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6
26. 눈 속의 데이트(1)
[1988년 1월 4일]88년 주식시장이 개장되었다. 유서준은 계좌의 절반을 경남기업에 밀어 넣었다. 올해의 상승률 1위 종목, 그것도 500%나 되는 종목에 투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 방법도 연초에 사서 연말에 팔기만 하면 된다. 매우 단순했다. 만일 중간에 년 말 종가보다 더 높은 날이 있으면 그때 팔아치워도 되고.
그의 경남기업의 매수가는 2930원. 주식 수는 전체 자본금의 대략 2/3를 투입한 2000주였다. 모두 586만 원이 투입된 이 투자는 연말이 되면 3640만 원으로 불어날 것이다.
유서준에게 1월 초는 다소 바빴다. 기숙사를 나와 새로운 하숙집으로 이사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작은 용달차를 불러 자신의 짐과 구인혁의 짐을 옮겼다. 추운 날이었지만 그는 구인혁과 함께 추운 줄 모르고 일을 했다.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가 구인혁이었다. 약간 사차원인 구인혁의 성격 때문이겠지만.
새롭게 이사한 하숙집은 깨끗했다. 대략 10명가량의 학생이 하숙을 하는 평범한 하숙집이었다. 모두 같은 학교 남학생이었고 학년과 학과는 다양했다.
겉보기에 주인아주머니의 성품도 괜찮아 보였다. 짐을 정리하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서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이어리였다. 그는 다이어리를 상자에 넣어 조심스럽게 옮겨왔고 책꽂이 한쪽에 꽂아 놓았다. 별달리 눈에 띄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차피 방에 들어올 사람이 없기도 했다.
강세로 1988년을 출발한 주식시장은 1월 초에도 여지없이 붉은 꽃을 피웠다. 지난 연말의 상승이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유서준은 경남기업을 사고 남은 돈으로 몇 종목을 매매하여 어렵지 않게 수익을 챙겼다.
거의 두 달에 이르는 겨울방학 기간 중 가장 중요한 동아리 행사는 MT라 부르는 수련회였다.
1월 중순에는 동아리 겨울방학 수련회를 떠났다. 서울대는 천리포, 설악산, 지리산 세 곳에 교직원 및 학생을 위한 수련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미리 신청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방을 배정해주었다. 주식투자연구동아리가 선택한 곳은 지리산 피아골에 위치한 서울대 수련원이었다.
아침 9시 학교 정문을 떠난 임대 관광버스는 중간에 기흥에 있는 삼성 기술연구소에 들렀다.
명목은 기업탐방. 보통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기업의 분위기와 비전, 순익을 점검하기 위해 탐방을 벌였다. 주식투자연구회에서도 비슷한 명목으로 방학 기간에 한해 한두 기업을 방문했다.
서울대생이 기업 견학을 신청하면 대부분 기업은 환영했다. 졸업 후 우수한 인재가 입사할 수도 있다는 단순한 바람 때문이다. 방문을 받은 기업에서는 기업 브리핑은 물론 원하는 기업 시설을 보여주고 학생에게 선물까지 잔뜩 안겨 보내기도 한다.
주식투자연구회 측에서는 사전에 삼성그룹과 기업탐방에 대해 조율했다. 삼성그룹 측은 삼성투신 임원의 투자 강연과 더불어 기술연구소 및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견학을 제안했다. 여기에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자연농원(에버랜드) 자유 이용권이 덤으로 주어졌다.
강연을 맡은 사람은 나이가 약간 있어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그는 앞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강의를 했다.
유서준이 현직에 종사하는 펀드매니저의 강연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연 내용은 88년에 추진하고 있는 삼성증권의 증시 상장에 대한 것부터 시작하여 증권과 투신사의 전반적인 현황, 88년 주식시장의 흐름과 전략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 주식시장의 활황으로 관련 직종이 매우 유망하다는 내용이었다.
시장 예측은 그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보다 더 정확한 다이어리가 있었기에. 사실 증권사의 예측 역시 눈감고 헤엄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믿을 게 못 되었다. 주가는 신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니까.
강연 말미에 투자기술의 세계적인 흐름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총무인 신선영의 질문이 이어졌다. 대부분 학생은 금융공학 지식으로 무장한 그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서준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평소 그녀에게서 들었던 바가 있어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강연이 끝난 후 휴식시간이 되었다. 열띤 질문과 답을 주고받은 강연자와 신선영은 쉬는 시간에도 열띤 토론을 벌였다. 유서준은 호기심에 그들에게 다가갔다.
