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28
238. 공방전(1)
잠잠하던 주가가 갑자기 널 뛰며 폭락하기 시작했다.
유서준은 금방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원인은 프로그램 매매 사전공시. 무려 22조에 달하는 매도 물량이 예고되어 있었다.
프로그램 차익 물량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많은 수준. 그렇다면 공시된 물량은 프로그램 비차익 물량일 것이다. 증권사나 투신 계정에서 코스피 200종목 전부 또는 일부를 전략적 판단하에서 한방에 쏟아내는 물량이다.
당연히 그 주범도 생각났다. 바로 연기금. 연기금 운용을 대행하는 운용사에서 금감원의 명을 받아 수행하는 작업일 것이다.
유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금감원이 나라를 망치고 있구나.”
일개 기업인 SJ 금융그룹을 짓밟기 위해 외국 투기자본과 결탁하여 주식시장을 망가트리는 오도욱의 행태에 신물이 났다.
대체 이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오도욱과 이를 좋다고 수행하는 자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다.
저 22조를 마감 동시호가 직전에 공시하고 마감 10분 동안 집중해서 내놓는 방법과 지금처럼 사전에 공시해서 시장의 흐름을 살피는 방법이 있다.
지금처럼 미리 공시했다는 의미는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상대인 SJ 측에 빨리 항복하라는 선전포고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어느 진영에도 포함되지 아니한 일반 투자가에게 경고를 날림으로써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다.
역시나 공시가 뜬 다음부터 세력 균형이 붕괴됐다.
오늘은 하락이라고 확신한 투자자가 선물 매도와 풋옵션 매수에 동참했다. 선물과 주식 간의 지수 차인 베이시스가 벌어지면서 프로그램 매도가 유발되고 지수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오전에 +2% 수준에 머물던 종합주가지수가 순식간에 -4% 수준으로 떨어졌다.
정신없이 거래되는 선물과 옵션으로 거래소가 마비되지 않는 것이 다행일 지경.
“우려했던 바이긴 하지만…….”
오도욱이 연기금을 동원하리란 것은 짐작했던 바였다. 소문도 은근히 돌았고 실제로 유서준이 가장 염려했던 적의 수단이기도 했다. 단순히 SJ 투자은행과 LTCM의 세력 대결이라면 그리 밀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연기금이 얹히면 상황은 완전 다르다.
새우싸움에 고래가 등장한 격이라 할까.
주식 포털 사이트에 매도를 찬양하는 글이 폭주했다.
*
– 설사하냐? 죽죽 내려가네.
– 오늘 SJ 완전 작살나네.
– 만세! 벌써 풋으로 두 배 먹었다.
– 돈이 최고야. 돈 앞에 국가가 어딨음?
– 서하나 불쌍하다. 이러다 빤스까지 다 털리는 거 아닌지 몰라.
*
유서준이 사전에 기획했던 하락 방어는 하락을 우려한 일반인의 투매에 맥을 추지 못했다. 이래서 떨어지는 칼날은 잡지 말고 소낙비는 일단 피하라고 했던가.
사전공시가 뜨고 불과 15분 만에 +2%에서 -6%로 밀렸다. 다행히 -6%에서 1%가량 소폭 반등하며 장세가 출렁였다. 하지만 사실상 매수세는 실종된 상태에서 아래로는 쉽게 내려가고 위로는 힘겨운 고통스러운 장은 계속됐다.
오후 1시 40분경, 종합주가지수는 어제 대비 -6% 하락한 2218.62. 지수로는 대략 -150 포인트가 빠진 수치다.
유서준은 김현아가 계산했던 LTCM의 목표치를 다시 확인했다.
저들의 목표치는 어제 대비 -15% 하락한 지점인 지수 2000선이었다. 아직도 무려 -9%나 더 하락해야 한다.
시간 역시 2시간이나 남았으니 그보다 더 하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현재까지 발생한 SJ 금융그룹 전체 손실은 국외 외환 부문까지 합하여 -10조를 넘어설 것으로 예상됐다. 이대로 끝나더라도 그룹의 존립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들어선 것이다.
