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29
29. 눈 속의 데이트(4)
모두가 고민하고 있을 때 박강수가 나섰다.
“아줌마,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니죠?”
여자가 불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강수가 매정하게 말했다.
“그럼 일단 기다리고 계세요. 우리가 노고단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올 텐데 내려가면서 구조대에 알려드릴게요. 뭐, 그전에 내려가는 다른 사람 만나면 그 사람에게 부탁해 보시고요.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냥 여기서 앉아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붉은 모자 남자가 안면을 찌푸렸다. 그는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눈 위에 주저앉아서 몇 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얼어 죽을 만큼 추운 것도 아니잖아요.”
박강수가 단호하게 남자의 말을 끊었다.
붉은 모자 남자의 눈에 약간의 노기가 떠올랐다.
“젊은 친구들이…….”
박강수가 동호회 회원을 모으며 산 위를 가리켰다.
“자자, 우리도 바빠, 어서 가자. 빨리 갔다가 돌아오는 게 이분에게도 도움이 돼.”
박강수의 독려에 대부분 학생이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사태를 지켜보던 유서준이 끼어들었다.
“자, 그럼 너희들 먼저 올라가. 난 이분들 좀 봐 드리고 갈게.”
인상을 찌푸리는 박강수를 무시하고 유서준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입구까지 모셔다드리면 되는 거예요?”
붉은 모자 남자가 손을 저었다.
“그냥 구조대만 불러주면 고맙겠네.”
유서준이 잠시 생각하다가 주저앉은 여자 앞에 몸을 낮추며 등을 돌렸다.
“업히세요. 제가 업고 내려가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일 것 같아요.”
“학생, 먼 길인데 업을 수 있겠어?”
여자의 걱정스러운 말투가 뒤에서 들려왔다.
유서준은 곧바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제 체격을 보세요. 충분합니다. 편하게 모실게요.”
붉은 모자 남자의 의사를 묻던 여자가 유서준의 등에 업혔다.
유서준은 조심스럽게 여자를 업고 일어났다. 생각보다 그리 무겁지 않았다. 그는 남자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충분할 것 같습니다. 함께 아래까지 내려가죠.”
붉은 모자 남자가 유서준에게 고맙다는 뜻을 표했다.
박강수가 유서준을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서준이 혼자 고생 좀 해라. 우리는 다시 올라간다.”
박강수가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유서준은 붉은 모자 남자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도 갈까요?”
유서준이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막 떠나려는 찰나 김현아가 그에게 붙었다.
“서준아 나도 같이 갈게.”
유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유서준은 여자를 업은 상태로 앞장섰다. 그의 좌우로 붉은 모자 남자와 김현아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학생이 듬직하네.”
그의 등에 업힌 여자가 중얼거렸다.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은 매우 만족한 모양이었다. 염려하며 불안해하던 표정이 싹 사라졌다.
유서준과 김현아가 길을 내려가는 것을 본 박강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매서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노려보며 박강수가 중얼거렸다.
“요즘 들어 저 둘이 유난히 자주 붙어 다니네.”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설마 서준이 저 자식이 지난번 내기에서 이긴 걸 가지고 현아에게 키스를 요구한 것 아냐?”
박강수가 의문의 눈길을 보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
“힘들지 않나?”
한참을 걸어 내려갔을 때 붉은 모자 남자가 물었다.
“아직 괜찮습니다. 제가 좀 건강하거든요.”
유서준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서준의 입장에서는 박강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데다 김현아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더 기뻤다.
“그래도 잠시 쉬지?”
붉은 모자 남자가 염려스러운 음성으로 제안했다.
그들은 길가 한쪽에 우뚝 선 바위에 걸터앉았다.
땀을 훔치며 숨을 고르는 유서준을 향해 남자가 다시 감사를 표했다.
붉은 모자 남자가 물었다.
“어디 학생인가?”
김현아가 대신 대답했다.
“저희는 서울대 주식투자연구회 회원입니다.”
“주식투자?”
