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14
224. 인도네시아(3)
신선영은 뉴욕에서 LTCM의 톰 메리웨더와 긴급회동을 가졌다.
유서준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면서 본격적으로 LTCM에 반기를 든 탓이었다.
장소는 SJ 투자은행 본사 회의실.
톰 메리웨더와 송예은이 함께 왔다.
메리웨더는 평소처럼 넥타이에 격식을 갖춘 정장 차림이었다. 송예은 역시 그 짧던 치마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단정한 정장 차림새였다.
신선영은 비서실 실무자 한 사람을 대동하고 회의를 시작했다.
“여기 SJ에는 처음이시죠?”
신선영이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었다.
메리웨더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반면 송예은은 이곳이 고향에 돌아온 느낌일 것이다.
“처음입니다. 저희와는 사내 분위기가 다르군요.”
어느 곳이나 그 회사만의 분위기가 있는 법이다.
신선영의 시선이 송예은에게 옮겨갔다.
“예은이도 잘 지냈어?”
송예은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신선영은 송예은이 많이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적어도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유서준 앞에서 방방 뛰던 철부지 소녀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차가워지고 신중해진 느낌이랄까. 하지만 절대 좋은 방향으로 분위기가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뭘 드시겠습니까?”
신선영 옆에 있던 실무자가 음료를 권했다.
잠시 후 주스와 커피가 나왔다.
메리웨더가 커피를 입술에 바르며 맛을 보았다. 나름 맛이 괜찮았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든 회장이랑 대화하려 했지만 이런 문제는 신 사장님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고든이 SJ 투자은행의 회장 자리에 오른 후 거의 이십 년이 지났다. 특유의 무난한 성격 때문에 잡음 없이 지금도 회장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나이도 들어 단지 얼굴마담 역할만 할 뿐 실질적인 업무는 신선영이 사실상 맡아서 했다.
“그럼 시작해보죠.”
신선영이 안면을 굳히며 상대를 주시했다.
메리웨더가 차분한 목소리로 주제를 꺼냈다. 특유의 귀티 나는 억양과 매너였다.
“알다시피 LTCM에서는 동남아의 환율 시스템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유 대표랑 통화한 적도 있습니다만 서로 간의 영역을 정하고 싶습니다. 큰 힘을 가진 공룡 두 마리가 서로 싸우면 좋을 일이 없으니까요.”
“그 말은 동남아를 양보하라는 의미입니까?”
“이미 저희 LTCM이 먼저 뛰어들었으니까요.”
신선영은 기분이 상했다.
서구 백인 특유의 자신감이 엿보였다. 메리웨더에게서 약한 자가 있으면 짓밟고야 마는 과거 제국주의의 속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약한 자는 약한 자대로 그냥 두면 안 될까? 꼭 거기에서 이득을 취해야 할까.
한때 이득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던 권대만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권대만 역시 지금 LTCM에 몸을 담고 있다.
“SJ 투자은행은 인도네시아에서 이득을 보기 위해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신선영의 반박에 메리웨더가 잔잔한 웃음을 머금었다.
“과연 그럴까요? 저희가 단기적인 이득을 노리는 반면 SJ는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같은 거랍니다.”
따지고 본다면 그런 논리가 성립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LTCM은 일방적인 공격이지만 SJ는 상생을 추구하고 있다.
신선영은 더 주장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메리웨더가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고는 재차 말했다.
“SJ가 인도네시아에 먼저 들어갔다고 하고 싶은 거겠죠? 그 부분은 신경을 꺼도 됩니다. 어차피 장기적인 것일 테고 이번의 외환위기가 지나고 나면 언젠가 다시 회복될 테니까요. SJ에게 잠시의 손실은 있을지언정 결국은 얻을 만큼 얻을 겁니다.”
그는 경고의 목소리를 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지금 현재 저희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루피아화를 폭락시키기 위해 어떤 작업을 거쳤는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많은 자금이 투입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상태로 물러설 수 없습니다. SJ에서 방해하면 결국 피를 흘리게 됩니다.”