유서준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주식시장에 뛰어든 이후 지금처럼 코너에 몰려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는 항상 승리하는 쪽에 있었으니까 패자의 기분을 느끼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무려 10조란 돈이 걸렸음에도 그는 마음을 평정시키려고 애썼다. 아직 기회가 없다고 할 수 없었다. 그가 이리저리 깔아 놓은 여러 안배가 지금부터 차근차근 발동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전세를 역전시키기란 쉽지 않겠지만.
하락을 방어하느라 소진된 자금 동향 보고가 각 트레이더로부터 올라왔다. 유서준은 대충 확인하면서 다음 방어책을 구상했다.
지금까지 상대의 공세는 LTCM과 일반 투자가의 매도세일 뿐이다. 정작 연기금은 공시만 하고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이는 유서준 측도 마찬가지. 지금은 SJ 금융그룹의 방어력이 작동했을 뿐이다.
유서준은 자신의 금융자산을 주식과 선물 매매계정으로 이동시켰다. 일단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금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그의 개인 자산은 모두 28조. 그 가운데 이미 주식으로 들고 있는 자금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늘 당장 주식 매수에 동원할 수 있는 자산은 대략 10조로 추정되었다. 그는 이것을 모두 투입할 생각이었다.
“이것으로 연기금을 막을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연기금 물량을 한 개인이 받아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당사자인 유서준 역시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전화가 울렸다.
문득 유서준은 서하나 생각이 나서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명동 머니의 고동찬 대표였다. 전 대표였던 이영호가 은퇴하고 그 자리를 당시 팀장이었던 고동찬이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었다.
“어때?”
상황을 알고 있는 고동찬이 위로의 안부를 물어 왔다.
“일단 모든 걸 쏟아부어야죠.”
유서준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떨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목소리가 얼마나 떨려서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래, 그래야 서준이 답지. 상방으로 계속 밀어붙일 거지?”
“네. 지금 물러설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무조건 플러스로 돌릴 겁니다.”
유서준은 또렷하게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놀랍게도 고동찬이 흔쾌히 응원했다.
“좋아, 나도 도와줄게.”
“그러다 다칩니다. 피해서 있으세요.”
“내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도와? 내가 서하나 팬클럽 회장이잖아? 서 사장 도와야지. 파이팅이다!”
전화가 끊어졌다.
명동 머니가 얼마의 자금을 투입할 생각인지 모르지만 일단 고마웠다.
동시에 서하나가 생각났다.
“하나 누나는 어디 갔지?”
적군인 백나희 사장과 함께 외출했다는 것이 찜찜했다. 이미 시간은 점심을 두 번 먹고도 남았을 만큼 흘러있었다.
유서준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휴대폰은 꺼져있었다.
공교롭게도 만기일인 오늘 서하나가 사라졌다. 오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그녀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연락조차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유서준은 백나희 부사장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했다.
신호가 울리고 어떤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백 부사장님?”
저쪽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모양이었다.
“백 부사장님 아니신가요?”
“아, 오늘 저희 부사장님이 전화기 두고 나가셨어요.”
유서준은 실망하여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보니 슬금슬금 2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알지 못할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발생했던 납치 사건이 떠올랐다. 가도건설 사장 아들이라 했던가. 서하나를 납치하여 성폭행하려 한 어이 없던 사건.
어떤 확신이 왔다.
유서준은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
떨어지는 주가지수를 바라보며 서하나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오도욱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표정 변화를 구경했다.
“이제 실감이 되나?”
어떤 자에게 모니터의 수치는 게임머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저기 나오는 모든 숫자는 사실 현금이었다.
지수가 1% 떨어질 때마다 SJ 금융그룹의 손실 역시 1조씩 늘어나고 그 손실을 감당치 못하면 금융그룹 자체가 붕괴되고 말 것이다.
“SJ 투자은행이 비록 세계 최대은행이라 하지만 그렇더라도 연기금에 비할 바는 못되지. 거기에 비슷한 덩치의 LTCM마저 있잖아?”
