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24
234. 디데이 전야(3)
박강수와 송예은, 권대만은 이날 저녁 LTCM 서울지부에서 승리를 자축했다.
공식적인 승리를 확인하는 시점은 내일이 되겠지만 오늘까지의 분위기로 보아 내일의 승리는 당연시됐다.
자축연은 간단하게 열렸다. 샴페인 몇 병과 다과가 전부였다.
“내일 제대로 축하연을 열거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 하자.”
박강수가 샴페인을 터트렸다. 남은 두 사람이 박수를 보냈다.
상기된 얼굴로 샴페인을 마시던 권대만이 말을 꺼냈다.
“오늘 원래의 목표보다 하락 폭이 다소 적지 않았나요?”
오늘 주식시장 개시 전 목표는 -8%의 하락이었다. 이것이 SJ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6%에 머물렀다.
“SJ의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난 거죠. 아니면 그들의 자금 동원력이 우리 짐작을 벗어났거나.”
송예은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박강수가 손을 내저었다.
“하하, SJ의 저항이 강하긴 하지만 어차피 대세와 상관없어. 내일 연기금이 동원되면 목표치인 -20%는 우습게 달성할 테니까. 그보다 더 떨어질까 걱정해야 할걸?”
누가 뭐라 해도 연기금은 주식시장의 가장 큰손이다. 물론 연기금이 가진 주식 전부를 팔 수는 없다. 법을 빙자한 관례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보유 비중을 최소한으로 줄여 그중에 얼마나 팔 것인가가 문제인데 박강수는 그 일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SJ는 최후의 발악을 하는 중이야. 사실상 자금 여력이 바닥난 상태. 내일 버틸 힘은 없어.”
박강수는 자신이 SJ 금융그룹의 상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상대를 잘 알고 있었다.
“자자, 축배를 들자고.”
박강수가 샴페인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쨍!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흘렀다.
빅강수가 흥에 겨워 낄낄거리며 웃었다.
“큭큭, 메리웨더도 대단히 흡족한 반응을 전해왔어. 내일이면 명실상부한 세계 1위 자리에 오르는 거잖아? 아무리 그라도 떨리지 않을 리 없지.”
“지금도 1위인데…….”
“현재는 불안한 1위니까.”
송예은과 권대만이 서로 툭탁거렸다.
박강수가 다른 샴페인 병을 들고 마구 흔들더니 펑 소리를 내며 터트렸다.
사방으로 샴페인이 튀며 거품이 병 위로 넘쳤다.
“크크, 내가 이렇게 축배 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데. 유서준 그놈에게 대학 시절부터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거든. 꼭 한 번만이라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만 수백 번 했을 거야. 그 손을 신께서 이렇게 들어주시네. 상대가 완전히 파산하도록 말이지.”
박강수가 흥겨움에 젖어 콧노래를 불렀다.
송예은과 권대만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봤다.
박강수가 권대만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 대만이! 즐겁지 않냐? 중국에서 SJ에 말려 파산했던 거 생각해봐. 이제 제대로 복수한 거잖아?”
중국 버블 때 박강수는 해솔 증권이 망가졌고 권대만 역시 자신의 모든 사업이 파산했다. 물론 권대만은 그것이 유서준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서준의 성공에 시기심이 일기도 했다.
박강수가 잔을 빙글 돌리며 중얼거렸다.
“난 유서준을 파멸시키려고 LTCM에 들어갔어. 해솔 증권 부도를 복수하려고. 그런데 권대만 너는 왜 LTCM에 들어왔나?”
권대만은 뜻밖의 질문에 송예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권대만은 송예은을 따라 LTCM에 들어왔다. 단지 송예은과 가까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익이 나는 곳이면 어떤 곳이든 간다는 그의 철학과 LTCM의 행보가 유사한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잠시 송예은과 동거를 했을 때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행복도 있었다. 하지만 송예은이 마이클과 어울리면서 그의 행복은 사라졌다.