예상대로 두 사람의 대화 내용 주제는 컴퓨터 프로그램 자동매매와 매매 알고리즘을 짜고 실행하는 퀀트에 대한 것이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행하고 있지 않은 첨단 기법이다.
몇 분간 의견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 마침내 악수했다.
“신선영이라 했었지? 생각보다 대단한데?”
강사가 악수를 나누며 칭찬했다.
“과찬이세요.”
신선영이 웃으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학부를 마치면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선진 기법을 배우겠다고 했지? 나중에 국내로 다시 들어오면 우리 회사로 반드시 와. 우린 인재를 환영하니까.”
“받아주신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던 신선영이 옆에 유서준이 다가온 것을 보고는 인사를 시켰다.
“이 학생이 지난 동아리 투자대회에서 2등을 한 학생입니다. 본인 말로는 감각적으로 매매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도 감이 엄청 좋아요.”
강사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몇 학년이지?”
“일학년입니다. 이제 이학년 올라가죠.”
유서준은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일학년이 벌써 주식 매매라…… 대단한데?”
강사의 의아스러운 말에 신선영이 몇 마디 추가했다. 지난 하반기 유서준의 매매가 월간 단위로 한 번도 손실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과 누구보다도 열심히 투자 기법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전공이 이쪽인가?”
강사가 다시 질문했다.
유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철학과입니다.”
“특이하네.”
강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누구나 유서준을 처음 접하면 그렇게 보았다.
강사는 그의 투자 기법에 대해 몇 가지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다. 유서준은 적당히 꾸며대며 대답했다. 다이어리를 언급할 수는 없었으니까.
한참 설명을 듣던 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형적인 초심자의 운처럼 보이면서도 무려 반년 동안이나 수익이 난 것을 보면 신기해. 단순한 운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매수매도 타이밍을 정확하게 집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데 말이야.”
“서준이는 특히 주도주를 보는 눈이 탁월해요. 작년에 금융주가 오른다는 사실을 정확히 맞추었거든요.”
신선영이 그를 더욱 칭찬했다.
강사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하나 물어보자. 나랑 내기할까?”
“무슨 내기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유서준에게 강사가 질문을 던졌다.
“올해는 주도주가 무엇일까?”
“건설주요.”
유서준은 곧바로 대답했다.
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다. 그럼 건설주 중에서 어떤 종목이 오를까?”
“당연히 2부 종목 건설주죠. 작전이 많은 동네니까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유서준에게 강사 역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이 대단하구나.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종목이 오를까?”
잠시 유서준은 망설였다. 올해 랭킹 1위 종목은 경남기업이다. 그리고 박강수와의 내기에서는 랭킹 4위인 삼익건설을 찍었었다.
강사가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저라면 경남기업이나 삼익건설을 매수할 겁니다. 연말까지 팔지 않는 조건으로요.”
유서준의 자신 있는 모습에 강사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좋아, 그 감을 믿어보도록 하지. 만일 그 두 종목이 88년 상승률 랭킹 20위 안에 들어가면, 아니 하나라도 들어가면 소원을 하나 들어주마. 그럼 좋은 내기가 되겠지?”
“저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요?”
“있지. 네가 지면 거래 계좌를 우리 증권사로 옮겨라. 어려운 일 아니잖니?”
옆에서 지켜보던 신선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렇게 해서 고객을 한 명 더 확보하시는 거예요?”
강사가 웃음을 머금고는 유서준에게 물었다.
“네가 이기면 뭘 해줄까?”
유서준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삼성증권이나 투신에 신입사원 연수 프로그램 있죠?”
“매년 초에 있지. 그건 왜?”
“연수 프로그램에 한 달만 참여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세요.”
뜻밖의 요구였던지 강사가 한참 고민했다. 그의 권한으로 연수자 한 명을 추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유서준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건 왜?”
“증권회사 업무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서 그렇죠.”
“입사하면 저절로 하게 될 텐데…… 알았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강사가 흔쾌히 승낙했다. 강사가 그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삼성투신 전략투자기획부장 손달호라고 적혀있었다.
