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27
237. 디데이(3)
서하나는 기겁하고 몸을 뒤척였다.
“흐흐, 가만있어.”
위협적인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툭.
블라우스 단추가 위쪽부터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몸을 꿈틀거리는 순간 목 부근을 건드리던 칼이 그녀의 눈앞에 들이밀어 졌다.
“가만있으라니까.”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블라우스 단추가 벌써 3개째 풀리고 있었다.
상대의 손이 단추를 풀면서 의식적으로 가슴팍을 지그시 눌러왔다.
차분하게 아래로 내린 서하나의 손이 덜덜 떨렸다. 생각 같아선 곧바로 상대의 손을 잡고 저항하고 싶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칼이 섬뜩했다.
“으으.”
두려움에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봐, 그만하지?”
백나희가 사내에게 소리쳤다.
단추를 풀던 사내의 손이 움찔하더니 멈췄다.
“그 여자는 네가 건드려도 될 그런 년이 아니야.”
놀랍게도 백나희가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흐흐, 뭔 소리야? 오늘 이년을 나에게 주겠다는 언질도 받았다고.”
김범두가 거친 목소리로 항의했다.
서하나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지만 김범두가 백나희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란 예상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백나희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아직은 아냐.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조금 기다려.”
“아, 제기랄.”
불만이 가득한 사내의 욕설이 뒤를 이어 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사내의 손이 어쩔 수 없는지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면서도 그 손은 그녀의 가슴팍을 쓱 눌러보면서 사라졌다.
“이년 가슴이 꽤 풍만한데 아깝다.”
서하나는 떨리는 손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다시 여몄다.
마침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백나희의 눈과 마주쳤다.
백나희가 혀를 차며 빈정거렸다.
“좋아할 거 없다. 어차피 시간만 뒤로 미뤄진 거니까.”
백나희가 마치 그녀가 겪어야 할 오늘 하루를 잘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올림픽대로를 타던 승용차가 금방 시가지로 빠져들었다.
서하나가 보기에 차는 강남의 논현동 부근으로 가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면도로에 있는 작은 빌딩 앞에 차가 멈추었다. 빌딩 입구에 엠퍼러라는 작은 간판이 보였다. 지하에 있는 룸 업소인 줄 알았더니 놀랍게도 빌딩 맨 상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주위에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유흥가 지역이라 대낮에는 한적한 동네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옆을 백나희와 김범두가 둘러싼 상태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칠 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엠퍼러란 유흥업소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유서준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간이었다. 매매의 한 축을 담당하는 기관투자가가 점심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주가에 큰 영향을 끼쳐보려는 개인 투자가가 주로 이용하는 시간대이다.
오늘 LTCM이 하방으로 내려칠 것을 아는 투자자라면 지금쯤 아래쪽으로 포지션을 추가할 시점이었다. 그런 행동을 할 후보는 해솔 증권이거나 그쪽일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익을 취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나올 행동이다.
갑자기 선물 매도 잔량이 증가하며 지수를 아래로 압박했다. 허약한 매수세 때문에 프로그램 매도를 유발하며 지수가 쭉 밀렸다.
곧바로 반격이 들어왔다.
어디에선가 매수 물량이 들어오며 지수를 떠받쳤다. 일견하기에는 자연스러운 매매공방이었다.
아마 유서준의 지시를 받은 어떤 트레이더가 움직였을 것이다. SJ 증권과 SJ 투신. 나아가 SJ 투자은행에 속한 수많은 트레이더가 지금 이 시장을 떠받치고 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많은 SJ 증권의 우군과 개인 투자가도 있긴 하겠지만.
지금은 상대편의 힘을 가늠해보는 시험 구간. 본격적인 매매공방은 점심시간 직후부터 시작될 것이다.
유서준의 눈이 시계를 향했다.
