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2
22. 대통령 선거(1)
[1987년 11월 29일]일요일이었던 11월 29일 낮 여의도에는 기록적인 백만 인파가 몰렸다. 바로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유세를 보기 위해서였다. 김대중 후보는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를 향해 전국 10대 도시를 순회하며 국민의 심판을 받아 야권후보를 단일화하자는 야심 찬 제안을 내놓았다.
온 국민의 시선이 여의도 유세에 쏠려 있던 그 시점 전국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발했다. 바로 KAL기 폭파사고였다.
29일 새벽 이라크 바그다드를 떠나 서울로 오던 보잉 707 대한항공 여객기가 태국 상공에서 추락했다. 하루 뒤 사고기 잔해가 발견됨으로써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사망자는 모두 115명, 주요 인물로는 이라크 총영사와 대우 사장이 탑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사망자 대부분은 중동에 파견되었다가 귀환하던 근로자였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기체결함과 시한폭탄에 의한 사고 양쪽으로 원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며칠 후, 유서준은 기숙사 휴게실에 모여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있었다. 다를 때 같으면 대통령선거가 주요 뉴스였겠지만 최근에는 달랐다. 태국 상공에서 추락한 비행기 사고가 주된 뉴스로 부상했다. 조사 결과 KAL기 추락은 북한 공작원인 김현희의 소행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범인인 김현희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인으로 밝혀졌다.
티비를 보던 학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모두 폭파사고로 숨진 근로자를 애도했지만, 그 시각차는 컸다.
사회대생이라는 한 학생은 뭔가 수상쩍다는 주장을 했다.
“대통령선거가 한창인 이 시점에, 그것도 야당 후보가 위세를 떨치는 상황에서 뜬금없는 북한의 소행이라는 것은 분명히 정부 여당의 책략이라고 봐. 갑자기 저렇게 큰 사건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
“선거 판세를 보면 여당인 노태우가 밀리는 것이 확실해. 궁지에 몰리니까 저런 사고를 터트리는 거야.”
“야, 그게 말이 되냐? 여당 후보가 어떻게 북한과 작당을 해? 야당이라면 몰라도.”
“선거에 찬물을 끼얹어서 득 보는 자가 누구냐가 중요하지.”
휴게실 내는 학생들의 이런저런 대화로 시끌벅적했다. 북풍이라느니 선거조작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유서준은 한쪽 구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마음이 착잡했다.
일반적으로 대도시, 젊은 사람일수록 정치에서 야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대학생일수록 군부독재의 불합리함을 반대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백 명이 넘는 사람이 죽은 비행기 사고를, 그것도 중동에서 외화를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파견된 근로자가 죽은 사고를 저런 시각으로 본다는 것이 슬펐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선거 때문에 국민의 편이 갈리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의 대화는 곧바로 대통령선거로 넘어갔다. 기숙사에는 서울을 제외한 다양한 지역에서 올라온 학생이 대부분이다. 선거가 지역대결로 흐르다 보니 각자 출신 지역의 후보를 응원하는 자가 대다수였다. 대구 지역은 여당인 민정당 노태우 후보, 부산은 민주당 김영삼 후보, 광주는 평민당 김대중 후보, 대전은 공화당 김종필 후보.
야당 지지자인 학생도 지역색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의 단일화를 지지하는 학생은 지역에 따라 편이 갈려 상대방 후보를 사퇴시키기 위한 비난을 퍼부었다.
강원도 출신인 유서준의 경우 어느 후보와도 접점이 없었기에 그나마 객관적인 시각으로 후보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대화에 착잡함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룸메이트인 구인혁이었다.
“뭐해?”
“그냥…….”
유서준은 뚜렷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주위를 둘러보던 구인혁이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미소를 지었다.
“넌 고향이 강원도라 지지할 후보가 없겠구나.”
“같은 고향이라고 밀어주면 되냐? 사람 됨됨이와 정책을 봐야지.”
유서준은 말을 하면서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실에서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는 우리나라 사람의 성향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구인혁 역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짓으로 유서준의 귀를 다가오게 한 다음 나직하게 속삭였다.
“흐흐, 내일 뭐 할 거니?”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유서준은 특별하게 약속된 일이 없었다.
“글쎄다.”
“그럼 나랑 내일 여의도에 같이 가자.”
“여의도에는 왜?”
“유세 구경 가야지. 유세! 유세 몰라?”
