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07
217. 드러나는 마수(1)
나산전자의 예전 사장인 노신사는 현재 췌장암 말기라 했다. 병원에서 예상하는 기대수명은 대략 6개월 남짓, 사실상 사망선고가 내려진 상태였다.
나산전자는 만일을 대비해 아들 후계 체제를 서둘러왔다. 기술력이나 영업력 부분에 있어 누수는 전혀 없다. 그 아들 역시 오래전부터 나산전자에서 일을 해왔고 사장을 물려받은 지도 이미 10년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인 소유권 분야는 다르다. 노신사가 가진 주식은 대략 40%. 그 아들인 현재 사장이 가진 주식은 5%가 채 되지 않았다.
노신사가 죽고 나면 곧바로 상속세를 물어야 하고 현재 과표로 따지면 사실상 50%다.
즉 아들이 최종적으로 가지는 주식 비율은 25% 남짓으로 사실상 기업의 지배력을 상실한다. 중소기업 상속 지원 등 각종 세제 혜택이 있지만 사실상 허울 좋은 제도에 불과했다. 실제로 큰 도움이 될 내용은 아니었다.
이를 눈치챈 대기업 한 곳에서 슬금슬금 주식을 사 모으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현재의 나산전자는 통신 네트워크 장비인 라우터를 생산하여 전 세계 통신 장비를 석권하고 있는 에릭슨이나 화웨이에 납품하고 있다.
“아마도 제가 죽고 나면 회사가 공중분해 될 것 같습니다.”
노신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중소기업의 지배구조가 약해지면서 대기업이나 기업사냥꾼의 먹이가 되면 기술만 빼낸 다음 오래지 않아 망하는 길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 노신사가 염려하는 바도 그런 것이다. 평생 몸을 바쳐 일구어놓은 회사가 공중분해 되는 것을 뻔히 보면서 눈을 감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세금을 내지 않을 수도 없으니까요.”
현금으로 상속세를 내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이고 주식으로 세금을 내야 하는데 결국 그 주식은 정부에서 공매하는 방향으로 흐를 것이다. 현재의 지분구조로 보아 회사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이다.
아들인 현 나산전자 사장이 분통을 터트리며 말했다.
유서준은 그들의 안타까움을 이해했다.
이들은 세금을 내는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회사가 거덜 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나산전자처럼 유망한 중견기업이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누가 인수하든 회사가 제대로 운영되기 어려울 겁니다. 제가 수십 년 동안 거의 절반을 회사에서 밤새웠습니다. 새로운 인수자가 그런 애정을 가질 리가 없어요.”
노신사가 한숨을 내쉬며 심정을 토로했다.
유서준은 노신사의 얼굴에서 몇십 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 언젠가 그도 비슷한 고민에 처할 것이다.
현재까지 유세라는 회사 경영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딸에게 회사를 물려줄 방법은 쉽지 않았다. 일반 대기업 제조업체처럼 내부자 거래를 통해 비상장 회사를 지주회사로 키워 편법 증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그것은 나중 문제고 지금 당면한 나산전자의 문제를 풀어야 했다.
“주변에 우호지분을 마련할 방법은 없습니까?”
노신사가 고개를 저었다.
“워낙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변변찮게 아는 이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온 겁니다.”
나산전자 사장이 말했다.
유서준이 시선을 나산전자 사장에게 돌렸다.
“저희 SJ 그룹에 원하시는 게 있나 보네요.”
두 사람이 머뭇거렸다. 차마 말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말해보세요.”
나산전자 사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식을 처분해 상속세를 내면 회사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세금을 안 낼 수는 없고요. SJ에서 저희 주식을 일부 인수해 주실 수는 없을까요?”
예상했던 요구였다.
유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질문했다.
“얼마 동안 인수해서 맡아야 할까요?”
“자사주로 다시 회수한다고 볼 때 대략 5년입니다.”
“증시 상장할 생각은 없나요?”
“상장은 글쎄요. 지금 경영권 문제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이 안 돌아가네요.”
“알겠습니다.”
