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36
246. 남태평양(2)
유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휴가를 오더라도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FRB 의장에게 신세 진 일이 없었다면 전화를 확 끊어버렸을 것이다.
그날 만기일 아침에 FRB 의장은 금리 인상 유보를 발표함으로써 유서준을 지원 사격해주었다. 어쨌든 그 발표는 투자심리를 호전시키고 적의 예봉을 꺾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F…… FRB 사무총장을 그곳으로 보낼까요?”
“아, 그렇게 해주시면 좋고요. 그럼 번거로우시더라도 서류 가지고 이곳으로 좀…… 부탁드립니다.”
“승인만 해주신다면야.”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유서준은 전화를 끊었다. 미국에도 새해 인사를 저렇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뭔 상관일까. 이제는 유서준의 말이 법이고 예절이다. 그가 저렇게 인사하면 상대도 저렇게 인사로 답해야 할 상황이니까.
어느새 자신은 세계 경제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한번 뜨면 전 은행 임원이 대기한다는 FRB 사무총장을 친히 이곳으로 보내겠단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세계 금리가 움직이고 행동 하나에 한 국가의 경제가 죽고 사는 그런 위치에 올라있었다.
유서준은 전화기를 한쪽으로 던지며 투덜거렸다.
“아아, 어쩔 수 없이 내일 서류를 살펴봐야 하나.”
예상보다 짧은 휴가가 될 모양이었다.
파티가 벌어졌던 장소를 가보니 먹다 남은 바비큐 잔해와 술병만 널려 있었다.
참여했던 지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없었다. 일부는 방 안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어두운 백사장 너머로 뿔뿔이 흩어져서 밀회를 즐기는 모양이었다.
유서준의 눈에 어둠 저편에서 백사장에 누워 장난치고 있는 두 여인이 들어왔다. 그와 구인혁의 딸인 유세라와 구은서였다.
두 딸은 나란히 백사장에 누워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젠 여고생 같은 감수성도 사라졌을 때이건만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음을 터트리고 서로 때리면서 난리법석이었다.
“저 둘은 청춘 그대로네. 저렇게 항상 붙어 있으면 지겹지도 않나? 쯧쯧, 시집은 언제 가려는지. 하기야 좋을 때긴 하다.”
오래전 유세라가 아빠 엄마와 계속 살 거라고 고집부리던 시절이 생각나 절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는 딸의 젊음이 부러웠다.
저 나이 때 서하나와 이런 곳에 여행이라도 다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때는 돈을 벌겠다는 일념 때문에 이런 삶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는 천천히 백사장을 걸었다.
어둠 속에서 먼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는 여인이 있었다.
김현아였다.
그는 김현아의 팔을 낚아채며 자신의 품에 끌어들였다.
“헉.”
김현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다가 유서준임을 확인하고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뭐해?”
“그냥 이것저것 생각해.”
김현아가 답변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서준도 그녀와 보조를 맞추며 함께 걸었다.
“이번에 정말 고마웠어.”
만기일 때 도와주었던 점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덕분에 나도 재밌었어.”
김현아의 음성은 밝았다.
문득 김현아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만기일 포지션 구성할 때 코스피 200지수 400에서 최대 수익이 발생하도록 짜달라고 했잖아? 그런데 정말 400에서 끝났어. 어떻게 된 거야?”
신기하게도 정말 유서준이 짐작했던 대로 만기일 종가가 결정됐다.
“넌 자주 그런 일이 있었어. 신기하게도 결정적인 순간을 정말 잘 맞추더라. 비법이 뭐야?”
김현아는 아직도 다이어리의 존재를 모른다.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번 만기일은 다이어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단지 유서준의 추측이었을 뿐이다.
유서준은 손바닥을 내보이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운이 좋았던 거지. LTCM이 마지막 10분 동안 공세를 중단한다면, 연기금 매물이 상당수 줄어든다면 그 위치까지 반등하지 않을까 생각했어. 우리 측 매수력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으니까.”
“상장사 자사주도?”