시계는 오후 1시를 향하고 있었다. 마감 시간까지는 약 2시간 30분. 2시간 30분 후면 모든 운명이 결판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기업이 외환위기라는 수렁으로 빠져들지.
문득 유서준은 서하나를 떠올렸다.
점심을 먹으러 떠난 지 제법 됐다.
그는 휴대폰으로 전화했다. 발신음이 울리는가 싶더니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음성 메시지가 들려왔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떨어졌나?”
유서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서하나가 안내되어 들어간 곳은 두꺼운 출입문이 가로막고 있는 별실이었다. 내부 실내공간은 꽤 넓었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유리 테이블과 그 둘레로 편안하게 보이는 가죽 소파가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천정에는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려있고 불마저 밝혀져 있었다. 그 주위로 작은 등이 천정에 줄지어 박혀 환한 빛을 내뿜었다. 실내는 햇빛이 비치는 바깥처럼 밝았다. 일반적인 룸이 다소 어두컴컴한 분위기인 것을 고려하면 의외의 광경이었다.
벽은 거울로 도배되어 자신이 모습이 비쳐 보였다. 바닥도 반들반들거리며 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처음에는 거울 바닥인지 착각할 정도였다. 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 입장으로선 다소 부담스러운 수준.
백나희는 익숙한 표정으로 안으로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가던 서하나는 테이블 주위에 앉은 두 사람을 보고는 주먹을 꾹 쥐었다.
오도욱과 박강수가 소파에 앉아 잡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서하나가 들어오는 것을 본 박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사장님, 오셨습니까?”
의외로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박강수가 맨 뒤에서 따라 들어오는 김범두를 보고는 언성을 높였다.
“자네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
김범두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한테 준다고…….”
“저녁때까지 기다려.”
박강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김범두가 박강수와 서하나를 번갈아 보더니 뭐라고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서하나는 두 사람의 대화가 뜻하는 바를 금방 알아챘다. 차 안에서 백나희가 했던 말과 연관시켜보면 모를 수가 없었다.
온몸이 절로 떨렸으나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신념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백나희가 그녀를 바라보며 고소한 표정을 지었다.
서하나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박강수가 출입문의 맞은편 가장 안쪽 면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저기 앉으시죠.”
별다른 수가 없기에 서하나는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소파는 푹신했다.
유리 테이블에 양손을 올려놓고 좌우를 바라봤다.
직사각형 테이블의 짧은 변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그녀의 왼쪽으로 테이블의 긴 면에 오도욱이, 그 반대편인 그녀의 오른쪽 긴 면에 박강수가 앉았다. 그녀의 맞은편에 마지막으로 백나희가 자리했다.
테이블의 사방으로 한 자리씩 점유한 형태가 됐다.
“이런 방식은 좀 심하다고 생각지 않나요?”
서하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박강수가 손을 내저었다.
“정중하게 모시고 싶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오지 않을 것 같더군요.”
박강수의 안면에 비릿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서하나는 오도욱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이곳의 대빵은 오도욱이니까.
오도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하나, 오랜만이야.”
최근에 오도욱은 그녀와 이야기할 때 서로 말을 높였다. 대부분이 공적인 자리였던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상 사적인 관계가 끊어졌던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녀에게 대학 시절 때처럼 하대했다.
서하나는 그 미묘한 어감 차이를 알아챘다.
“왜 불렀어요?”
서하나는 화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차피 고분고분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오도욱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오늘은 축제일 아닌가? SJ 그룹이 무너지는 날. 그 축제를 같이 즐겨보자고 불렀어.”
그녀는 안색을 굳히며 상대를 노려봤다.
박강수가 화면이 큰 노트북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자, 지금부터 주식시장 동향을 보도록 하죠.”
노트북 화면에 선물지수 그래프가 나타났다. 1분 단위로 붉은 막대와 푸른 막대가 그려지는 초단기 그래프였다. 한쪽 옆에는 선물 매수매도 호가가 보였다.