그는 옆에서 그녀의 선택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송예은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 그의 현실이었으니까.
그나마 지금은 좋았다. 송예은이 한국으로 오는 바람에 마이클과 떨어져 있게 되었으니.
내일 만기일이 지나고 모든 작전이 완료되면 송예은은 미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마이클과 사귀게 될까? SJ가 파산하면 마이클은 직장을 잃을 테고 설마 마이클이 LTCM으로 오는 것은 아니겠지?
권대만의 머릿속에 복잡한 방정식이 얽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응, 왜 그래?”
박강수가 그를 노려봤다.
권대만은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오늘 외환시장이 조금 이상하게 움직여서 그것을 생각하느라 말입니다.”
SJ가 완강하게 저항한 국내 주식시장 말고 도쿄나 홍콩의 외환시장 움직임도 이상하게 움직였다. 예상과 달리 달러 폭등이 아닌 보합으로 끝났다.
“그게 SJ의 저항 때문이라면…….”
송예은이 우려를 표하자 박강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SJ는 힘이 없어. 종이호랑이야. 하하, 호랑이는 무슨 호랑이? 고양이지. 도쿄와 홍콩은 해당 중앙은행 때문일 거야. 그들도 더 이상의 화폐 가치 하락을 두고 보기 어려웠을 테니까. 어차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지.”
박강수가 제멋대로 해석하고는 다시 권대만에게 물었다.
“그래서 넌 왜 LTCM에 왔지?”
“후후, 복수하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아서 말입니다. 중국 버블 때 파산해서 돈도 부족했고…….”
“그래, SJ가 망가지는 꼴을 보면 재밌을 거야.”
박강수는 권대만의 복수란 단어 선택이 만족스러웠다. 그의 시선이 송예은에게 옮겨갔다.
“넌 리먼에서 잘 지내더니 왜 LTCM으로 옮겨왔어? 특히 넌 유서준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작업에서 일등 공신이었잖아?”
박강수는 유서준과 관련되는 일이라면 상당히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송예은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어설픈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유서준이 싫어서요.”
그녀는 짧게 말했다.
박강수는 머릿속에서 송예은의 과거 행적을 추적했다. 한때 송예은이 유서준을 매우 따랐다는 소문을 들은 바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지금도 송예은은 싱글이었다.
“서하나가 미웠겠군.”
박강수가 제멋대로 추정하며 말했다.
송예은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박강수가 샴페인을 쭉 들이키며 입술을 혀로 다셨다. 그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탐욕스러웠다.
“흐흐, 내일이면 서하나 역시 망가지는 것을 보게 될 거야.”
SJ 증권이 망가지면 서하나 역시 모든 것을 잃을 테니까. 송예은은 여기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이어지는 박강수의 말이 그녀의 정신을 번쩍 깨웠다.
“내일 서하나는 온전한 몸으로 돌아가지 못해. 흐흐, 증권사 사장의 스트립쇼를 볼 수 있겠군. 김현아 교수가 아닌 것이 아쉽지만…….”
**
유서준과 서하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오래전 학력고사를 치기 전날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요즘 수능 치는 학생들이 이런 기분을 느낄까.
오늘 밤은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내일 만기일은 모든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었다.
그의 계산대로라면 사실상 결과는 극과 극일 확률이 높았다. SJ가 폭삭 망하거나 아니면 LTCM이 폭삭 망하거나. 둘 다 상생하는 경우란 존재할 수 없었다. 서로 반대편 포지션을 잡은 상태니까.
티비에서는 나이트 뉴스를 보내고 있었다.
경제뉴스의 상당 부분은 최근의 외환위기 관련 뉴스를 다뤘다.
뉴스 가운데 정부 당국자의 인터뷰가 나왔다. 익숙한 인물이 등장해서 대한민국의 펀더멘털은 굳건하며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이번 주만 지나면 주요 정책이 수립되므로 국민 여러분은 안심해도 된다는 주장이었다.
서하나는 화면에 나온 인물을 보며 고운 눈매를 찡그렸다.
