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0
20. 블랙먼데이(1)
1987년 8월 중순까지 증시는 7월의 강세장이 계속 이어지는 듯했다. 더운 날씨가 한풀 꺾이기 시작하던 8월 19일, 종합주가지수는 역사적인 500 포인트 등정에 성공했다.
티비 방송을 비롯한 모든 언론에서 주가 상승에 대한 희망적인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상승을 외칠 때 오히려 주가는 하락을 시작하는 법이다.
500을 넘어선 직후부터 주가는 조정을 타기 시작했고 결국 8월은 474.01로 마감했다. 7월 대비 -2.36%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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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9월 1일]9월이 되며 2학기가 시작되었다. 학교 수업과 분위기는 1학기와 그리 차이가 없었다. 다만 1학기에는 시국 관련 투쟁이 많았다면 지금은 대통령 직선제에 그 관심이 쏠려 있었다.
서울대 주식투자연구회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잘 돌아갔다.
수업을 마친 동아리 학생들은 동아리 방에 모여 신문을 펴놓고 잡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흐아, 이게 무슨 호러물이냐?”
일학년 윤리교육학과의 김동식이 신문을 보며 고개만 저었다.
다른 학생도 신문을 짚어가며 열변을 토했다.
“어떻게 저렇게 한 번에 다 죽을 수가 있지?”
책상 위에 펼쳐진 신문 종합면에는 커다란 글씨로 ‘여사장 포함한 32명 집단 시체 발견’이란 제목이 눈에 띄었다.
이른바 오대양 살인사건. 300여 명으로부터 거액의 사채를 빌려 쓰고 잠적한 여사장이 아들과 조카를 포함하여 공장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32명에게 농약을 먹이고 집단 자살을 강요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사장을 교주로 추종하는 사이비종교 사건의 형태를 띠었기에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학생들은 사건 경위를 다룬 기사를 살펴보면서 사이비 종교를 성토하기 바빴다.
유서준 역시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철학과 종교가 무관하다고 할 수 없기에 그의 의견은 주요 여론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수업을 마친 김현아와 박강수가 동아리방으로 들어왔다.
김현아가 유서준에게 반색하며 물었다.
“서준아, 잘 지냈어?”
마치 긴 여름방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처럼 반갑게 그녀가 인사를 했다. 방학 동안에도 세미나가 있을 때면 곧잘 얼굴을 마주쳤던 사이임에도 두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서로를 반갑게 맞았다.
유서준은 그녀의 응대를 접하며 내심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그는 사귀는 사이일까? 친구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사귀는 사이라고 보기엔 모호했다. 첫 만남이 미팅이었으니 사귐을 전제로 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 이후 그 누구도 사귀자고 한 적도 없고 사귄다고 의식한 적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다른 사람에 비해 유달리 자신을 챙겨주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학생들이 제출한 주식 잔고를 토대로 8월까지의 누적 손익 순위가 정해졌다.
1위는 여전히 총무인 신선영. 하락장이었음에도 그녀는 수익이 났다. 두 달 동안 누적수익은 53%. 2위였던 수익률 30% 선배는 손실이 나서 아래로 많이 밀렸다. 3위였던 박강수 역시 8월 한 달 약 -5%의 손실이 나서 30%에 간신히 걸렸다. 하지만 순위는 2위로 올라섰다.
전달 8위였던 유서준은 5%가량의 이익을 얻었다. 지난달 동아리 전체에서 플러스 수익을 낸 사람은 그와 신선영 두 사람이 유일했다. 유서준의 누적 수익률도 30%에 턱걸이했다. 유서준의 등수는 아슬아슬한 3위. 2위인 박강수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심기일전한 김현아는 지난달 손실을 방지하여 선방했다. 누적 수익률은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다른 학생들이 손실로 내려가는 바람에 순위는 올랐다. 그녀는 대략 중간 순위로 올라섰다.
“서준아, 이번 달에도 잘했네? 넌 확실히 주식에 재능이 있나 봐.”
