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20
230. 짙어가는 전운(2)
바빴던 하루가 지나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직원들이 일과를 마치고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던 그 시각. 뉴욕 SJ 투자은행 본사에 유서준과 신선영, 김현아가 모였다.
신선영은 메리웨더와 만났던 일을 요약해서 알렸다.
분통을 터트릴 만하건만 유서준은 담담하게 경청했다. 지금 여기에서 목소리를 높여 봐야 도움 될 것은 없었으니까.
정작 유서준을 제외한 두 여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두 여인이 LTCM과 박강수를 성토했다. 특히 박강수에 대한 날 선 비판은 사실상 인신공격이었다.
유서준은 그런 두 사람을 다독였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앞으로 일주일간 모든 게 결판나요. 선물옵션의 특성상 만기일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중요해질 겁니다.”
그렇다. 지금까지는 사실상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만기일에 가까워질수록 같은 크기의 하락에도 손실은 몇 배로 커진다. 당연히 반대편의 이익 역시 비례해서 커진다.
유서준이 옆에 세워진 화이트 보드에 SJ 투자은행 자산 및 포지션 분포를 적어넣었다. 일목요연하게 표를 만들어 한눈에 알 수 있도록 시각적 효과를 곁들였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기일까지 어떻게 버틸 것인가. 둘째는 어떻게 상황을 역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김현아가 멀리 미국까지 와서 참여한 이유도 만기일까지 파생상품 포지션을 어떻게 최적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사실상 김현아와 신선영의 전공 분야다.
유서준은 두 사람이 머리를 짜내면 시너지 효과를 얻어 그나마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만일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낼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 이들 둘이다.
유서준은 화이트보드의 영역을 한국의 주식시장, 외환시장, 일본시장, 홍콩시장, 이렇게 네 곳으로 나누었다.
시장별로 현재 투입된 금액과 포지션을 정리했다. 검은색과 파란색을 사용하여 색색별로 눈에 띄게 기입했다.
지금까지의 손실액은 대략 3조. 신선영은 생각보다 손실이 크지 않음에 안도했다. 반면 김현아는 엄청난 손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김현아는 911 테러 직후 자신을 구원해주었던 유서준을 떠올렸다. 그 유서준에게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도움이 될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이 된다면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공부했던 경제학을 국가를 위해 사용할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외환위기를 막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된 일생을 살았다고 할 것이다. 지금까지 몰랐던 뜨거운 피가 내부에서 끓어올랐다.
김현아는 상황을 설명하는 유서준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새삼 깨달은 사실이 그녀의 눈에 보였다. 유서준은 국가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평생 이룩했던 SJ 금융그룹 전체를 걸었다.
어떤 자는 무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게 유서준이란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유서준이 항상 다짐해왔던 말이 생각났다. 그게 바로 지금이었던가.
LTCM의 투입 예상자금까지 적어넣고 판세를 대충 정리했을 때 유서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서하나였다.
“무슨 일이야?”
“여기저기 알아보니 오도욱이 만기일에 연기금을 동원하라는 의사를 내비쳤나 봐.”
“알았어. 고마워.”
서하나가 얼마나 다급했으면 미국에 있는 그에게 연락했을까.
유서준은 화이트보드에 연기금까지 써넣었다. 연기금의 몇 %가 동원될까. 꽤 복잡한 방정식이 요구됐다.
“자, 이를 참고하여 예상 주가지수를 써보자.”
예상 주가지수는 암담했다. 지금부터 적어도 20%는 더 떨어질 것이 확실했다.
“이를 토대로 우리에게 최대한 유리한 베팅 방법을 고민해보자. 중간에는 가능한 증거금을 줄여 마진콜을 방지하고 막판에 역전을 시킬 방법. 주식과 선물과 옵션, 여기에 달러까지 잘 버무리면 답이 있지 않을까?”
일반적인 시각으로 봐서는 답이 없다. 하지만 옵션은 비선형으로 움직이기에 무한한 변화를 줄 수 있다.