시간은 오후 1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서하나는 지금쯤 유서준이 자신의 부재를 눈치챘으리라고 생각했다.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 점심 먹으러 간 후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 조 단위 규모의 돈이 걸려있는 판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긴 힘들려나.
“SJ는 주식시장을 떠받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나 보더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함께 보자고.”
오도욱이 쇼타임을 알렸다.
**
만기일에 주가지수 선물과 옵션의 기준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나라마다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코스피 200지수 최종가로 결정된다.
알다시피 주가의 최종가격은 마감 전 10분, 후장 마감 동시호가에서 결정된다. 즉 오후 3시 20분부터 30분 사이에 일괄적으로 매수와 매도 주문을 받아 3시 30분에 최종가격이 결정되는 시스템이다.
이런 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중간 단계가 철저하게 부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코스피 200지수의 아침 시가가 350이었고 중간에도 350, 3시 20분까지 350이었다고 하자. 마감 10분간 동시호가에서 크게 움직여 최종지수가 345였다면 선물옵션의 정산 기준가는 345가 된다.
선물옵션에서 막대한 포지션을 쌓은 투자자는 당연히 만기일에 자신이 가장 유리한 쪽으로 주가지수를 조종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런 이유로 만기일에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지고 대박과 깡통이 혼재한다.
실제로 이 단점을 이용한 사건도 많았다.
2010년 11월 11일 만기일에 외국계 증권사인 일본 도이치 증권은 콜옵션 매도와 풋옵션 매수 포지션을 보유했다. 하방으로 지수가 움직이면 크게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10분에 도이치 증권은 무려 2조 4천억 원의 주식을 매도쳤다. 주가지수는 순식간에 2.7%나 급락했다. 단 10분 만에 풋에서 대박이 터졌다.
이날 하루 도이치 증권은 450억 원의 이득을 챙겼고 그 반대편인 국내기관은 무려 1400억 원의 손실을 봤다. 이 전략에 휘말린 와이즈에셋자산운용은 900억 원의 손실을 내고 문을 닫았다. 다음날 도이치 증권은 전날보다 싼 가격으로 매도했던 주식을 다시 매수했다. 일명 도이치 쇼크로 불리는 사건이다.
거래소에서는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사전신고제도를 도입했다. 앞으로 만기일 마감 동시호가에서 대량으로 주식을 매수하거나 매도하는 기관의 경우 적어도 장 마감 15분 전까지 미리 신고하도록 제도를 바꾼 것이다. 물론 신고 후 반드시 매수하거나 매도할 이유는 없다.
“감히 금감원에 대든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지금부터 보여주지.”
오도욱이 서하나를 향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서하나는 그 미소 속에 숨어 있는 잔인한 속마음을 읽었다. 오도욱은 SJ 증권을, 나아가 그녀를 철저하게 파멸시킬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오도욱이 노트북 모니터를 그녀에게 향하게 했다.
“프로그램 매매 사전공시표를 잘 봐.”
모니터에 나타난 표에서 숫자가 급속도로 바뀌고 있었다. 사전공시 매도 총 수량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었다.
“현재 연기금을 운용하는 모든 증권사에서 비차익 프로그램 매매로 마감 동시호가에 매도 물량을 쏟아낼 거야. 그 양은 대략 20조. 과연 SJ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군.”
서하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20조라면 하루 주식거래량보다 2배 이상 많은 수준이다. 이것이 단 10분 만에 쏟아지면 그 누가 받아낼 수 있을까.
“이것만이 아냐. LTCM이 뿌리는 물량도 10조는 돼. 거기에다 각 증권사 고유계정에서 쏟아지는 매도 물량까지. 어때?”
그녀가 보고 있는 와중에도 사전공시 누적 매도 물량이 계속 증가했다. 계속 증가하던 숫자는 22조에서 멈추었다. 반면 사전공시 매수 물량은 불과 4천억.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건 이길 수 없어.’
서하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