신선영은 그의 말을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두 투자은행의 자금이 서로 부딪치면 필연적으로 한쪽은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막판에는 자금이 더 많은 쪽이 이긴다. 과연 SJ가 LTCM을 누를 수 있을까.
신선영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메리웨더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SJ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물러서라는 경고였다.
신선영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꼭 그렇게 개도국을 물어뜯어야 하나요?”
“하하, 이것을 꼭 나쁘게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죠? 동남아는 이번 위기가 지나간 이후 더 경제 체력이 튼튼해질 겁니다.”
외환위기를 겪어본 나라의 국민이라서 그럴까. 신선영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 수많은 사람의 실업 고통과 좌절을 떠올렸다. 최악의 경우 국가가 다시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몇 년마다 주기적으로 위기를 반복할 수도 있다.
“유 대표와 상의는 해보겠지만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는 강자의 횡포를 그냥 내버려 둘 만큼 자비롭지 못하거든요.”
“횡포가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강자의 권리죠.”
메리웨더가 곧바로 정정했다.
대화는 평행선을 그었다.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몇 차례 더 말다툼이 있었지만 서로 간의 태도 변화는 없었다.
회담을 마무리하며 메리웨더가 대화 주제를 돌렸다.
“신 사장님, 현재의 자리에 만족하십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신선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제가 올라갈 자리가 어디 있다고…….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죠?”
“예전 LTCM에서 신 사장님의 상위 파트너로 있었던 로렌스 힐리브랜드의 평가에 따르면 신 사장님은 새로운 매매 로직을 개발하고 응용하는 일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신선영은 옛날 생각이 나서 미소를 머금었다.
과거엔 분명히 그랬다. 순수하게 상품 개발과 거래 로직만 고민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투자회사를 경영하느라 정신이 없다. 회사의 자금 흐름을 점검하고 부하 직원을 독려하는 일이 전부다. 매일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개인적인 관심사인 새로운 시스템 매매 로직 개발은 사실상 물 건너 가버렸다.
“그건 옛날 일이죠. 어차피 지금은 여건이 안 되니 포기해야죠.”
메리웨더가 손을 내저었다.
“신 사장님처럼 유능한 분이 단순히 경영에 매달리는 것은 금융 공학 측면에서도 낭비라 생각합니다. 어떠십니까? 저희 LTCM으로 오시면 순수히 금융 기술을 연구하실 수 있도록 밀어드리겠습니다. 당연히 대우도 권한도 지금 이상으로 해드립니다. 지금처럼 골치 아픈 경영에 매달리는 것보다 더 좋지 않습니까?”
메리웨더의 말은 다소 무례한 제안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신선영은 눈이 번쩍 뜨였다. 아련하게 어릴 적 꿈꾸었던 자신의 꿈이 떠올랐다.
블랙먼데이가 터졌을 때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갖가지 가설을 세우던 시간. 무위험 차익거래를 개발하기 위해 고민했던 유학 시절. 새로운 기법을 배우고 익히며 시장에서 테스트하던 LTCM 입사 초기. 그런데 이곳 뉴욕 SJ에 자리 잡은 이후 그런 시간은 사라졌다. 동시에 꿈도 사라졌다.
“이젠 늦었어요.”
그녀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메리웨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송예은에게 돌아가자는 의사를 내비친 다음 인사를 했다.
“아마 SJ에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신 사장님을 대체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신 사장님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하하, 말씀만 들어도 고맙습니다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선영은 두 사람을 배웅했다.
그녀는 송예은의 뒷모습을 보며 의문을 느꼈다. 송예은은 왜 LTCM에 들어갔을까. 현재 LTCM에서 하는 일은 SJ에서 하던 일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연봉을 더 받는 것 같지도 않고. 이상한 일이었다.
**
이틀이 지난 뒤 인도네시아 환율 시장에서 LTCM의 공세가 재개됐다.