조각 같은 외모를 지닌 잘 생긴 남자. 바로 오도욱이었다.
물론 서하나 역시 그의 인터뷰 내부에 숨겨진 음모를 눈치챘다. 내일 SJ 금융그룹이 망하고 나면 오도욱은 재빨리 금융위기를 안정시킬 거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서하나는 최근 들어 정부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정부에 맞서지 말라는 금융계 격언도 있지 않던가. 정부의 정책 수립부터 시작하여 각종 립서비스에 연기금까지 동원하는 실력행사는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 결과가 내일 오후면 드러날 것이다.
현재의 예상대로라면 연기금의 실력행사를 막을 능력이 SJ 금융그룹은 없다. 내일 작정하고 쏟아부을 연기금 주식은 공매도를 포함하여 적어도 10조 이상이 될 것이고 이를 매수해줄 우군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SJ 금융그룹의 파산. 유서준과 그녀의 재산 역시 거덜이 날 것이다.
오도욱에게 항복하고 선처를 요구하면 어떻게 될까. 이즈음에서 오도욱이 물러서 줄까. 여기서 마감한다면 SJ 금융그룹은 손해가 막심하겠지만 생명줄 유지가 가능할 것이다.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최근 며칠간 서하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고민의 실체였다.
서하나는 옆에 앉아 멍하니 티비만 쳐다보는 유서준을 힐끔 바라봤다.
그녀가 오도욱과 담을 쌓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박강수가 유서준을 노리며 LTCM을 동원했다지만 오도욱이 포함된 금감원만 자신의 편이었다면 LTCM에 오히려 역공을 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모든 결과가 그녀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었나.
오도욱의 인터뷰가 지나갔지만 티비 화면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오도욱의 잔상이 어려있었다.
오도욱과 조금만 타협했었더라면. 그런 후회가 일었다.
오도욱과 언제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는지 제대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를 좋아하고 따라다녔던 오도욱이 그녀의 결혼을 전후하여 태도가 돌변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녀를 위협하지 않았다.
“언제였지…….”
완전히 담을 쌓은 것은 리먼 브러더스 인수 때였다.
금감원 증명서를 받으러 갔던 그 날 만일을 대비해 그가 원했던 붉은색 속옷마저 차려입고 나갔던 기억이 났다.
그날 그가 하자던 대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두 번 수모를 당하고 몸을 대주었으면 SJ 증권은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백나희가 부사장으로 있는 BH 증권이 생각났다. 최근 몇 년간 BH 증권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오도욱이 작정하고 밀어주고 있다는 정황은 사실이었다.
백나희가 수모를 당했다는 소식이 그녀의 귀에 들려오긴 했지만 어찌 보면 백나희 역시 충분한 이득을 챙기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은 오도욱의 옛 연인이었으니 백나희처럼 타인 앞에서 그런 수모를 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겠지.
서하나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맺혔다. 얼마나 지금 상황이 암울했으면 감히 그런 생각까지 하는 자신이 유서준에게 미안했다. 그럴수록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이 자신인 것만 같아 그녀는 더욱 미안했다.
“뭘 봐?”
쑥스러움에 서하나는 티비만 보는 유서준의 허리를 툭 쳤다.
“응?”
유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서하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래도 좋아,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으니.”
유서준이 무슨 싱거운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티비로 시선을 돌렸다.
티비에서는 국내 금융 소식이 마무리되고 해외 금융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뉴스에선 최근 한국 사태로 인한 SJ 투자은행 주가 하락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서하나는 다시 속이 쓰렸다. 유서준의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무덤덤해 보였다.
화면이 바뀌었다.
티비 아래에 속보가 떴다.
커다란 글씨로 ‘FRB의 금리 인상 유보 가능성’이란 자막이 떴다.
화면에 FRB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이 나타나 최근 동아시아의 불안한 금융 정세 때문에 12월에 예정되었던 금리 인상을 유보할 것이란 발언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