유서준은 내일 여의도에서 민주당 김영삼 후보의 유세가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구인혁의 고향이 부산이었음을 기억했다. 그래도 이 자식이 유세 판 돌아다닐 놈은 아닌데?
“너도 고향 따라가는구나.”
구인혁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있겠냐? 난 정치에 관심 없다. 물리학이랑 정치는 극과 극이야.”
그다운 반응이었다. 그동안 구인혁은 학교 내에서 벌어지는 시국 문제에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시위에 참여한 바도 없었고.
“그런데 왜?”
“일단 대학 시절 중 경험할 수 있는 대통령선거는 이번뿐이잖아? 거기에다 지난번 미팅 때 만났던 이지은이란 애 있지? 지은이 고향이 나와 같은 부산이야. 지은이가 열렬한 김영삼 추종자라…….”
역시나, 어쩐지.
유서준은 무슨 말인지 금방 눈치챘다. 유서준이 미팅 때 만났던 김현아와 동아리를 통해 만남을 계속하는 것과 달리 구인혁은 그때 만났던 이지은과 비교적 가깝게 사귀고 있었다. 아마 이지은이 유세에 함께 갈 것을 주장한 모양이었다.
“겸사, 겸사다. 유세도 구경하고 데이트도 하고.”
“그럴까?”
유서준의 생각에도 나쁘지 않았다. 선거 유세를 구경하는 것도 장차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니까.
“네가 같이 간다면 나도 지은이보고 그 여학생을 데려오라고 할게.”
그 여학생이란 김현아를 의미했다. 유서준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
[1987년 12월 5일]토요일 낮 여의도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비교적 추운 날씨임에도 김영삼 후보를 보기 위해 모여든 관중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유서준은 구인혁, 김현아, 이지은과 함께 여의도 광장의 한쪽 귀퉁이에서 유세를 구경했다. 온갖 구호와 피켓, 플래카드가 난무했다. 백만 관중이 모여 환호하는 그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지난주에는 김대중 후보가 백만을 동원하더니 이번 주는 김영삼 후보가 백만을 달성하네. 다음 주면 노태우 후보가 백만을 모으려나?”
김현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지은이 곧바로 반박했다.
“말이 되니? 인기 없는 여당 후보가 어떻게 백만을 모아?”
“여당은 돈이 많잖아?”
김현아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유서준은 그들의 말을 듣고 다이어리의 내용을 떠올렸다. 사실 대통령선거는 워낙 충격적이고 특이한 경험이었기에 다이어리 곳곳에 그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관중 동원 역시 결과가 다이어리에 나타나 있었다.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에 이어 노태우 후보 역시 백만 관중을 달성했음을. 적어도 당시 신문에서는 그렇게 보도되었다. 이것은 잠재적인 여당 지지표 역시 상당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만 보이고 또 겉으로 드러난 강성 지지자만 보이지만 선거는 그런 사람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 무렵에는 유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에게 점심값을 빙자한 일당을 지급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어떤 학생은 돈을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로 각 후보 진영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렇다 보니 선거는 난장판이 되고 점점 혼탁해졌다.
“네가 지지하는 김종필 후보는 어려울걸?”
이지은이 김현아의 고향이 대전임을 빗대어 놀렸다.
김현아가 손을 내저었다.
“난 김종필 지지 안 해. 고향이라고 무턱대고 지지할 수는 없지.”
“거짓말, 관심 많던데?”
티격태격하는 두 여인의 말싸움을 보며 유서준은 실소를 머금었다.
구인혁 역시 흥미로운 눈초리로 지켜보다가 끼어들었다.
“자자, 예쁜 아가씨들, 그러지 말고 내기할까? 누가 당선되는지.”
모두가 좋다고 손뼉 치며 동참했다.
구인혁이 보다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내기에는 뭔가 걸어야 제맛이야! 뭘 걸지?”
모두가 생각해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김현아가 동아리 주식투자대회를 떠올리고는 모두에게 제안했다.
“이긴 사람이 시키는 거 하나씩 들어주기로 하자.”
“콜!”
구인혁이 신이 나 외쳤다.
김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인혁이는 뭔가 시키고 싶은 게 있나 보지? 뭐야?”
구인혁이 이지은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히히, 키스!”
“너 죽을래?”
이지은이 구인혁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주먹으로 가슴을 때렸다.