“그거 내가 전경련 모임에서 역설했던 거야. 그들이 그렇게까지 협조할 줄은 몰랐지만. 솔직히 외환위기에 빠지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곳이 기업이니까 협조하지 않을 수 없지.”
대답하면서도 유서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LTCM에서는 왜 마지막에 공세를 중단한 걸까. 연기금 비차익 매물은 왜 쏟아지지 않은 걸까.
“예은이 말로는 그날 네트워트 이상으로 실행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고…….”
유서준은 안다. 네트워크 이상 같은 그런 이유로 수십조의 손익이 바뀌지 않았음을. 분명히 이것은 송예은이 모종의 역할을 해준 덕분일 거다.
그는 아직 송예은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동안 LTCM과 SJ라는, 양쪽으로 떨어져서 대립했던 앙금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송예은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송예은이 그를 보기에 다소 껄끄러울 것으로 짐작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다.
“예은이를 데려와 줘서 고마워.”
유서준이 감사를 표했다.
김현아가 송예은을 이곳에 데려왔다. LTCM에서 쫓겨난 후 집에 틀어박혀 있던 그녀를 김현아가 달래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유서준이 그녀를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현아야, 고마워. 항상 내 옆에 있어 줘서.”
생각해보면 김현아는 유학 시절 잠시 떨어져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의 곁에 있어 주었다.
자연히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김현아 역시 그의 품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나도 고마워. 하나 언니 눈치 보느라 가까이 지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하나 누나는 현아라면 무조건 오케이야.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질투도 안 하던데 뭘.”
김현아도 그런 점을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더 부담되어 유서준을 가까이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전에 유서준과 사고 치지 않았을까.
“그렇긴 해. 하나 언니도 모든 걸 다 이야기해 주니까. 그 예술품 이야기까지. 킥킥.”
“응? 그런 것도 이야기해?”
“이미 오래전에 들었어. 생각해보면 미국 금융위기 즈음 이후로 하나 언니와 무척 가까워진 것 같아.”
유서준은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때라면 서하나가 마지막 다이어리를 보고 자신과 김현아의 인연을 알게 되었을 때다. 아마 그래서 김현아에 대해서만은 자신이 아내란 사실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김현아가 눈앞의 바다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 고백할 거 있다.”
“뭔데?”
유서준이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김현아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 나이아가라에 놀러 갔을 때 기억나?”
기억 못 할 리가 없다. 그날 유서준 역시 단둘이 여행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으니까.
“그날 서준이가 요구하면 다 들어줄 생각이었어. 각오하고 간 거였으니까.”
“예술품도?”
다소 장난기 어린 유서준의 반문에 김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언니처럼 몸매가 예쁘진 않아서 비너스는 어렵겠지만 비슷하게는 뭐…….”
“그럼 오늘은 안될까?”
“너 죽을래?”
김현아가 얼굴을 붉히며 유서준의 가슴을 툭툭 때렸다.
가끔 이렇게 둘이서 장난을 치곤 했다.
김현아가 입을 삐죽 내밀며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킥킥. 생각 있으면 오늘 밤에 와. 예술품이 문제겠냐.”
“좋아, 뱉은 말 다시 주워 담기 없기야.”
유서준이 곧바로 그녀를 잡으려고 팔을 휘저었다.
김현아가 혀를 날름거리며 도망쳤다. 말은 그렇게 해도 유서준이 오지 않으리란 것을 김현아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백사장을 뛰어가던 김현아가 발을 멈추었다.
“어? 예은이다.”
두 사람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송예은이 혼자 백사장에 앉아 파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유서준도 곧바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 실루엣으로 보이는 송예은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나, 예은이랑 잠시 이야기 좀 하고 갈게.”
김현아가 유서준에게 손을 저어 인사하고는 송예은에게 뛰어갔다.
유서준은 잠시 떨어진 채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래,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을 거야.”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
송예은은 밤바다를 보고 있었다.
