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4
24. 내기의 승자(1)
유서준을 바라보는 박강수의 눈빛은 적의가 가득했다.
정작 유서준은 그가 왜 자신에게 적의를 보내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의 눈빛이 호의가 아니란 것은 분명히 알았다.
김현아 역시 그런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없도록 풀려고 노력했다.
“자, 건배해야지.”
김현아가 맥주잔을 들고 모두 잔을 부딪치기를 권했다.
500cc 생맥주잔은 꽤 크고 무거워 그녀는 인상을 썼다. 유서준은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머금으며 잔을 들고 호응했다. 박강수가 마지못해 잔을 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쨍!
잔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음이 울렸다.
“자, 내기에서 이긴 서준이를 축하하며!”
김현아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고마워.”
유서준은 그녀의 축하에 호응하며 박강수를 슬쩍 보았다. 박강수는 여전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서준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넌 축하 안 해줘? 내기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갖고 뚱하게 있냐?”
“내가 이길 수 있었는데…….”
박강수가 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 결과에 승복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김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수익률 150%와 6%는 너무 차이가 큰데?”
박강수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잠시 감정을 진정시키던 그가 말했다.
“최종 결과는 그렇지만 나에게도 기회가 있었어. 마지막 잡았던 그 작전주만 팔려고 했던 날 팔았으면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어. 그리고…….”
김현아가 고개를 저었다.
“작전주 쫓아다니면 결국 망가지게 되어 있어.”
“나도 알아. 하지만 확실한 정보라면 절대 망가지지 않아. 대회에서 우승할 정도의 비정상적인 수익률은 작전주 아니면 불가능하지. 서준이도 분명 작전주 정보가 있었을걸?”
박강수가 화가 난 눈으로 유서준을 노려보았다.
유서준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식시장에서 떠돌고 있는 정보로 투자하지 않는다. 단지 다이어리를 이용할 뿐이다.
김현아가 유서준의 편을 들었다.
“서준이는 아니라잖아. 내가 알기로 서준이는 증권가에 인맥도 없어. 그러니 정보를 들을 일도 없었어. 너랑은 경우가 다르단 말이야.”
박강수가 빈정대는 표정으로 피식거리며 웃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친척이 국내 주요 증권사, 투신사에 포진해 있는 박강수는 그런 유서준의 처지를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
“그리고 또 뭐?”
김현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박강수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리고 올 한해 주가 상승률이 가장 높았던 종목이 전북은행이야. 무려 565%나 돼. 이 종목은 내가 7월 초에 투자 종목을 선정할 때 고려했던 놈이야. 그때 이놈을 샀었다면 우승은 내 것이었어.”
“그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어.”
김현아가 반박했다.
곧바로 박강수가 그녀의 말을 되받아쳤다.
“아냐, 전북은행 말고도 있었어. 그때 건설주인 대림산업도 고민했었다고. 대림산업은 올해 주가 상승률 랭킹 5위 종목이야. 수익률이 무려 517%나 돼. 우리는 일 년이 아니라 6개월이었지만 그 반만 해도 그게 어디냐고. 당시 마지막으로 고려했던 종목 세 개 중 두 개가 그 두 놈이었는데 하필이면 허접한 놈을…….”
박강수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사실 주식시장에서 이런 식의 후회는 흔하다. 그때 그 종목을 샀었더라면, 그때 그 종목을 팔았었더라면.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단지 가정일 뿐이다. 상상 속의 매매에서 돈을 벌지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오늘 고민만 하고 실제 사지 않았던 종목이 내일 상한가를 치는 것이 바로 주식시장의 현실이다. 오늘 고민하다 샀던 종목이 하필이면 내일 하한가 치는 것 역시 현실이기도 하고.
유서준은 차분하게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가진 적의는 무엇에 연유한 것일까.