유서준은 훗날 연락할 일이 있을 것 같아 명함을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장기적인 계획을 봤을 때 유서준 그가 금융기관 업무를 경험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그런 경험 하나하나가 훗날 금융회사를 세우는 발판이 될 것이 분명했다.
삼성 기술연구소와 반도체 공장의 견학을 마친 동아리 회원들은 자연농원으로 몰려갔다. 각종 놀이시설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추운 날씨 탓에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일정 탓에 두 시간가량만 놀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유서준은 일학년 몇몇과 함께 롤러코스터를 탔다.
강원도 출신인 그는 사실 놀이기구를 타는 것이 처음이었다. 심하게 오르내리는 놀이시설을 타고 나니 속이 메스꺼워졌다. 신기하게도 김현아는 매우 재미있게 잘 탔다.
다음 차례는 놀이기구 바이킹. 커다란 배가 추처럼 오가며 움직이는 놀이기구였다. 그는 아무래도 놀이기구에 적응되지 않아 타는 것을 사양했다.
김현아가 실망하여 입을 삐죽거리더니 다른 학생과 바이킹을 타러 갔다. 유서준은 그녀가 바이킹을 타는 모습을 아래에서 지켜보았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녀의 옆에 박강수가 자리해서 나란히 앉아 타고 있었다. 그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학생들이 이리저리 다양한 놀이기구를 타고 노는 동안 놀이기구에 적응하지 못한 유서준은 구경만 했다.
혼자 멀뚱거리는 그가 안타까웠던지 김현아가 대관람차를 둘이서 탈 것을 제안했다. 커다란 물레방아처럼 생긴 원판 가장자리에 작은 관람차가 매달려 큰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고 있는 구조였다. 이곳에 있는 대부분 다른 놀이기구와 달리 매우 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놀이기구를 기피 하는 유서준도 가능했지만 반대로 다른 학생은 대관람차를 재미없다고 타지 않았다.
유서준은 흔쾌히 승낙했다.
유서준과 김현아는 대관람차를 탔다. 천천히 관람차가 위로 올라가며 주변 풍경을 관람했다. 여기저기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친구를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공 높은 곳에서 두 사람에게만 주어진 좁은 공간은 묘한 분위기를 불러왔다. 가끔 동아리 방에서 두 사람만 있었을 때도 있었고 지난번처럼 모임 후 기숙사로 돌아가면서 두 사람만 길을 걸었던 때도 있긴 했다. 둘이 있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야외로 놀러 나왔다는 기분이 분위기를 색다르게 만들었다.
초반에 창밖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관람차가 꼭대기 부근으로 올라가자 대화를 멈추었다.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자니 더욱 어색해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느낀 김현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이러고 있으니 데이트하는 기분이 나네.”
“처음인 것 같다 그지?”
유서준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김현아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응. 사실 내 자취방과 너희 하숙집이 그리 멀지 않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이런 데이트를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말야.”
“작년에 기숙사도 그리 멀지 않았었잖아.”
유서준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주 보고 있으려니 두 사람의 눈이 서로 얽혔다.
유서준이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손 잡을래?”
김현아가 말없이 그가 앉은 자리로 건너왔다. 두 사람은 좁은 관람차의 한쪽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장소가 비좁다 보니 두 사람의 몸이 많이 밀착되었다.
김현아가 손을 잡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너랑 같이 있으면 편하네.”
혹시 이거 고백인가? 유서준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마 지금이 둘이 가장 가깝게 밀착해 있는 시간일 것이다. 유서준은 이제야 정말 그녀가 자신의 여자 친구가 된 것 같아 가슴이 뛰었다.
그의 눈 바로 앞에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몸에 기댄 채 배시시 웃으며 올려다보는 모습이 귀여웠다. 키스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지만 일단 참으려고 애썼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표정은 매우 유혹적이었다.
문득 유서준은 다이어리에 있는 내용에 대해 의문점을 느꼈다. 다이어리에 적힌 기간은 2016년까지이므로 그의 나이 40대 후반까지다. 그런데도 그사이에 그가 결혼했다는 기록을 본 기억이 없었다. 미래의 그는 결혼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결혼을 했음에도 다이어리에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
사실 다이어리에 기록된 대부분 내용은 주식에 관련된 것이었다. 가끔 사건이나 가족 문제가 등장했다. 그 어느 곳에도 김현아에 대한 글은 없었다. 아니, 여자 친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었다. 그는 김현아를 보며 불안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