“외국 증권사 리포트가 문제야. 리포트 하나 나오면 개인 투자가를 동요시켜 판을 뒤엎거든.”
신선영의 우려에 유서준이 손을 내저었다.
“지금부터는 그런 리포트를 내기 쉽지 않을 거야.”
유서준이 각 투자은행 책임자를 만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도움은 받지 못하더라도 상대를 지원하는 행동을 못 하게 하자. 이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김현아가 개략적인 포지션을 적어넣었다.
“이 지점에서 풋옵션 매수와 콜옵션 매수를 병행해. 옵션 양매수가 되면…….”
세 사람의 비상한 머리는 최대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포트폴리오와 합성선물 포지션을 재배치했다. 그 과정에서 유서준은 무엇이 더 필요한지 알아냈다.
모든 계획이 완성되었을 때는 벌써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신선영이 우려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겠어? 만일 실패하면 모든 것이 파산이야.”
“괜찮아. 어차피 2017년 12월 9일 그 날 하루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으니까.”
유서준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선영은 혀를 내둘렀다. SJ 투자은행과 SJ 증권에 엮인 자산이 모두 얼마인가. 또 이 두 회사가 가진 각종 펀드는 얼마나 되는가. 그중에서 가용한 대부분을 며칠간의 전쟁에 동원하는 총력전을 펼치겠다고 한다.
오로지 앞만 보는, 미래만 보는 전략이다.
유서준의 미소가 진해졌다.
“우리의 맞은편에는 메리웨더를 비롯하여 박강수와 송예은, 권대만이 있어. 절대 질 수 없지. 그들도 걱정 많이 하고 있을 거다.”
유서준이 손을 내밀었다. 세 사람은 하이파이브를 했다.
내일 아침 인천행 비행기를 확인한 다음 유서준과 김현아는 부근의 신선영 집에 숙박했다.
김현아의 눈에는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의욕을 불태우는 유서준이 대단해 보였다.
**
[2027년 12월 6일]주말이 지나고 개장한 12월 6일 월요일 장은 치열한 양측의 공방 속에 횡보를 보였다. 11월 마지막 날 정부의 립서비스로 폭락한 이후에도 주가지수는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급락한 만큼 반등을 주어야 할 시점이었다. 거기에다 지난 9월 초 대비 -25%가량 하락한 모양이라 내릴 만큼 내렸다는 시각 역시 우세했다.
그런데도 시장은 반응하지 못했다. 여전히 갖가지 난제가 미해결인 상태로 장을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솟은 환율은 여전히 고공행진을 벌였고 인상이 단행된 금리는 계속해서 미국 눈치만 보고 있었다. 여기에 경상수지 적자 전환 소식과 경기둔화 위기감이 위기설을 계속 퍼트리고 있었다.
갖가지 소문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부는 위기 국면이 아니라며 주식시장과 외환시장의 정부 개입을 일축했다.
부동산 가격 하락과 맞물려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저축은행과 신용금고의 파산으로 사회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하루가 멀다고 파산기업 소식이 뉴스를 메웠다.
주식 포털사이트에서는 LTCM과 SJ 투자은행의 대결 분위기가 화제를 메웠다.
*
– LTCM 걔들은 왜 하필 남의 나라에 와서 난리야?
– SJ 증권 손실이 만만찮다더라.
– 서하나 망한 거임? 서하나 거지 되어서 내게 오면 내가 먹여 살려준다.
– 미친놈, 바랄 걸 바라야지. 서하나가 뭐가 부족해서 너한테 가냐?
– 정부에서 이 기회에 SJ 손본다던데 진짜임?