박강수와 백나희 두 사람이 서하나를 보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SJ가 손실을 본 만큼 LTCM을 비롯하여 해솔 증권과 BH 증권은 이득을 보고 있을 테니까.
백나희가 킥킥거리며 놀렸다.
“킥킥, 서 사장, 잘못하면 오늘 증권사 문 닫을 거 같아. 지금 현재 우리 BH 증권이 이득 본 것만 무려 1조가 넘어. 창사 이래 최대 이익이야. 고마워.”
“우리 해솔 증권도 내일이 되면 대한민국 최대 증권사로 올라설 것 같습니다. 하하.”
서하나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 모두 빈정대는 표정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쥐를 앞에 둔 고양이가 저런 표정일까.
서하나는 모니터를 보며 걱정 어린 한숨을 쉬었다. 지금 지수는 -6% 부근에서 다시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연기금이 저렇게 누르겠다고 선언한 이상 지수 상승은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새파랗게 질려있는 서하나를 보며 오도욱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천하의 그 도도하던 서하나가 웬일이신가.”
오도욱의 매서운 눈이 서하나를 노려보았다.
“SJ 그룹을 살리고 싶은가?”
다시 경고성 메시지가 날아왔다.
서하나가 그를 향해 시선을 보내자 오도욱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살리고 싶다면 내가 방법을 알려주지.”
서하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그를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봤다.
오도욱이 소파에 편하게 몸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현재 상태라면 SJ는 공중분해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잘 알 거야. 귀 기울여 들어. SJ를 살리고 싶다면 여기 테이블 위로 올라가면 돼.”
오도욱이 유리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서하나는 이미 들었던 바가 있어 오도욱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챘다.
백나희와 박강수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아, 무슨 말인지 모르려나?”
오도욱이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백나희에게 손짓했다.
“백 부사장, 시범 보여줘.”
“네?”
백나희가 화들짝 놀라며 난감한 표정으로 오도욱을 바라봤다.
오도욱이 별일 아니란 투로 그녀를 재촉했다.
“뭐해?”
백나희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오늘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서하나가 제대로 깨지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SJ 증권이 파산하는 것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BH 증권을 소유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증권업계에서 항상 그녀의 앞에 서서 도도함을 유지하던 서하나의 수치스러운 현장을 목격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서, 박강수와 서하나가 있는 이 자리에서 테이블 위로 올라가 보라니.
백나희의 안색이 붉어지며 땀이 삐질삐질 맺혔다.
오도욱이 다시 호통쳤다.
“백 부사장이 가르쳐줘야 서 사장이 따라 할 거 아냐.”
‘젠장.’
백나희는 속으로 욕을 했다. 오도욱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감히 그녀가 거부할 성질이 아니었다.
백나희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입고 있던 모피코트를 벗었다.
진한 남색에 하늘색의 줄무늬가 사선으로 그려진 화려한 원피스가 드러났다.
“잘 봐.”
다소 적대감이 서린 음성으로 백나희가 투덜댔다.
조심스럽게 백나희가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힐을 신은 채.
서하나는 말로만 듣던 장면을 목격하게 되자 당황했다. 눈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랐다. 흡사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몸이 떨려왔다.
백나희가 테이블 위에 똑바로 섰다.
한눈에 보기에도 허벅지를 간신히 가리는 짧은 치마.
지금 서하나가 앉은 자리와는 약간 거리가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오도욱이나 박강수가 앉은 곳은 바로 옆이라 고개만 들면 치마 속이 훤히 보일 터였다.
역시나 두 사람이 위로 올려보며 낄낄거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오도욱이 손짓했다.
백나희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치마를 걷어 올렸다.
서하나는 연한 스타킹 속으로 보이는 붉은빛 팬티를 목격했다.
오도욱이 붉은색 속옷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아주 오래전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할 당시 그녀에게 전화로 붉은색 속옷을 입고 오라고 했던 사실이 기억났다.
서하나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