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7
27. 눈 속의 데이트(2)
지리산 피아골 수련원은 연곡사를 지나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피아골 계곡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 최신 시설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이 단체로 숙박하기에는 시설이 넓어 매우 좋았다. 수련원 바로 앞 계곡에는 겨울임에도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여름이었다면 꽤 많은 물이 흘렀을 만한 계곡이었다.
마침 며칠 전 내린 눈으로 지리산 전체가 하얗게 덮여 있어 겨울 정취 또한 매우 멋들어졌다.
일행은 가져온 짐을 수련원에 쌓아두고 2박 3일간의 일정을 짜고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노고단 등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련원 주변에서 일정을 진행했다. 일정의 절반은 주식에 대한 세미나였고 나머지 절반은 장기자랑을 겸한 오락이었다.
전체를 4개 조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식사준비를 했다. 안타깝게도 유서준은 김현아와 다른 조에 속했다. 다행이라면 박강수 역시 김현아와 다른 조란 것이었고 불행이라면 박강수가 그와 같은 조란 사실이었다.
“그래도 현아랑 강수가 같은 조인 것보다는 나으니까.”
유서준은 같은 조원과 임무를 수행했다.
첫날 저녁 식사준비는 유서준이 속한 조 담당이었다. 유서준은 이처럼 야외에서 밥을 지어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일을 했다. 다행히 조장인 3학년 여학생이 전체적인 지휘를 하고 개인별로 임무를 분담해주어 식사준비는 원활하게 돌아갔다.
일부는 쌀을 씻고 일부는 파를 다듬고 국을 끓일 준비를 했다. 나머지는 그릇과 수저를 씻었다. 요리에 별다른 재주가 없었던 유서준은 그릇을 씻는 일을 자청했다.
조원들이 각자 알아서 분담된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일부는 일없이 빈둥거렸다. 그 무리 속에 박강수가 끼어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옆에 있던 다른 학생에게 미루거나 시켰다. 박강수가 일학년 학년 장이었기에 대부분이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유서준은 박강수의 그런 행동을 보며 부잣집 아들이다 보니 평소에 일을 해보지 않은 탓이라 여겼다.
국을 준비하던 조장 여학생이 박강수에게 다가갔다.
“강수야, 아무래도 두부가 부족할 것 같다. 두부 세모만 사 오렴.”
조장이 품에서 지폐 한 장을 건넸다. 박강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디에서 파는지 모르는데요?”
“아마 마을 입구 쪽에 있을 거야. 거리가 좀 머네.”
박강수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그릇 씻는 것을 마무리하고 일어서는 유서준을 가리켰다.
“서준이 시키세요. 서준이가 일 끝났네요.”
조장 여학생이 안면을 찌푸렸다가 어쩔 수 없이 유서준을 불렀다.
“서준아, 두부 세모 사 와라.”
유서준은 조장 여학생과 박강수의 눈치를 보고는 곧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했다.
조장이 두부 파는 판매점의 위치를 상세하게 일러주었다.
그릇을 씻느라 쪼그리고 앉아있었던 유서준은 몸을 펴고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수련원을 나오니 계곡을 따라 이어진 좁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심어진 상록수 가지엔 눈꽃이 피었다. 눈이 내려 하얗게 변한 길은 매우 보기 좋았지만, 사람의 발자국으로 다져진 눈길은 미끄러워 보였다.
아래로 십여 분 내려가면 작은 시골의 판매점이 있다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유서준은 외투의 단추를 졸라맸다.
막 그가 수련원을 벗어나려 할 때 김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준아, 어디 가?”
다른 조에 속한 김현아는 자유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수련원 주위를 산책하다가 수련원을 벗어나려는 유서준을 발견한 것이다.
유서준이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두부 사러. 같이 갈래?”
“응, 같이 가자.”
김현아가 쪼르르 뛰어왔다. 추위로 살짝 붉어진 얼굴과 추위를 피하고자 하얀 머플러를 목에 두른 모습이 꽤 귀여웠다.
“길이 미끄럽네, 조심해야 해.”
유서준이 그녀에게 주의를 환기했다.
수련원이 멀어지는 순간 김현아는 곧바로 그의 팔짱을 꼈다. 유서준은 그녀가 다른 사람의 눈을 예전보다 덜 의식하는 것 같아 놀랐다.
