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26
236. 디데이(2)
인터넷 주식 포털 사이트에 투자자의 반응이 올라왔다. 대부분 만기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상과 달리 지지부진한 장세에 실망했다는 글이 많았다.
그 속에서 SJ 증권과 서하나를 걱정하는 글도 있었다.
*
– 오늘 SJ가 지면 외환위기가 시작되나?
– SJ를 구국의 전사로 착각하는 넘들 많네.
– 서하나가 주식 여신인 것은 사실이지. 오늘부로 여신 자리에서 쫓겨나나?
– 내일부터 기업 도산이야. 너네 전부 실업자.
– 난 공무원이라 철밥통이다!
*
LTCM에 대한 비판은 의외로 적었다. 일단 LTCM이란 이름부터 낯설었고 LTCM 역시 뒤쪽에서 은밀하게 공작해왔기 때문이다.
LTCM보다 아래로 밀어붙이는 첨병으로 알려진 해솔 증권이나 파워에셋 증권, BH 증권이 더 유명했다.
일반 주식투자자는 이 세 증권사를 욕했지만 파생 투자자는 이 세 증권사를 위대한 전사로 찬양했다. 선물을 매도하거나 풋옵션을 매수한 투자가에게 중요한 것은 순간의 이익이지 국가 경제의 향방이 아니었다.
띠리리리-
유서준의 전화가 울렸다.
“서준아, 괜찮아?”
김현아의 목소리였다.
어제 김현아가 짠 포지션은 시장이 위로 폭등하거나 아래로 폭락했을 때 수익을 제대로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제 자리에서 횡보하면 사실상 손실이 최대로 발생했다.
오늘처럼 움직임이 미미하면 오히려 손실만 더 키운 셈이 됐다.
“괜찮아. 오늘 승부는 오후야.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어.”
유서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겁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확신도 있었다. 이대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어차피 오후가 되어도 LTCM에서 큰 도발이 없다면 SJ에서 먼저 상방향으로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유혈 전투는 벌어지게 마련이다.
김현아를 안심시킨 그는 신선영과 강재민에게 전화했다. 외환시장에서 잘 대처해 달라고 부탁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전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사장님, 손님 오셨는데요?”
모니터만 주시하던 서하나는 비서실의 통보에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비서실장 최훈재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처럼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날에 손님이라니. 예정에 없던 돌발상황에 서하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데?”
“BH 증권의 백나희라고 합니다.”
뜬금없는 손님이었다. BH 증권은 현재 하방향으로 포지션을 잡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SJ 증권의 적군이었다. 그쪽도 오늘 장세에 신경이 날카로울 상황인데 갑자기 방문이라니. 불난 집에 부채질하러 왔을까.
“들여보네요.”
서나희가 자세를 고치며 대답했다.
잠시 후 백나희 부사장이 들어왔다. 귀부인이나 입을 무거운 모피코트 차림.
한겨울이니 모피코트가 어색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살 떨리는 날에 주식시장을 살피며 업무를 보기엔 다소 난감한 옷차림이 분명했다. 파티장을 방문하는 것도 아니고.
모피코트가 살짝 벌어진 앞쪽 틈 사이로 진한 남색 정장이 모습을 내비치고 있었다.
서하나의 눈길이 그녀의 머리부터 아래로 훑었다.
여기저기 액세서리로 치장한 모습이 평소 업무 스타일이 아님은 확실했다. 게다가 치마도 매우 짧았다. 무릎 부근까지 내려온 모피코트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안에 입은 정장 치마는 허벅지를 거의 다 드러낼 하의실종 패션이었다.
스타킹 역시 신었는지 아닌지 알아보기 힘든 연한 살구색.
그것만은 서하나 그녀와 똑같았다. 그녀 역시 두꺼운 검은색 스타킹은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파티장 가시나요?”
서하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옷차림이 그게 뭐냐는 질책이 살짝 섞여 있었다.
“호호, 오늘 저희 BH 증권은 파티를 할 것 같네요.”
백나희가 지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는 내부를 쓱 둘러보다가 유서준을 발견하고는 한차례 인사를 꾸벅했다.
유서준은 가볍게 인사를 받고는 백나희에게서 신경을 껐다. 사실 신경 쓸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여긴 무슨 일이죠?”
