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21
231. 짙어가는 전운(3)
유서준은 증권사를 설립한 이유를 생각했다.
사실 그가 증권사를 만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 거기에 나와 있던 2027년의 참상을 막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다. 지금까지 많은 재산을 모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외국의 투기자본 LTCM에 대항하기 위해.
잠시 유서준은 과거를 회상하다 머리를 긁적였다.
그를 향해 이영호가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돈이란 있다가도 없는 것이야. 내가 지금 하는 행동이 애초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전혀 망설일 필요가 없네. 나는 그대의 증권사 설립에 찬성했던 사람이고 그대는 지금까지 나의 믿음을 져버린 적이 없었어.”
유서준과 서하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네. 내가 과거에 투자했던 돈은 충분히 그 쓸모를 다 했어. 그동안 나를 기쁘게 해주었으니까.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었으니까. 나는 그걸로 족하네. 지금 그 돈이 사라진다 하여 아쉽지 않다네.”
이영호는 SJ 증권 주식에 조금도 미련이 없는 것처럼 말했다.
유서준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하게나.”
이영호의 표정은 그를 향한 신뢰를 담고 있었다.
유서준은 자신이 행운아였음을 깨달았다. 이런 사람을 2대 주주로 맞이했기에 지금까지 아무런 잡음 없이 SJ 증권이 숱한 난관을 이겨온 것이다.
“고맙습니다.”
유서준이 고개를 숙였다.
“그만 가보게.”
이영호가 유서준에게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유서준을 향해 이영호가 슬쩍 물었다.
“가장 중요한 시점이 이번 만기일인가?”
“예, 장 마감인 3시 20분부터 30분 사이입니다.”
이영호가 잔잔한 웃음을 머금으면서 말했다.
“그 시각에 내가 약간 힘을 보태어 줌세.”
말만 들어도 고마웠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
[2027년 12월 7일]선물옵션 동시 만기일 3일 전.
유서준은 구체적인 수치를 몰랐지만, 다이어리가 과거로 돌아가기 전의 삶에서 이 3일간 코스피 종합주가지수는 무려 -32%나 폭락했다. 9월 만기일 이후 연일 쌓이는 LTCM의 하방 포지션에 지수가 슬금슬금 미끄러지다 마지막 3일 그 절정을 맞이한 것이다. 가장 크게 하락한 날은 만기일로 무려 -18%에 달했다.
이번에도 비슷한 패턴이었다.
LTCM은 주식시장과 외환시장 양쪽으로 동시에 공세를 강화했다.
주식시장에선 주가가 내릴수록 외환시장에선 환율이 올라 원화 가치가 하락했다. LTCM의 수익은 늘어났다. 반대편에 선 SJ 투자은행은 그만큼 손해가 누적됐다.
LTCM은 장이 열리자마자 한국 주식시장의 고평가를 우려하는 리포트를 배포하며 하방으로 공략에 들어갔다. 1시간 만에 -3%가 밀려 대폭락의 우려가 시작될 즈음 SJ 증권 발 매수세가 들어왔다. 다시 치열한 공방이 전개됐다.
그 시간 도쿄와 홍콩의 주식시장과 외환시장 역시 혼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만큼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으나 LTCM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 두 나라의 증시 역시 최근 두 달간 하락 폭이 상당했다. 특히 일본은 주식시장의 하락과 엔화의 가치 감소를 용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과 수출 품목이 많이 겹치는 상황에서 엔화의 약세는 수출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SJ 증권은 더욱 힘든 전투를 벌여야 했다.
매수와 매도 양측의 한국 시장 전망이 엇갈렸다.
대부분 LTCM과 SJ 증권의 언론 브리핑이었지만 간간이 타 증권사의 리포트도 섞여 나왔다. 이런 가운데 BH 증권의 백나희 부사장이 폭탄선언을 터트렸다.
“SJ 증권의 현재 태도는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잘못된 증시 전망으로 최근 본 손실이 어마어마함에도 여전히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 손실은 누가 메워야 합니까? 바로 고객과 SJ 증권의 주주가 아닙니까? SJ 증권은 서하나 사장의 개인 기업이 아닙니다.”
순간 많은 투자자가 깨달았다. SJ 증권이 파산하면 맡겨둔 펀드도 위험하고 주식을 사기 위해 예탁해둔 위탁계좌 자산도 위험하다는 것을.
물론 증권사가 파산한다 하여 주식위탁계좌에 들어간 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돈은 SJ 증권과 무관하게 따로 관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산의 위험을 눈치챈 투자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은 SJ 증권으로 몰려가 성토를 했고 위탁계좌를 다른 증권사로 옮기기 위해 진을 쳤다.
SJ 증권의 주가 역시 폭락했다. 덩달아 미국 S&P 증시에 상장되어있는 SJ 투자은행 주가 역시 폭삭했다.
온종일 본사 입구에서 시위를 벌이는 투자자를 창문으로 바라보며 서하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 시위자 중 상당수는 최근 주가 하락을 분풀이하고 있었다. 마치 한국 주식시장의 하락이 SJ 증권 때문인 것처럼.
“지금 SJ 증권이 한국 주식시장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저들은 알까?”
창밖을 바라보며 서하나는 씁쓸해졌다.
개인 투자자의 시위가 없는 그런 증권사를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다. 모든 투자자가 돈을 버는 그런 금융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일 뿐이었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언론을 향해 무책임한 말을 내뱉은 백나희가 떠올랐다.