유서준은 김현아와 함께 조심해서 눈길을 내려갔다. 다소 먼 길이긴 했지만, 김현아와 함께여서 오히려 짧게 느껴졌다.
그들 두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박강수였다. 그는 자신이 가지 않았음을 후회했다.
**
하얗게 눈이 쌓인 산길을 둘이서 걸어 내려가는 시간은 즐거웠다. 마치 이 세상이 새로운 빛에 물든 기분이랄까.
유서준은 기분이 좋았다.
김현아는 몸에는 하얀색의 두터운 외투, 목에는 하얀색 머플러, 머리에는 붉은색 빵모자, 손에는 하얀색 손 장갑을 꼈다. 두툼한 옷차림으로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것을 보니 주위의 하얀색 눈에 동화되어 흡사 하얀 곰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춥지 않네.”
김현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매일 시멘트로 둘러싼 도심의 빌딩만 보다가 눈 덮인 하얀 세상을 마주했으니 기분이 새로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마음껏 자연을 즐겼다. 기분이 들뜬 그녀는 발걸음 역시 평소와 달랐다.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걸렸다.
유서준은 그녀의 행동을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평소 어른처럼 사려 깊은 행동만 하던 그녀가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기쁨에 겨워 방방 뛰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었다.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던 그녀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털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눈이 뭉쳐졌다.
김현아가 뒤를 돌아 유서준을 보고는 활짝 웃음을 터트렸다. 곧바로 그를 향해 눈덩이를 던졌다.
퍽-
유서준의 어깨에 눈덩이가 떨어졌다.
“하하, 바보! 그것도 못 피하다니!”
김현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놀렸다.
유서준은 씩씩거리며 바닥의 눈을 뭉쳤다. 곧바로 그녀를 향해 눈을 던졌다.
김현아가 가볍게 옆으로 피했다. 물론 쉽게 피한 것은 그가 살살 던진 때문이기도 했다.
“하하, 바보! 던질 줄도 모르네.”
김현아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유서준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며 소리를 질렀다.
“크하하,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구나.”
그는 재빨리 눈을 뭉쳐 다시 그녀에게 던졌다. 뒤로 돌아 피하는 그녀의 등에 눈이 맞았다.
김현아가 눈을 뭉쳐 곧바로 반격했다.
그는 눈을 피하며 재차 그녀를 눈으로 공격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눈이 그녀에게 명중했다. 그녀의 머리에 눈이 맞았다. 물론 빵모자 위다.
“앗, 이젠 제대로 공격하네.”
김현아가 놀란 표정으로 눈을 흘기며 양손으로 눈을 뭉쳤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정신없이 눈을 던졌다. 대부분 눈은 두꺼운 외투에 맞았지만, 가끔 얼굴에 맞기도 했다.
얼굴에 눈을 맞은 김현아가 씩씩대며 소리쳤다.
“미워, 앞으로는 신사라고 절대 말하지 마.”
“나 신사 아냐. 한 마리 외로운 늑대지.”
유서준이 키득거리며 말을 받았다.
김현아가 그를 째려보면서 다가와 양손으로 눈을 마구 퍼부었다. 곧바로 유서준의 머리 위로 눈이 범벅되어 내렸다.
유서준은 그녀를 꽉 껴안았다. 잠시 버둥대던 그녀가 잠잠해졌다.
김현아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늑대가 맞았어.”
유서준은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두꺼운 외투에 둘러싸인 그녀였지만 그는 충분히 그녀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눈길 위에서 잠시 부둥켜안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김현아가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그만 가자.”
그녀가 유서준의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 그 역시 그녀의 옷과 빵모자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두 사람은 다시 자지러질 듯 웃음을 터트렸다.
유서준은 그녀와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즐거웠다.
목적지인 판매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곳에선 주변의 민박집에 투숙한 관광객을 대상으로 각종 잡다한 것을 팔았다.
“두부? 얼마나 줄까?”
판매점 주인아주머니가 물었다.
유서준은 당황했다. 두부는 맞는데 얼마나 사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으… 큰일 났다. 얼마나 사라고 했는지 양을 모르겠어.”
“그럴 줄 알았어. 나를 골릴 생각만 하니 그렇지. 잘 생각해봐.”