서하나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생각해보니 백나희가 이곳을 방문한 것은 거의 일 년이나 더 된 일이었다. 흔치 않은 방문이니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있음이 확실했다.
백나희가 안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서하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하는 짓이 친한 친구를 만난 것 같았다.
“서 사장님, 오늘 점심을 함께하시는 건 어때요? 오늘 아니면 앞으로 같이 점심 먹기도 어렵지 않을까요?”
서하나는 물끄러미 상대방의 눈을 보았다.
흥미로운 호기심을 머금은 듯한 까만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상대의 눈빛에서 뭔가 과시하고 싶은 욕망을 보았다. 지금 현재 많은 수익을 보고 있는 자기네 증권사 상황을 자랑하고 싶은 것인가?
서하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피하면 망하기 직전이란 것을 오히려 광고하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유서준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유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대신 점심값은 그쪽에서 내시죠.”
서하나는 입가에 웃음을 떠올리며 수락했다.
그녀는 옷걸이의 하얀색 코트를 진한 붉은 정장 위에 걸치고 백나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른 나가자는 의사표시.
“호호, 유 대표님 나중에 봬요.”
백나희가 유서준을 향해 손을 흔들고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나갔다가 올게.”
서하나가 유서준과 눈을 맞췄다. 유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배웅했다.
**
지하주차장에 백나희의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하얀색의 고급 벤츠 외제차. 잘 나가는 성공한 임원이 주로 타는 차라고 광고를 했던가.
서하나는 조수석에 앉아 안전띠를 매며 물었다.
“가까운 곳에서 그냥 점심 먹으면 되는데 어디로 가려고?”
“아, 같이 갈 곳이 있어.”
운전석에 자리를 잡는 백나희의 음성이 살짝 떨려 나왔다.
시동이 걸리고 부드럽게 차가 출발했다.
빌딩 입구로 나오는 순간 햇살이 쏟아졌다.
주식 고민에 먹구름이 낀 서하나의 마음과 달리 밖은 화창했다. 겨울이지만 그리 추워 보이진 않았다.
갑작스러운 눈부심에 서하나는 눈을 찡그렸다.
그 순간.
“흐흐, 서하나! 오랜만이야.”
섬뜩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순식간에 그녀의 턱밑으로 날카로운 과도가 들어왔다.
서하나는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봤다.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쓴 한 사내가 그녀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서하나는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오래전, 박강수의 지시로 그녀를 납치했던 바로 그 사건이었다. 그때와 대단히 유사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당시 사건의 정황을 되새겼다. 누구였지. 가도건설 사장 아들이었던가.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승용차에 탔던 그녀를 친구와 둘이서 납치했었다. 아버지에 대한 앙갚음으로. 올림픽대로를 따라 끌려가다가 중간에 기지를 발휘해서 차에서 뛰어내렸던가.
“누…… 누구야?”
서하나는 상대가 짐작이 갔지만 일단 물었다.
“나? 잊을 수가 없을 텐데? 가도건설 사장 아들. 김범두라 하지.”
짐작이 맞았다. 그녀는 옆에 앉아 운전하는 백나희를 노려보았다.
백나희는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앞만 바라보며 운전했다.
백나희와 김범두가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녀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뒤에서 킥킥거리는 김범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흐, 오늘은 허튼짓하지 않는 게 좋아. 지난번처럼 그렇게 어이없이 당하지 않을 테니. 아, 얼굴에 칼자국 나고 싶으면 한번 시도해봐도 돼.”
위협하는 목소리는 과거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서하나는 목에 들이댄 칼을 의식하며 몸을 꼿꼿하게 세웠다.
승용차는 곧바로 올림픽대로를 올라탔다. 여의도를 벗어날 모양이었다.
상대의 왼쪽 손이 그녀가 얼굴을 돌리지 못하도록 뒤에서 붙잡았다.
“흐흐, 그때 그 사건 이후 감방에서 한참을 보냈지. 간신히 출소했을 때는 이미 좋은 청춘 다 지나갔더라고. 그 와중에 아버지는 라면만 먹다가 돌아가셨지. 네년이 아버지를 회사에서 쫓아내는 바람에 말이야.”