처녀 시절 밤바다에 대한 낭만을 떠올려 본 적이 있었다. 연인과 함께 가슴 설레며 여름 바닷가를 거니는 그런 낭만 말이다.
그녀의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솔직히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끝났다.
어쩌다 인생이 이렇게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정말 재미가 없었다.
그냥 한 남자를 좋아했고, 그를 가지고 싶었고, 그러다 비슷한 남자를 찾아 떠났고, 그러다 더 방황해 버린 그런 인생이었다. 이젠 인생을 수확할 시기인데 수확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LTCM에서 빠져나온 것은 잘 한 거였어.”
그날 LTCM을 위해 마지막 행동 명령을 내리고 예정 매도 물량을 퍼부었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LTCM은 건재했겠지만 자신은 더 큰 괴로움에 빠지지 않았을까.
국가를 위기에 빠트렸다는 죄책감보다 좋아했던 한 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더 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단을 내리기 쉽게 해준 것이 바로 김현아에게서 온 편지였다.
“무슨 생각해?”
밝은 여인의 목소리에 송예은은 화들짝 놀라며 옆을 바라보았다.
김현아였다.
송예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 하고 있어요.”
김현아가 바로 옆에 붙어 앉았다.
“여기 오니 좋지 않아? 바다도 좋고……. 그 사람도 좋고…….”
송예은은 그 사람이란 말에 안색이 굳었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이 다시 저 멀리 수평선을 향했다.
칠흑처럼 어두컴컴한 바다 너머 불빛이 수평선 위로 몇몇 떠다니고 있었다.
“고마워. 만기일에 내 뜻을 따라주어서.”
김현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송예은은 만기일 직전에 받았던 김현아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 편지는 복잡한 경제나 주식과 파생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김현아와 유서준의 인생 스토리가 적혀 있었다. 김현아와 유서준이 어떻게 만났고 지금까지 어떻게 지내왔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비록 유서준의 마음은 담겨 있지 않았지만 김현아의 마음은 담겨 있었다.
송예은 역시 어렸을 때부터 유서준에게 김현아 이야기를 조금씩 들은 바가 있었고 최근에 두 사람 사이를 직접 목격한 바도 있었기에 그 내용에 조금의 거짓이 없음을 알았다.
그 편지에는 자신이 사랑했던 그 남자와 동일한 남자를 사랑하며 평생을 곁에서 머물렀던 한 여자의 인생이 담겨 있었다.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해버린 남자였기에 두 사람 모두 아쉬움과 괴로움만 남을 그런 처지였다. 그 편지를 본 이후 송예은은 김현아를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됐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의 괴로움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김현아에게 그 남자는 어떤 남자였을까. 한때 결혼까지 고민했던 남자, 그러다 약간의 어긋남이 영원한 이별을 낳았다. 그 이후 주변을 계속 맴돌며 때로는 약한 스킨십을 주고받는 사이마저 되었지만 결국 그 남자를 가질 수 없었다. 영원히 옆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지켜보아야 할 그런 남자가 됐다. 바로 앞에 있어도 가질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됐다.
송예은은 한때 김현아를 오해했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리먼 브러더스 인수 때 김현아와 유서준의 포옹 장면을 보고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둘이서 나이아가라 폭포로 여행을 떠난 것을 보며 그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고 미련 없이 LTCM에 몸을 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현아는 자신보다 훨씬 더 슬픔을 간직한 여인이었다. 그 마음의 고통을 어찌 모를까. 동시에 유서준에 대한 악감정도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서 여인이란 감정적인 동물이라고 했을까.
만기일에 번뇌를 거듭한 끝에 LTCM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고 그 여파 역시 엄청났지만, 그날 이후 마음은 편해졌다.
미련 없이 김현아의 권유에 따라 이곳 피지섬으로 따라올 수 있었던 이유기도 했다.
“그래도 참 좋네요.”
송예은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응?”
김현아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돌아갔다.
송예은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 부부를 지켜보는 것요. 욕심을 버리고 나니까 부부가 참 예쁘고 멋있게 보여요.”
김현아도 그렇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