평소에 모든 면에서 그녀와 경쟁 관계를 이루던 경쟁 증권사 부사장. 지금이 기회라고 그녀를 물어뜯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오도욱에게 붙음으로써 한국 증시를 얼마나 망가트리고 투자자를, 기업을 암흑으로 내몰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정작 하락의 주범인 해솔 증권이나 BH 증권이 아닌 SJ 증권으로 화살이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BH 증권에서는 하방으로 얼마나 베팅했을까? 기회라 생각하고 LTCM에 들러붙었을 거야.”
서하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백나희는 예전부터 그녀를 시기했다. 서하나 때문에 증권업계에서 주목을 덜 받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를 미워했다. 그래서 항상 대외적으로 그녀를 공격하거나 다른 노선을 폈다.
지금도 그렇다. 서하나에 반대함으로써 덩달아 인기가 올라가는 그런 마케팅을 스스로 펼치고 있다.
서하나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돌았다. 얼마 전에도 염탐했던 오도욱의 행보에서 백나희가 제대로 한 건 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정보를 알려준 웨이터에 따르면 그날 백나희가 테이블 위에서 기었다고 했던가. 이번에는 지금까지와 달리 오도욱 혼자가 아닌 다른 남자도 한 사람 있었다고 했다.
그녀는 그 남자가 박강수였을 것으로 추측했다. 대체 백나희는 그런 자리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래저래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유서준에게 전화가 왔다.
“응, 나야.”
서하나가 대답했다.
수화기에서 유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저녁 전경련 모임 있는 것 기억하지?”
“응, 알아.”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한 모임이니까 제대로 준비해야 해.”
전경련 모임 역시 유서준이 고민하던 승부수였다.
**
전국경제인연합회. 줄여서 전경련이라고 불리는 이 단체는 국내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설립된 연합체다. 회원사는 500여 기업이고 올바른 경제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주로 정부를 향해 기업을 위한 정책을 요구하는 창구 기능을 해왔으나 때로는 정경유착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027년의 전경련 송년 모임이 12월 7일 밤에 열렸다. SJ 증권은 이 단체에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한 다음 해인 2009년부터 회원사로 등록했다.
올해는 외환위기의 징후가 나타나는 시기이기에 평상시보다 전경련 모임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모두가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자칫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으니까.
서울 시청 옆 최고급 호텔 그랜드홀에서 열린 송년의 밤에 유서준은 서하나와 함께 참석했다. 모인 인원은 거의 천명. 증권인 연합회와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유서준은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 티비에서 자주 봤던 그룹 총수의 얼굴 정도나 알아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서하나가 대단히 유명하여 그녀에게 인사를 하러 온 사람이 많았다. 자연히 옆에 있던 유서준 역시 그들과 악수를 했다.
전경련 모임은 증권연합회 모임처럼 자유롭지는 않았고 다소 엄숙한 분위기였다.
전경련 회장의 축사가 끝나고 최근 일 년 동안 벌어졌던 주요 사업 진행 상황이 소개됐다. 내년에 새롭게 추진될 전경련 사업 일정 안내가 있었다.
이곳에 모인 기업인 가운데 한가롭게 그런 사업 일정에 관심을 두는 자는 없었다. 모두 최근의 주가 급락과 환율 폭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마침내 유서준의 차례가 왔다. 그는 사전에 이 사태에 대한 발언권을 요청했었다. 그가 바쁜 와중에도 이 모임에 참석한 이유였다.
단상에서 유서준은 장내에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나라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요 인물이었다. 이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면 작금의 외환위기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연설을 시작했다.
“회원 여러분. 최근의 외환위기 사태에 고민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주가와 원화 가치 폭락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만 그 내면을 보면 이 사태에는 한국을 외환위기로 몰아넣고자 하는 외국 투기자본의 추악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탄식을, 어떤 사람은 놀라움을 나타냈다. 증권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소문으로라도 들어본 내용이지만 일반 기업 가운데는 전혀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물건을 만들어 팔면 기업은 저절로 부강해진다고 믿는 순진한 기업도 많았다.
“지난 9월 9일 이후 국내 증시에는 LTCM이라는 미국 투기자본이 들어왔습니다. 그 자본의 최종 목표는 대한민국의 외환위기. 그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9월부터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여러 작전이 있으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주가 하락 베팅과 환율 상승입니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세 달간 벌어졌던 LTCM과 SJ 투자은행 간의 치열한 전투를 설명했다. 대부분 최근의 주가 흐름 속에 그런 어마어마한 혈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분위기였다.
잠시 후 그는 핵심을 꺼냈다.
“만일 LTCM만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위기를 걱정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 체력이 위기에 빠질 만큼 허약하지 않으니까요.”
장내에 모인 경제인 모두가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틀 후가 12월 만기일입니다. LTCM의 국내 금융 교란은 이날 최절정에 달할 겁니다. 이날 마지막 주가지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만일 이날 주가지수가 폭락하면 우리는 외환위기에서 빠져들게 됩니다. 자금 순환에 문제가 일어나 적어도 상장사의 30% 가까이가 일시적인 부도 상태에 빠져들 겁니다.”
30%란 말에 모두가 안색이 급변하여 몸을 떨었다. 지금 여기에 모인 기업도 30% 전망을 벗어날 수 없다.
비록 시중금리가 폭등하고 있으나 대부분 기업이 아직은 버틸만한 상황이다. 지금은 모두가 일시적일 거라 믿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집값 하락과 가계 부채로 이자 부담이 한계에 이른 가정이 속출하고 있지만 아직은 일부였다.
이런 난국이 이틀 후면 전국을 집어삼킬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정부의 태도입니다. 여전히 위기를 인식하지 못한 그들은 오히려 만기일에 연기금 보유 주식을 내다 팔 생각까지 하고 있습니다.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전통적으로 전경련과 정부는 밀월 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날 만큼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정부를 성토했다.
“그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한 사람이 유서준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모두가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고 이 사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유서준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