유서준이 볼 때 박강수는 꽤 놀라운 인재였다. 학교와 학과를 감안하면 당연하겠지만 실제로 접한 그는 꽤 샤프한 머리를 갖고 있었다. 미래에서 온 편지에도 박강수란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다. 박강수 역시 신선영과 마찬가지로 미래에 우리나라를 위기에 빠트릴 인물이었으니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지 않도록 유서준이 바꾸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의 박강수를 포기하고 있었다. 바로 박강수가 그를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유서준이 보는 박강수는 꽤 내면이 꼬인 인물이었다. 부유하게 자란 환경 탓인지 아니면 남들 위에서 군림하며 커온 탓인지 자신보다 못한 자를 무시하는 성향이 강했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비인기학과인 유서준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유서준이 강원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고는 더욱 심해졌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그의 태도가 자주 유서준에게 드러난다는 점이었다. 특히 유서준이 김현아와 함께 있을 때는 더욱 심해졌다. 김현아가 자신보다 못한 유서준에게 잘 대해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유서준은 처음 그와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김현아와 함께 있는 그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그 눈빛이 떠올랐다.
그제야 유서준은 그 원인을 깨달았다. 박강수가 김현아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였나? 그래서 내가 현아랑 가까이 있을 때마다 시비를 걸었었나?’
유서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박강수가 맥주를 다 마시고 다시 한잔을 더 시켰다. 그는 마른안주를 집어먹으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지지리도 운이 없었어. 다음에는 반드시 내가 이긴다. 아니다, 이런 후진국 증시에서는 똑똑하고 정당하게 매매하는 사람이 오히려 질 수밖에 없어. 차라리 선진국인 미국 증시라면 내가 확실하게 이겨줄 텐데.”
박강수는 술에 취했는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분간을 못 하는 듯했다.
아무리 국내 증시가 작전에 휘둘리는 관제증시라는 오명을 쓰고 있고 성격 급한 국민성 때문에 온탕 냉탕을 반복하는 냄비 증시라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렇게 대놓고 비난할 일은 아니었다. 자신도 이 나라를 살아가는 국민이 아닌가.
김현아 역시 표정이 살짝 변해 박강수를 노려보았다.
박강수가 콧방귀를 끼며 투덜거렸다.
“아직 국내 증시에 외국인이 직접 투자를 할 수 없어서 이 지경인 거야. 외국인이 들어오면 이런 후진국 증시는 외국인의 밥이 될 거다.”
“넌 그렇게 되어야 속이 시원하겠니?”
김현아가 날이 선 목소리로 반박했다.
문득 유서준의 머리에 떠오르는 다이어리의 내용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증시가 외국인에게 개방되는 자본시장 개방은 1992년 초에 이루어졌다. 그 이후부터 국내 증시에는 외국인의 선진 기법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92년 이후 외국인의 증시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고 외국인의 매매에 시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1997년 말 외환위기로 나타났다. 특히 90년대 후반부터 도입된 파생상품 시장은 외국인의 놀이터나 마찬가지였다.
‘아, 그래서 신선영 선배가……’
신선영의 매매기법은 아직 국내에서는 제대로 실행하는 자가 없는 선진 기법이었다. 막연히 하나의 돌파구로 느꼈던 그녀의 매매기법이 더욱 뚜렷하게 그에게 와 닿았다. 그가 먼 훗날 제 이의 외환위기를 극복하려면 국내에 안주하지 않고 선진 기법의 도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우수한 기법을 개발해야겠지.
유서준은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확실히 잡은 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박강수가 유서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쨌든 이번 내기는 내가 진 것 맞으니 그 대가로 오늘 맥줏값 내가 내면 되나? 아니면 다른 거 시킬 것 있어?”
유서준은 특별히 요구할 사항은 없었다.
“그렇게 해. 너희 둘이서 내면 되겠네.”
김현아도 맥줏값에 찬성했다.
박강수가 다시 맥주를 들이켜며 말했다.
“뭐, 이 정도는 내가 혼자서 다 내도록 하지.”
박강수의 눈이 김현아에게 머물렀다. 마치 데이트에서 남자가 밥값을 모두 내는 그런 눈빛이었다.
김현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박강수의 눈길이 다시 유서준을 향했다.
“어때? 한 번 더 내기할까?”
“어차피 내년에도 동아리 주식투자대회에 참가할 거잖아?”
김현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박강수의 목소리가 다소 커졌다.
“그건 당연한 거고. 난 지고 못 참으니까. 그거 말고 하나 더 내기하지.”
두 사람이 박강수를 바라보았다.
