출렁거렸다.
구인혁이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에너지가 충분할지 모르겠네. 이게 워낙 많은 에너지를 필요해서 말이지. 이 기회를 위해 그들 몰래 에너지를 약 반년이나 축적 시켰거든.”
물끄러미 보고 있는 유서준을 향해 구인혁이 씩 웃었다. 아마 꽤 오래전부터 이날을 위해 준비했다는 느낌이 왔다.
“LTCM 그 자식들은 지금 축하 파티 중이야. 그들은 이제 과거나 미래가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이곳도 조만간 폐쇄한다고 연락이 왔어. 그들도 안전해지려면 어쩔 수 없겠지.”
우우우웅-
은은한 기계 소음이 점차 짙어졌다.
구인혁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유서준 역시 구인혁과 기계를 번갈아 살펴보며 변화를 지켜보았다.
구인혁이 주먹을 쥐며 소리쳤다.
“이제 다시 미래가 바뀔 것이다. 유서준 너에 의해.”
구인혁의 목소리가 유서준의 귀에 박혔다.
유서준은 간절히 기도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살로 마감할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달라고. 나아가 그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만들었던 한 사람을 구하고 제 이의 외환위기를 맞아 파산한 대한민국을 도와 달라고.
번쩍!
타임머신 주변에 번개가 내리치듯 갑자기 주위가 확 밝아졌다.
타임머신에 올려두었던 다이어리가 사라졌다. 이제 미래가 바뀔 것이다. 구인혁의 계획대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