붉은 모자 남자가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김현아가 반대로 물었다.
“혹시 주식투자 하세요?”
붉은 모자 남자가 대답 대신 나지막하게 신음을 삼켰다.
남자의 반응에 유서준은 그가 주식투자를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모두가 주식투자를 하나?”
붉은 모자 남자가 다시 물었다.
김현아가 고개를 저었다.
“모두는 아니어요. 대부분 졸업 후 금융사에 취업하기 위해 공부하려 가입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단순히 주식으로 돈을 불리기 위해 가입한 학생도 있어요.”
붉은 모자 사내는 흥미가 동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재차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 수익은 높아?”
“요즘 활황장이잖아요.”
김현아가 대답했다. 사실 요즘 손해 보는 투자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남자가 유서준을 주시하며 말을 건넸다.
“자네도 나중에 금융사 취업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저는 금융사를 만들 생각입니다. 꿈은 크게 가져야죠.”
유서준이 호기롭게 말했다.
남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칭찬했다.
“대단하구나. 그래,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남자가 유서준이 마음에 드는 표정으로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그가 품속에서 작은 명함을 하나 꺼냈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간략하게 이름만 적힌 명함이었다.
“자, 이거 받아. 나중에 생각나면 연락하게.”
유서준은 명함을 읽어보았다.
“명동머니 대표 이영호……?”
유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현아가 명함을 건네받아 확인하고는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회사여요?”
“하하, 대부업체다.”
붉은 모자 남자 이영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김현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흰 대학생이라 돈 빌릴 일은 없어요. 게다가 서준이는 주식투자로 엄청 벌어요. 아마 빌릴 일은 없을걸요?”
남자 이영호가 유서준을 놀랍다는 표정으로 한차례 훑었다.
“이름이 서준인가 보네? 잘 챙겨둬라. 너네보고 돈 빌리라는 말이 아니다. 갈 곳 없어지면 오라는 이야기지. 게다가 원래 돈이란 많을수록 더 빌리는 법이다.”
유서준은 어쩔 수 없이 명함을 품속에 넣었다. 사회적으로 대부업체의 인식이 안 좋은 데다 대부업체 직원이라 하면 조폭 조직이 연상되었다.
이영호 역시 유서준의 속마음을 알아챈 탓일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이제 다시 떠나지. 나중에 심심하면 구경 와 봐. 재미있을 거야. 명동머니는 일반 사람은 몰라. 하지만 큰 금융회사라면 모르는 자 없을 게다.”
무슨 의미인지 유서준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대부업체를 갈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아마 구경 갈 일도 없지 않을까.
눈길을 걷다가 쉬다가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다소 친해진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부분이 최근에 들어선 6공화국 노태우 정부 이야기였고 가끔 주식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명동머니 대표인 이영호는 주식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단지 유서준과 김현아의 시장 브리핑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사람의 식견을 감탄하는 눈치였다.
산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뛰어왔다. 검은색 양복을 단정하게 입은 청년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조폭처럼 보이는데 날씬한 몸매와 말쑥한 얼굴은 조폭과 정반대였다.
이영호가 손을 흔들었다.
“저기 김기사가 오네.”
유서준은 이영호 부부에게 꾸벅 인사했다.
두 부부는 유서준과 김현아에게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승용차를 타고 떠나는 그들을 향해 유서준은 손을 흔들었다.
이제 유서준과 김현아 둘만 남았다.
“자, 이제 우리는 뭐할까?”
유서준의 물음에 김현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숙소로 가서 애들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설마 지금 노고단으로 올라가려고?”
“당연히 아니지.”
어쨌든 단둘이서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
둘째 날인 마지막 날 밤은 모든 대학생 MT나 수련회가 그렇듯이 술판이 벌어졌다.
낮에 등산하여 몸이 고단한데도 불구하고 모두 체력 하나는 끝내줬다. 역시 젊다는 것이 가장 큰 밑천이다.