김현아가 그를 칭찬했다.
그는 그녀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대답했다.
“너도 잘했잖아? 하락장에 손실 안 나면 잘한 거야. 등수도 올랐고.”
“그렇지?”
유서준의 칭찬에 그녀가 반색했다. 그녀의 고운 눈매에 웃음이 가득했다.
바로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눈여겨보던 박강수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는 등수가 2위로 올라섰지만, 기분은 영 아니었다. 유서준이 3위로 바짝 따라온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김현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박강수의 적대적인 반응에 짜증이 났다. 그녀는 유서준과 대화를 할 때면 박강수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같은 과라는 명분으로 그녀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 두려는 박강수의 태도가 싫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와 무관하게 유서준의 눈은 신선영의 수익률에 머물러 있었다.
“선영 누나는 정말 대단하네. 어떻게 하락장에서도 수익이 저렇게 날 수 있지?”
“남 말 하네. 너도 마찬가지야. 수익이 났잖아?”
김현아가 웃는 얼굴로 그의 등을 팼다.
유서준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미래에서 온 다이어리를 보고 매매했다고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궁금한 신선영의 매매기법은 이달에도 도깨비 같은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날 밤 그의 다이어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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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8월 31일, 총자산 342만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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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20일]전 국민의 관심이 오랜만에 맞이하는 대통령선거에 쏠렸다. 모두 야당 대표로 출마하는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평민당의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에 관심을 집중했다. 결국은 평화적인 정권 교체와 군부독재 종식을 위해 두 사람이 단일화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지만, 개인적인 욕심에다 지지자를 설득하지 못해 두 사람 모두 출마할 것이란 설도 제기됐다.
다행히 학교는 상대적으로 조용했고 일부 학생은 선거 지원을 위해 뛰었다.
유서준은 정치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다이어리를 본 그는 이미 대통령선거의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흥미 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결과를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최근에 그는 동아리방에 올 때마다 총무 신선영의 공부를 유심히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녀는 주식매매의 기술적 분석을 공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사람의 공부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신선영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다.
가을이 깊어가던 10월 20일 화요일 낮에 마침내 그 기회가 왔다.
중간고사가 마무리되었던 그 날, 시험을 마치고 유서준은 동아리방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이곳은 학교에서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중간고사로 어지러웠던 머릿속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매매에 대해 구상하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총무인 신선영이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그녀는 약간 심각한 모습이었다.
“누나, 무슨 일 있어요?”
유서준이 그녀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물었다.
별다른 말이 없이 고개를 저으며 신선영이 맞은편 탁자에 앉아 노트를 꺼냈다. 곧바로 그녀는 뭔가에 몰입한 표정으로 노트에 메모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에이, 뭔가 고민이 있으신가 보네요.”
유서준이 다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한참을 연필로 끌쩍거리던 그녀는 잘 안 풀리는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시게요?”
유서준이 반색하자 그제야 신선영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궁금하면 따라와 보렴.”
신선영은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유서준은 부리나케 그녀를 뒤따랐다.
그녀가 데려간 곳은 공과대학 전산실이었다. 실내에 소형 PC가 수십 대 놓여있어 공대생의 학습을 돕는 장소다. 대부분 PC는 당시로는 최첨단이라 할 IBM 286 컴퓨터였다. 그중 일부는 학교의 메인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전산실에는 십여 명의 학생이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신선영은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마이크로소프트 도스(DOS) 시스템이 부팅되었다.
문과생인 유서준은 사실상 컴퓨터를 접할 일이 거의 없었다. 전공과도 관련이 없고 컴퓨터 관련 과목을 수강하지도 않았기에 그에게 컴퓨터는 별세계였다. 모든 게 신기했다.
관심을 두고 옆자리에 앉는 그를 향해 신선영이 물었다.
“오늘 주식시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니?”
주식을 매매하는 그로서는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그는 오늘의 시황에 대해 간략히 말해주었다.