유서준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보니 그들에게 미안했다. 이미 다이어리를 통해 선거 결과를 알고 있는 그로서는 공정한 게임이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사실을 말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이지은이 먼저 손을 들었다.
“난 김영삼!”
부산에다 야당 성향이 강한 문과 아가씨답게 재빨리 선택했다.
‘그 사람은 지금부터 5년 뒤에나 대통령이 된단다.’
유서준은 내심 고소를 머금었다.
“아, 나도 김영삼 택하려고 했는데.”
구인혁이 투덜거렸다. 그도 부산 사람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만큼 이때는 고향 사람을 밀어주는 경향이 강했다.
“같은 사람 선택해도 돼. 모두 다른 사람일 필요는 없잖아.”
유서준의 말에 모두가 수긍했다. 이긴 사람이 꼭 한 사람일 필요도 없고 승자가 반드시 나와야 하는 게임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키스를 못 하잖아?”
구인혁이 투덜댔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선택을 마쳤다.
“그럼 나도 김영삼이다.”
구인혁이 말하고는 같은 편이라고 이지은과 손바닥을 부딪쳤다.
김현아는 의외로 한참을 고민했다.
“난 김대중을 고를래.”
“김종필 아니고?”
이지은의 반문에 김현아가 손을 내저었다.
“가장 될 확률이 높은 사람을 찍어야 내기에서 이기잖아? 요즘 군중 동원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김대중이다.”
확실히 김현아는 이성적이고 차분한 경향이 있었다. 자기가 밀고 싶은 후보가 아니라 이길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 게임임을 인지하고 있어 보였다. 즉 감성적으로 선택할 게 아니라 이성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그 사람은 지금부터 10년 뒤에야 대통령이 된단다.’
유서준은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마지막으로 유서준에게 시선이 모였다.
그는 당연히 다이어리에 나와 있는 결과를 선택했다. 그래야 이기니까.
“나는 노태우다.”
“응? 너 여당파였어?”
이지은이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난 여당도 야당도 아냐. 다만 가장 당선 확률이 높은 자를 생각했어. 내가 좋아하는 후보가 아니라.”
“피, 현아랑 같은 논리네.”
이지은이 입을 삐죽거렸다.
구인혁이 그를 놀렸다.
“지금 여기 모인 인파를 봐라. 이런 것을 구름 같은 관중이라 표현하는 거야. 김영삼이 되는 게 확실하다.”
정말 사람들은 많았다. 김영삼 후보의 힘 있는 한마디가 흘러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는 군부 독재종식을 부르짖었고 나아가 자신에게로 야권이 단일화하기를 요구했다. 지지자의 광적인 함성이 광장을 뒤덮었다.
유서준은 내심 빙그레 웃었다. 이 내기의 승자는 두말할 필요 없이 자신이었다. 노태우 후보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미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내기에서 이기면 뭘 시키지?’
문득 그는 동아리에서도 같은 보상이 걸린 내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기억했다. 투자대회는 아직 변수가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박강수나 김현아가 그를 추월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지난달인 11월은 약세장이었다. 주가는 전달 대비 약간 내렸다. 하지만 다이어리에 따르면 12월은 연말 배당 효과에다 대통령선거가 끝남에 따른 정국 안정효과로 주가는 폭등했다.
주가 움직임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당연히 공격적인 투자로 그 차이를 벌릴 생각이었다. 사실상 그와 박강수, 김현아의 내기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로 옆에서 후보자를 향해 함성을 지르고 호응하는 김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이 번쩍 뜨이는 탤런트 같은 미인은 아닐지라도 꽤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다. 거기에다 대한민국 최고학부를 다니고 있는 그녀의 지성미가 더욱 그녀를 빛나게 했다.
지금 그와 그녀는 사귀는 것도 사귀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분명히 꽤 가까운 사이인데도 서로 간에 한 번도 사귄다고 생각해보지 않은 그런 관계였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엄연히 사귐을 전제로 한 미팅으로 만난 관계인데 이상하게 발전되었다. 물론 그 가장 큰 이유는 이성으로 대하지 않고 동성처럼 자연스럽게 대하는 김현아의 성격 때문이긴 했다.
‘나도 인혁이처럼 키스해달라고 해볼까?’
문득 드는 생각에 그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곧 그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분명히 거절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현아의 선머슴 같은 성격이나 산적 같은 그의 외모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말로 느껴졌다. 갑자기 슬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