박강수가 눈을 반짝이며 제안했다.
“가장 단순한 내기. 각자 한 종목씩 정해서 내년 일 년 동안 가장 많이 오른 사람이 이기는 거다. 중간에 사고팔고 점검하고 이런 거 다 필요 없이 그냥 팍 찍어서 일 년 뒤에 보자 이거지. 과연 누구의 감이 가장 정확한가.”
김현아가 박수를 쳤다.
“그거 재미있겠다. 서준이가 주식 감이 엄청 좋다고 하던데.”
“좋기는 개뿔…….”
박강수가 피식 웃으며 빈정거렸다.
유서준은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이놈은 마음이 꼬일 대로 꼬였나 보다. 그렇다면 이 내기 또한 질 수 없었다. 그는 다이어리의 내용을 떠올렸다. 벌써 몇 차례나 반복해서 읽었었지만 세세한 기억이 약간 가물거렸다.
그는 다이어리에서 보았던 1988년에 가장 상승이 높았던 종목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1988년 증시를 트로이카 시대라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즉 주가 상승을 견인했던 종목은 무역, 건설, 금융 세 분야였다. 87년의 최대 상승이 금융이었다면 88년에 단연 돋보인 종목은 건설주였다.
유서준은 미간을 찡그리며 구체적인 종목을 떠올리려 애썼다.
박강수가 먼저 자신의 선택을 말했다.
“내가 먼저 선택하지. 88년은 올림픽의 해가 아니냐? 나는 대한항공을 선택하겠다. 외국인들의 발걸음이 늘어나면 당연히 항공주가 최고의 수혜를 입을 거야. 게다가 저유가는 항공주에 날개를 달아주겠지. 어떠냐?”
듣고 보니 나쁜 선택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물론 유서준 역시 대한항공이 1년간 얼마나 오를지 알 수 없었다. 다이어리에 언급된 바가 없었으니까.
“괜찮은 선택이네. 난 뭐로 할까?”
김현아 역시 한참을 고민했다. 마침내 그녀가 한 종목을 택했다.
“올림픽을 맞아 우리나라가 세계로 알려지면 수출이 비약적으로 성장할 거야. 그럼 당연히 무역주다. 무역주의 대표주인 삼성물산을 선택하겠어.”
유서준이 보기에 김현아의 선택 역시 나쁘지 않아 보였다.
“서준이 넌?”
김현아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생글거리며 물었다.
박강수가 피식 웃으며 마른 땅콩을 입에 까 넣었다. 유서준의 선택은 들어봐야 별 볼 일 없을 것이란 그런 태도였다.
유서준은 다이어리의 내용을 떠올렸다. 88년의 최대 상승 종목은 건설주였다. 과연 어떤 종목이었던가.
유서준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목을 축인 다음 말했다.
“나도 정하지. 감이 왔다. 삼익건설이다.”
유서준은 88년 상승률 랭킹이라고 적힌 다이어리 내용에서 삼익건설을 봤던 기억이 났다. 이 종목이 1위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상위 랭킹에 놓여있었다.
“그 종목을 선택한 이유는 뭐야?”
김현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올해의 트로이카 시대가 내년에도 유지될 것이란 생각에서야. 그렇게 보면 당연히 건설주 가운데 선택해야지.”
“넌 올림픽이랑 무관하구나.”
김현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박강수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이 자식은 꼭 그런 부실주만 고르는구나. 건설주를 골라도 부실한 2부 종목에 상대적으로 유명무실한 작은 기업만 고르는군. 하긴 그런 기업일수록 작전 한번 걸리면 무섭지.”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비꼬는 박강수의 말에 유서준은 심사가 다소 틀렸다.
“부실주든 뭐든 상승률 높은 종목 내기니까 당연히 이길 만한 것을 고르지.”
이 내기가 우량주를 고르는 시합도 아니었고 우량주라고 많이 상승하는 것도 아니기에 유서준은 전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자, 그럼 이긴 사람에게는 무엇을 해줄까?”
김현아가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박강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생각해보고.”
“그럼 나 화장실 다녀올 때까지 생각하고 있어.”
김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박강수가 유서준에게 말했다.
“지는 놈이 현아에게서 손을 떼는 거다.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