“오늘은 많이 내렸어요. 어제 대비 -2.4%가량 내렸죠. 하한가 종목도 50개를 넘어 많았고 전체적으로 장세에 힘이 없었던 하루였어요.”
신선영이 몰라서 물어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대답을 들은 그녀가 말했다.
“잘 아네. 그런데 왜 내렸지?”
유서준은 낮에 방송에서 흘러나왔던 말을 떠올렸다.
“미국과 일본이 많이 내렸다고 하더군요.”
“그래 맞아.”
신선영이 미소를 지으며 컴퓨터 화면에 뭔가를 올렸다.
녹색 화면에 하얀색 줄무늬가 그려졌다. 바로 종합주가지수 그래프였다.
이 장면은 유서준에게 충격이었다. 주가지수가 가끔 신문에서 그래프로 등장하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개인이 컴퓨터로 그리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유서준은 그녀의 재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떻게 그리는 거예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알면 되지. 이것은 베이직이란 언어로 그린 거야. 계산은 파스칼 언어로 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그는 입만 벌렸다. 프로그래밍 언어학습은 비전공인 그에게 요원한 이야기였다.
곧이어 다른 주가 그래프가 떴다. 완만한 상승을 그리던 주가는 맨 마지막에 이르러 갑자기 폭락했다. 신선영이 말했다.
“이건 뉴욕 다우지수 그래프다.”
유서준이 외국의 주가 그래프를 접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런 정보를 구하기는 사실상 하늘의 별따기였다.
신선영이 모니터에 나타난 그래프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보이지? 이게 오늘 새벽에 발생한 거야.”
블랙먼데이. 87년 10월 19일은 뉴욕 증시에서 역사상 길이 남을 처참했던 하루였다. 고공행진을 진행하던 뉴욕 주가는 어젯밤 하루 만에 -22.6%라는 기록적인 폭락세를 기록했다. 이 하락 폭은 1929년 미국을 대공황으로 인도했던 역사적 폭락보다 더 큰 것이었다. 문제는 블랙먼데이가 일어난 원인을 곧바로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미국 뉴욕 증시의 영향으로 오늘 낮 일본 증시는 -14.9%, 홍콩증시는 -45.8% 하락했다. 전 세계 증시가 완전 초토화된 것이다. 반면 오늘 우리나라의 증시는 불과 -2.4%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증시가 외국인에 개방되어 있지 않았고 하한 폭이 최대 -6% 이내로 매우 좁아 그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유서준은 하루 만에 주가가 반 토막 난 외국의 사례에 깜짝 놀랐다. 아직 우리의 경우 상하한을 제한하고 있어 발생 가능성이 없지만, 그 폭이 존재하지 않는 외국의 경우를 참고하면 언젠가는 국내 증시에도 비슷하게 제도가 바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왜요?”
유서준이 궁금한 표정으로 신선영에게 물었다.
신선영이 화면을 이리저리 조작하며 대답했다.
“미국 증시가 폭락한 원인이 궁금하거든. 이게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고 있는 매매법과 관련이 있어서 말이지.”
유서준은 그녀의 대답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신선영의 매매법이 매우 궁금하던 차였다.
그녀가 동아리 주식투자대회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의 관심을 끌게 만드는 다른 중요한 요인도 있었다.
바로 미래에서 온 편지에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훗날 국내 외환위기를 일으킨 LTCM이란 회사 산하에 그녀가 속해있었으니까. 달리 말하면 그녀 역시 외환위기 발생에 한 축을 담당했다는 의미였다.
편지 내용으로 유서준은 두 가지 사실을 유추했다. 하나는 그녀가 먼 훗날 LTCM에 입사할 것이란 사실이었다. 무슨 수를 쓰든 그녀의 입사를 방해해야 했다. 그렇게 하면 외환위기 방지에 조금이나마 도움 되지 않을까. 다른 하나는 그녀의 매매기법이 훗날 외환위기 유발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기법이 무엇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신선영이란 사람이, 또 그녀의 재능과 매매기법이 먼 훗날의 일을 발생시킬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하면 대비를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