*
여러 소문이 돌았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르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도 분명한 것은 국면이 SJ 증권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반 주식투자자는 주식이 올라야 돈을 번다. 당연히 그들은 상방으로 베팅하고 있는 SJ 증권을 옹호했다. SJ 투자은행이 한국 자본이기에 더 많은 사람이 응원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결집력이 약한 일반 투자가가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주식시장이 하락할수록 한국의 잠재력과 진정한 가치에 베팅하는 SJ 증권의 인기는 상승했다. 더불어 서하나 개인의 인기 역시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금융시장에서 그런 인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LTCM에 확연하게 밀리는 SJ 증권과 투자은행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
월요일 저녁, 유서준과 서하나는 집을 나섰다.
유서준은 평소와 마찬가지인 정장 양복 차림이었으나 서하나는 오랜만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그녀는 명절이 아님에도 한복을 입은 것은 아마 결혼식 이후 처음이란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강북 성북동에 있는 한 단독주택에 도착했다. 길게 이어진 높은 담벼락이 부잣집이란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했다.
최근에는 강남의 신흥갑부에 그 명성이 다소 밀린 감이 있으나 아직도 이곳은 전통적인 부자가 모여 사는 곳이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집사로 보이는 중년인이 나왔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집사의 뒤를 따라 내부로 들어갔다.
보기 좋게 잘 가꾸어진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겨울을 맞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 사이로 사계절 푸른 침엽수가 꼿꼿하게 서 있었다. 여름이었다면 꽤 멋들어진 정원을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들었다.
두 사람은 고풍스러운 목재 바닥이 깔린 복도를 지나 서재로 안내됐다.
그곳에 한 나이든 노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영호. 한때 명동 인베스트먼트라는 거대 대부업체를 운영했던 SJ 증권의 두 번째 대주주. 지금은 대부업체 사장을 은퇴하고 SJ 증권의 주주 역할만 하는 자였다. 물론 대부분 주주 권한을 유서준에게 일임하고 있었지만.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앉아있다가 일어서려는 그를 유서준이 말렸다.
“먼저 절을 받으십시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자리에 다시 앉았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서로 눈치를 교환한 다음 정중하게 절을 했다.
이영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물었다.
“허허, 절을 받으니 좋네만 갑작스럽게 무슨 일인가?”
유서준과 서하나는 맞은편에 다소곳이 앉았다.
조용하게 시선을 마주치는 두 사람을 보고 이영호가 가벼운 담소를 내놓았다.
“두 사람 모두 세월을 비껴가는군. 특히 서 사장은 나이가 들었는지 전혀 모르겠어. 정말 고와.”
서하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흠, 이렇게 찾아온 것을 보니 요즘 돌고 있는 그 소문 때문인가 보구나?”
“알고 계셨네요.”
유서준이 대답했다.
이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은퇴했다고 하나 경제 뉴스에서 손을 뗀 적은 없어. 소문에 따르면 LTCM과의 접전이 다소 힘겹다고 하던데?”
이영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서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승부에서 모든 것을 불태워볼 생각입니다. 자칫하면 SJ 증권이 파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르신께서 갖고 계신 SJ 증권 주식이 휴지가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영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안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오늘 이곳에 들렀구나?”
“네, 그렇습니다. 저 때문에 재산상 큰 손실을 볼지도 모르는데 인사는 드려야지요.”
이영호가 다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도 사람 도리는 하는구나. 아무런 소식 없이 파산하면 섭섭할 뻔했어.”
나이가 들면 사람이 유순해지는 것일까.
유서준은 눈앞의 이영호가 예전보다 더 여유로워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일 분 일 초에 시세가 변하는 금융계에 있을 때는 신경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이 매우 편해 보였다. 누가 저 사람을 한때 수천억의 돈을 빌려주던 대부업체의 큰손이라 생각할까.
“이길 가능성은 없나?”
이영호가 지나가는 말투로 툭 던졌다.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렇군.”
이영호가 앉은 자세를 바꾸며 잠시 눈을 감았다. 뭔가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모양이었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그가 다시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영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기억하나? 대학생 시절 명동 머니에 찾아왔을 때 말이지. 그때 증권사를 설립하고 싶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유서준은 잊었던 과거를 되살렸다. 그때 자신은 무슨 말을 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