곧바로 루피아화는 전날 상승분을 반납하고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이른바 유서준의 방문으로 인한 투자심리 회복 끗발이 다했다는 이야기. 실제 자금이 투자되지 않은 립서비스의 한계를 명확히 보였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인도네시아 산업 단지를 시찰했다. 이 또한 외부로 보여주기 위한 일정이었다. 두 사람이 가는 곳에는 수기아토 회장을 비롯하여 정부 관계자가 따라다녔다.
유서준은 수시로 기자에게 SJ 투자은행이 투자 의사가 있음을 알렸다.
외환시장의 눈치 보기가 극심해졌다. 매시간 루피아화의 환율이 출렁였다. 필리핀을 비롯한 다른 동남아 국가도 인도네시아 환율을 눈치 보며 오르내렸다.
LTCM의 공세가 실시간으로 증가했다. 루피아화 가치가 밀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날 다시 떨어진 루피아화는 며칠 만에 위기 초기 대비 -45%가 하락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인도네시아 국민은 외국 수입품을 45%나 더 비싼 가격에 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직 끝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자국 화폐인 루피아화가 망가져야 끝날지 알 수 없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국민도 외환위기가 도래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유서준은 홍콩에 있는 강재민을 불러들였다.
강재민의 현재 직함은 SJ 투자은행 홍콩지점장이었다. 한국의 SJ 증권 소속이 아닌 미국 SJ 투자은행 소속이다. 사실상 아시아를 총괄하는 직위에 올라있었다.
유서준과 강재민은 인도네시아에 실제 투자 가능한 방안을 강구했다. LTCM의 공세로 보아 단순 립서비스로는 해결 불가능함을 느낀 탓이다.
두 사람은 밤늦게까지 호텔 방에서 머리를 짜냈다.
“가장 좋은 것은 한국의 현대자동차가 아스트라인터내셔널에 합작 신청을 하는 겁니다.”
강재민이 최선의 방안을 짜냈다.
유서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어. 아스트라는 일본 도요타 것이라서 불가능이야.”
“하여간 일본이 문제군요.”
“일본 정부가 통화 스와프만 체결해주어도 한 방에 해결될 건데.”
“우리나라 정부는 어렵죠?”
“여긴 일본과 유대관계가 깊어서 우리 정부가 끼어들기 어려워.”
이래저래 걸리는 점이 많았다.
머리를 짜내다 포기한 강재민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냥 외환시장에서 LTCM이랑 한판 붙읍시다.”
“그건 정말 혈전이야. 단순하게 싸워서는 준비한 그들을 이길 수 없어.”
“돈으로 밀어붙이죠.”
“야, LTCM도 돈 많아. 우리만 많은 게 아니야.”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렸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서하나와 임소현이 웃음을 지었다.
한나라의 흥망을 가르는 심각한 회의가 겉보기에 장난스러운 회의처럼 보인 탓이다.
서하나가 임소현을 다독였다.
“홍콩 생활 힘들지 않아?”
“이젠 익숙해졌어요. 애들도 홍콩 외국인 학교를 다니는데 잘 적응해요.”
서하나는 임소현과 신선영에게 항상 고마움을 표시했다. 외국 생활이란 게 길어지면 여러모로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 먼 훗날 노년에는 함께 모여 살자.”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과연 그날이 올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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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은 JP 모건의 뜬금없는 보고서와 함께 시작됐다.
*
인도네시아는 사실상 모라토리엄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환율 추세로 보아 추가적인 절하는 당연한 것으로 보이며 일부 산업의 붕괴는 필연적이다.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투자에 주의 경보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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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호텔 전화기에 불이 났다.
수기아토 회장을 비롯하여 정부 관계자의 우려하는 읍소가 이어졌다.
유서준 역시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상 인도네시아 관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국제 투기자본인 LTCM의 공격에 대항할 수단을 가지지 못한 탓이다.
루피아화 가치는 이전대비 -60%나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