나산전자의 계획은 상속세에 해당하는 금액 만큼 SJ 증권에서 주식을 인수해서 5년간 보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비용은 이자로 낼 수도 있고 또는 5년 뒤 주식 차액으로 낼 수도 있다. 그것은 협상의 문제다.
투자은행업을 하는 SJ 증권 입장에서 그리 문제가 될 부분은 없었다.
유서준 역시 회사에 이처럼 애착을 가진 경영자라면 충분히 도와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저희는 말씀하신 대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기술을 빼앗기지 않는 방법이니까요.”
나산전자 사장과 노신사는 유서준의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다.
이런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보람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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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 증권의 백나희 부사장은 강남의 고급 룸인 엠퍼러에서 오도욱과 독대하고 있었다.
오늘 안건은 연기금 투자 확대. 오도욱이 중소형 증권사에 연기금 운용을 대거 일임하기로 하면서 증권사 간 로비 전쟁에 불이 붙었다. 과거에는 대형 증권사 위주로 배분했던 것을 중소형 증권사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오도욱은 이 조치를 대기업 특혜를 회수하고 중소기업과 상생하는 것으로 미화시켰다.
연기금을 대형 증권사 위주로 배분했던 이유는 안정성 때문인데 이것이 중소기업 지원이라는 명분 때문에 허물어진 것이다.
물론 문제가 있는 조치임을 알면서도 아무도 오도욱에게 반대하지 못했다. 그에게 밉보여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오도욱이 이런 방법을 쓰게 된 이유는 대형 증권사보다 중소형 증권사가 다루기 편하기 때문이었다. 연기금은 국내 증시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나아가 연기금 지분을 이용해 상장 회사를 좌우할 수 있다. 사실상 재벌을 비롯한 그 누구도 함부로 반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력이다.
백나희가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오도욱에게 속삭였다.
“원장님, 그럼 저희에게도 충분히 연기금을 배분해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오도욱이 웃음을 머금었다.
“그럼 이번에 제일 많이 받는 곳이 해솔 증권이고 두 번째가 저희인 거죠?”
백나희가 다시 확인 사살했다.
오도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BH가 우호적이면 말이지요.”
그의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빛은 냉혹했다.
백나희는 그의 눈빛에 살짝 움츠러들면서도 고개를 숙였다.
“호호, 역시 원장님밖에 없어요.”
가끔 이곳에 불려와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때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보상은 달콤했다. 덕분에 BH 증권은 타 증권사에 비해 크게 성장하는 중이었다.
회사 내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도 대단히 좋았다. 계약된 연봉과 성과급 역시 나날이 올라갔다. 그 누구도 금감원에 큰 영향을 미치는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자, 드세요. 원장님.”
백나희가 테이블 위의 컵에 얼음을 넣고 양주를 손수 따랐다.
술잔을 받은 오도욱이 반대로 그녀에게 술을 권했다.
“백 부사장님도 받으시지요.”
백나희가 일어서서 몸을 기울여 술잔을 받았다.
오도욱의 눈이 빠르게 그녀의 몸을 훑었다.
오늘 백나희는 화려한 꽃무늬의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목이 깊게 파여 목둘레와 가슴팍 위가 일부 드러나는 과감한 옷차림이었다. 치마 길이도 꽤 짧았다. 무릎 위로 많이 올라가는 이런 치마는 부사장이란 직함을 가진 그녀가 입지 않을 그런 옷이었다.
더운 여름이라 스타킹도 신지 않은 맨다리였다. 오늘 오도욱을 접대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입었을 것이다.
술잔을 비우는 백나희를 보는 오도욱의 눈빛에 열기가 일었다.
“오늘은?”
오도욱이 슬쩍 눈길을 그녀의 치마로 향했다.
백나희가 얼굴을 붉히면서 치마를 살짝 올려 보였다. 연한 붉은색의 삼각팬티가 살짝 보였다.
“제대로 입었군.”
오도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백나희가 다시 양주를 따르고 있을 때 룸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왔다.
박강수였다.