한쪽 무리는 모여서 게임을 했다. 그들의 앞에는 소주와 맥주병이 즐비했다.
다른 한쪽에는 인생에 대한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거기에도 마찬가지로 술병이 굴렀다.
유서준은 신선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신선영 주변에는 대여섯 명이 모여 있었다. 모두 학구적인 학생들이다.
가볍게 맥주잔을 기울이며 신선영이 이런저런 매매기법을 털어놓았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분야인지라 유서준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어제 말했던 소프란 사람 있잖아?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것은 주식시장을 이기는 거였어. 그것도 무위험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중에는 시장을 이기려고 노력한 사람이 많아. 사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도 시장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수익을 내려는 것이고.”
흥미로운 그녀의 말이 시작되었다.
“내가 추구하는 바도 비슷해.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뮤얼슨이란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MIT 경제학 교수야. 노벨 경제학상도 받았지. 이 사람도 한때 랜덤워크 이론에 기초한 무위험 차익거래를 연구했었지. 그의 제자로 이루어진 계파가 모두 그쪽에 관심을 두고 있어.”
유서준에게 그녀의 말은 신세계였다. 그로서는 아직 이해하기 힘든 수준.
“그 핵심은 워런트와 옵션의 가격모델이고. 소프가 워런트 가격모델의 기초를 제시했지. 옵션의 가격모델은 피셔 블랙과 마이런 숄츠가 만들었어. 이들의 이론을 파고들면 무위험 차익거래가 가능해.”
역시나 어려웠다. 어떤 학생이 질문했다.
“누나, 워런트가 뭐죠?”
“아, 그건 주식 인수 권리 증서란 거야. 아직 우리나라에선 도입되지 않았어.”
유서준은 다이어리에서 워런트가 우리나라에서 2010년대 들어 한동안 유행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래의 대한민국에서는 저런 상품이 모두 가능한 모양이었다.
신선영이 이런저런 설명을 계속했지만, 아직 유서준의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추종하는 그런 사람이 있거나 졸업한 곳은 MIT와 하버드 경제학부야. 나는 학부를 마치고 그 밑으로 유학 가고 싶어. 그곳에서 수학과 경제를 융합한 금융공학을 꽃피우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로 보아 한순간의 외침이 아니라 평소의 신념처럼 보였다.
신선영의 감정이 다소 격해져 소주잔을 들이켰다.
유서준은 전후 사정을 대충 짐작 가능했다. 왜 신선영이란 이름이 지금부터 약 40년 후 발생한 제 이의 외환위기에서 LTCM의 그 역적 명단에 들어있는지.
아마 신선영은 서울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외국 유학의 길에 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겠지. 그다음 순서로 그녀가 추구하는 차익거래와 관련된 미국계 금융회사에 취업했을 것이다. 그곳에서 자리 잡은 다음 먼 훗날 이곳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헤지펀드의 운용자가 되었을 것이다.
유서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훗날 LTCM의 소속이 될 그 5명이 그런 짓을 하지 않게 만드는 것 역시 그가 해야 할 일이다. 아니 적어도 LTCM에 입사하는 것을 방해해야 한다.
신선영이 외국으로 유학 가지 못하게 해야 할까? 하지만 어떻게?
유서준은 곧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신선영이 유학 가서 그곳에서 선진기법을 배우게 한 다음 다시 국내로 돌아오게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LTCM으로 입사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로 돌아온 그녀가 자신이 설립한 SJ 금융투자에 입사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볼 때 그녀는 대단히 뛰어난 재원이다. 거기에다 보다 나은 학문이나 기법을 쉽게 받아들일 만큼 열린 사상을 가졌다. 훗날 그를 도와줄 최적의 인물이었다.
유서준은 머릿속에서 신선영의 미래를 이리저리 재단해보았다. 역시 가장 좋은 것은 그녀를 자신의 아군으로 만들어 함께 하는 그림이었다.
술잔을 기울이는 그녀를 멀찌감치 바라보며 유서준은 결의를 다졌다. 먼 훗날의 일이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