김현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보다 못한 주인아주머니가 물었다.
“용도가 뭐야? 국거리야 아니면 쪄서 두부김치 만들어 먹는 건가? 인원수는 얼마나 되고?”
“대충 서른 명가량 되어요.”
주인아주머니가 알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인원이 많네. 그럼 적당히 많이 사 가봐. 남으면 술안주로 먹고.”
유서준이 생각해보니 그것도 좋은 방법 같았다. 정 안되면 내일 또 두부로 반찬을 만들어도 되니까.
“그럼 많이 주세요.”
“알았다. 한판 주마. 너무 많으면 다시 가져오고.”
주인아주머니가 칼로 두부를 정사각형으로 잘랐다. 남아도 다시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리가 꽤 머니까. 돈도 부족해서 일단 개인 돈을 추가했다. 나중에 집행부에서 알아서 정산해 주리라 생각하면서.
생각보다 두부가 무거웠다. 두부 한판을 비닐봉지에 나누어 담았지만 무게가 만만찮았다.
김현아가 나누어 같이 들고 가겠다는 것을 유서준은 혼자 들 수 있다고 우겼다. 결국 중간쯤에 가서 엄청 후회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짐을 넘길 수는 없었다.
수련원에 도착했을 때 유서준은 조장 누나에게 엄청 깨졌다. 두부 세모가 두부 한판으로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바람에 동아리 회원 모두는 그날 두부 파티를 벌여야 했다. 저녁으로 먹는 것만으로는 다 먹을 수 없어 밤에 술안주까지 두부로 준비했다.
역시나 서울에서 먹는 두부와는 맛이 달랐다. 실제로 다른 것인지 아니면 기분 때문인지 그 이유는 아무도 몰랐지만.
**
첫날 저녁 식사 후 가장 중요한 행사는 총무인 신선영의 세미나였다. 주식투자대회에서 항상 일등을 도맡아 차지하는 그녀였기에 모두 그녀의 비법을 궁금해했다.
가장 큰 방에 모여 공부할 준비가 된 학생 다수를 앞에 두고 신선영이 강연을 시작했다.
그녀는 벽에 붙인 커다란 창호지에 매직으로 글자를 썼다.
‘Beat the Dealer!, 딜러를 이겨라!’
그녀가 쓴 글자의 의미가 궁금하여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신선영이 약간 상기된 음성으로 강연을 시작했다.
“라스베가스 도박장 아시죠?”
“네.”
학생들이 합창으로 응답했다.
“일반적으로 도박을 하면 패가망신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진리죠. ‘카지노에선 절대 돈을 벌 수 없으니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라고 선생님께 들었던 말을 의심했던 한 학생이 있었어요.”
“일류 도박사로 성장했겠네요.”
한 학생의 대답에 모두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신선영이 미소를 지으며 강연을 계속했다.
“도박에 관심이 많았던 그 학생은 훗날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물리학 석사, 수학 박사 학위를 받고 MIT에서 수학 교수를 역임한 에드워드 소프란 사람이죠. 말 그대로 천재 수학자죠.”
강의를 듣는 학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유서준 역시 정신을 집중했다. 주식 이야기에 수학자가 등장하는 것부터 특별했지만 그는 자신의 옆에서 구인혁이란 천재를 항상 보았던 덕에 천재라는 사람의 기이한 행각에 관심이 많았다.
“소프는 학창시절 항상 돈에 쪼들렸어요. 그러다 생각한 것이 카지노에서 돈을 딸 수만 있으면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결국 카드게임을 확률로 접근하는 연구를 시작했어요. 소프는 실제로 라스베가스에서 자신의 이론을 테스트했고 그의 조언을 받은 동료는 카지노의 블랙잭 게임에서 2만 달러를 따기도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신선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스스로 대답했다.
“볼 것 없죠. 카지노에서 쫓겨났어요.”
학생들의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왜 도박자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왜 천재 수학자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까요? 오늘 강연할 내용은 이 에드워드 소프의 이야기랍니다. 그는 일평생 무위험으로 최대의 수익을 구하는 방법을 연구했고 이것이 현재 미국 주식시장을 뒤흔들고 있는 무위험 차익거래의 시발점이 되었답니다.”
신선영의 강연 내용은 역시나 신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