서하나는 예전 그 사건 이후 가도건설 사장을 챙기지 않았다. 굳이 챙길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가도건설 사장은 그녀와 악연으로 점철된 사이이고, 잠시 운전사로 거두어들인 것만 하여도 그녀가 큰 은혜를 베푼 것이었다. 운전사를 그만두고 힘겹게 살았던 모양이었다.
“그게 모두 네년 때문이야.”
그게 왜 나 때문인지 항의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일단 휴대폰부터 꺼내.”
칼날을 턱 아래로 들이밀며 위협했다.
서하나는 손가방에서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 상대방에게 넘겼다.
휴대폰에서 배터리가 분리되는 소리가 났다.
“백나희! 네가 이럴 수 있어?”
서하나는 백나희에게 눈을 부라렸다.
백나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서하나, 너와 나는 적이야. 나에게 자비를 바라지 마.”
싸늘한 음성이었다.
서하나는 내심 분을 삼켰다. 둘 사이가 적인 것은 맞았다. 예전부터 증권업계에서 서로 대비되며 티격태격했으니까. 또 지금 현재는 매수와 매도라는 반대 포지션을 갖고 생사를 건 혈전을 벌이고 있으니까.
그렇다 해도 이런 식으로 상대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하나는 예전에 이런 식의 위해를 가했던 한 인물을 떠올렸다. 바로 박강수였다.
“설마 박강수가?”
가도건설 사장 아들 김범두와 연결된 인물은 박강수가 유일했다. 박강수는 백나희와도 김범두와도 접점이 있는 인물이다. 그가 아니면 이런 일을 벌일 자가 없었다.
그녀의 짐작을 백나희가 확신시켜 줬다.
“잘 아네.”
백나희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서하나가 뒤를 이어 물었다.
“그럼 오도욱이?”
백나희가 그녀를 슬쩍 돌아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특별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오도욱이 시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무언의 표정이었다.
서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오도욱과 박강수의 마수에 빠진 것이다. 그 마수의 수행인이 백나희와 김범두였다.
오늘 이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에 김범두는 그녀를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서 윤간하려고 했다. 오늘은?
서하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턱을 잡은 김범두의 손에 힘이 들어왔다.
김범두가 칼의 한쪽 면을 그녀의 뺨에 대며 말했다.
“흐흐, 지난번에 말이지, 내가 했던 잘못이라고는 네년 치마 걷어 빤스 구경한 것밖에 없었어. 그런데 검찰에서 몇 년을 때렸는지 알아? 네년 맛이라도 봤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서하나의 몸이 두려움에 경직됐다.
“그게 다 유전……. 거 뭐시냐?”
“유전무죄 무전유죄.”
서하나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아 맞다. 역시 똑똑한 년이야. 난 똑똑한 년이 좋더라. 어쨌든 유전……. 하여튼 그런 거 아니냐. 내가 예전처럼 돈이 있었어 봐. 치마 한번 걷어보는 게 감방에 갈 죄냐고.”
말이 안 통하는 놈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속까지 배배 꼬인 놈이 분명했다. 한때 유학까지 가서 대마초나 피울 만큼 풍족하게 살던 자가 가난에 빠졌으니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자신의 잘못은 생각지도 못하고 남 탓만 하는 습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서하나는 가능한 한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백나희가 짧게 대답했다.
“엠퍼러.”
백나희의 표정에 야릇한 미소가 새어 나왔다.
서하나는 엠퍼러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백나희가 오도욱을 접대하는 강남의 고급 룸살롱. 백나희의 온갖 추문이 들려오던 바로 그곳이었다.
서하나는 오늘 하루 앞으로의 시간이 쉽지 않을 것이란 짐작을 했다. 어쩌면 백나희에게 가해졌던 그런 수모가 그녀에게 가해질지도 모른다.
두려움이 스멀스멀 솟구치는 상황에서 김범두의 손이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의 짐승 같은 손이 목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꼿꼿하게 세운 그녀의 상체가 경직되었다.
“그래, 그래. 난 똑똑한 년이 좋아. 예전에 못 본 네년 오늘 제대로 한번 보자고.”
뒤쪽에서 넘어온 김범두의 왼손이 목을 타고 내려오더니 그녀의 블라우스 앞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