오도욱이 반갑게 맞으며 인사를 시켰다.
“백 부사장, 인사하지. 해솔 증권의 실질적인 후계자라네.”
박강수가 손을 내밀며 먼저 인사했다.
“현재 LTCM 아시아지부장인 박강수입니다.”
백나희가 상대를 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박강수가 이 자리에 왜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BH 증권 부사장인 백나희예요.”
두 사람은 지금까지 만난 적이 없었다. 박강수가 활약했던 2000년대 초반에 백나희는 임원을 달지 못했다. 자연히 만날 기회가 없었다. 백나희가 임원이 되어 BH 증권의 얼굴마담이 된 것은 201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특히 최근에 박강수는 미국에 거주하며 국내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말이 아시아 지부장이지 LTCM은 아직 아시아 쪽에 그리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박강수의 최근 근황을 증권업계에서는 잘 알지 못했다.
백나희는 박강수란 이름과 해솔 그룹의 이력을 떠올렸다. 해솔 증권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해솔 증권을 사실상 부도냈던 인물이란 기억이 났다. 그녀는 가소로운 표정으로 박강수를 바라봤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실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보니 멀쩡한 증권사를 거덜 내는 무능력자란 생각이 들었다. 사원으로 입사해서 능력 하나로 부사장 자리에 올라선 자신과 얼마나 비교가 되는가.
“아, 예전 해솔 증권 부사장님이셨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백나희가 미소를 떠올리며 손을 내밀었다.
박강수가 거드름을 피우며 악수를 받았다.
오도욱이 추가해서 소개했다.
“현 증권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야. 가장 인기 있는 부사장이지.”
오도욱의 소개에 백나희가 우쭐했다.
박강수가 그녀를 찬찬히 훑어보며 오도욱을 향해 물었다.
“서하나 사장은 아니고요?”
“그년은 빼고.”
오도욱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백나희도 살짝 기분이 상했다. 항상 이 동네에서는 서하나와 비교됐다. 백나희는 자신이 더 어린데도 불구하고 미모에서 뒤진다는 평가에 굴욕을 느껴왔다.
박강수는 BH 증권의 실질적 주주도 아니고 키워진 부사장을 인정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무시하고 오도욱과 대화를 시작했다.
반면 백나희 역시 박강수를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박강수는 재벌 가문 말썽꾸러기 2세 정도로 보였다.
“이번 연기금 운용계획을 보면 해솔 증권에 가장 많이 배정됐다.”
오도욱이 말했다.
박강수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 형님 감사합니다. 그보다 이번에 LTCM에서 한국에 제대로 들어오거든요. 그거나 빨리 허가해 주세요.”
“당연히 해줘야지. 얼른 들어와서 SJ 증권 좀 혼내줘. 하하.”
두 사람만의 대화가 길어졌다.
백나희는 자신의 존재감이 무시된 것 같아 감정이 상했다. 이번 연기금도 해솔 증권에 가장 많이 배정된 것을 보니 두 사람 사이가 보통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감히 둘의 대화에 끼어들 생각은 못 했다. 오도욱이 두려웠다.
“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나 마시자고.”
오도욱이 박강수에게 술을 건넸다.
백나희가 할 일은 양쪽에 술을 따르는 게 전부였다. 업소녀도 아니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신세계였다.
박강수는 주로 미국 LTCM의 첨단 거래 기법과 남미 공략을 이야기했다. 국내에서만 갇혀 있다시피 한 백나희와는 차원이 달랐다.
평소라면 박강수가 새롭게 보였을 법하건만 이미 무능력한 재벌 2세로 낙인찍어버린 그녀로서는 더욱 밉게만 보였다.
술을 따라주며 자신도 홀짝거리며 마시다 보니 슬슬 술에 취하기 시작했다.
“재밌는 걸 보여줄까?”
오도욱이 백나희를 흘낏 보고는 박강수에게 말했다.
백나희는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어 가슴이 철렁했다.
“뭔데요?”
박강수가 호기심에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오도욱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백 부사장, 테이블에 올라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에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