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35
35. 올림픽의 해(4)
유서준도 대답하지 못했다.
확실히 예뻤다. 그녀는 하늘색 바탕에 흰 동그라미가 그려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옷감이 가볍고 발랄해 보였다. 아마도 봄이 완연해지는 4월은 되어야 입을법하지 않을까.
그를 당황하게 만든 것은 치마 길이였다. 약간 펑퍼짐하게 아래로 펼쳐진 하늘색 치마는 매우 짧았다. 일반적인 미니스커트라 보기에도 과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짧은 느낌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치마 길이가 매우 아슬아슬했다. 스타킹도 신지 않은 그녀의 뽀얀 허벅지와 매끈한 다리가 고스란히 눈앞에 드러나 있었다. 갑자기 야릇한 기분이 확 올라왔다.
송예은이 올라간 치맛자락을 손으로 내리며 물었다.
“흐음? 괜찮아요?”
“예뻐.”
“헤, 그럼 이걸로 할래요.”
송예은이 부끄러운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다소 치마가 아주 짧아 보였지만 본인이 입겠다는데 그가 말릴 수는 없었다.
값을 치르고 매장을 벗어나면서 송예은이 속삭였다.
“저도 짧은 거 하나 입고 싶었거든요. 아마도 엄마는 안 사줄 것 같아서, 히히.”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저런 기분을 느끼는 것이 이해됐다. 엄격하게 교복 치마 길이를 검사하는 그런 학교에 다녔으니까.
두 사람은 백화점을 빠져나와 팔짱을 끼고 길을 걸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주위를 오가는 사람이 많았다.
추운 날씨 덕에 송예은이 그의 옆구리에 바짝 붙었다.
유서준은 그녀의 행동에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운 아이다.
주변에 전자오락실이 있어 함께 들어갔다.
버블버블이란 오락 게임을 페어로 진행했다. 귀여운 캐릭터가 물방울을 내뿜으면서 몬스터를 죽이고 과일을 먹어치우는 게임이다. 배경음악이 매우 흥겨웠다.
당연히 송예은보다는 유서준이 게임을 더 잘했다. 중간에 송예은의 캐릭이 죽어서 몇 번이고 동전을 더 넣었다.
“샘, 진짜 잘 하시네요?”
송예은이 못 당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서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선물 때문에 약간의 돈을 쓰긴 했지만, 오늘 받은 보너스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쇼핑과 선물 역시 사전에 나름 계획한 일이었다.
어쨌든 송예은은 미래에서 온 편지에 언급된 중요 인물이었고 그는 그녀가 LTCM에 들어가 국가를 배신하는 일을 막아야 했다. 그녀와 친분을 쌓아둘수록 언젠가는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녀 정도의 외모와 귀여움이라면 훗날 배우자로 맞아도 아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그의 마음도 설렜다. 동시에 김현아의 얼굴도 떠오르긴 했다.
**
[1988년 12월 30일]일 년을 마감하는 바로 전날, 유서준, 김현아, 박강수 세 사람은 신림동의 작은 맥줏집에서 만났다.
일 년 전에 했던 내기를 결산하는 자리였다. 종목을 각자 하나씩 찍어 일 년 후에 그 수익률을 비교하는 내기를 했었다. 표면적으로는 맥줏값을 부담하는 내기였지만 유서준과 박강수 사이에는 더욱 중요한 것이 걸려 있었다. 바로 이긴 사람이 김현아와 사귈 권리였다. 아니 지는 사람이 김현아에게서 손을 떼는 의무였다. 당사자인 김현아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세 사람은 오징어 안주를 씹으면서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켰다.
“자, 우리도 이제 결산할까?”
유서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
박강수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그는 내심 분통을 참는 모습이었다.
유서준이 선택한 삼익건설은 개장일인 1월 4일 종가대비 무려 238%가 올랐다. 박강수가 골랐던 대한항공은 70%였다. 김현아가 고른 삼성물산은 72%가 올랐다. 삼익건설은 폭등이었지만 대한항공이나 삼성물산은 주가지수의 연간 상승률이 72%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평균이나 마찬가지였다.
결산을 마친 김현아가 박수로 환호했다.
“서준이 너 정말 대단한데?”
그가 고른 종목의 놀라운 수익률에 그녀가 감탄을 거듭했다.
유서준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을 뿐이었다.
“정말 주식 감각이란 게 있나 봐. 서준이는 그게 특별한 거 같아. 반면 나랑 강수는 고른 종목이 뭐…… 시장 평균이랑 같잖아? 한마디로 감이 없는 거지.”
김현아가 투덜대며 맥주를 마셨다.
박강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처참한 성적이 할 말을 없게 만들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맥주를 들이켰다.
유서준은 맥주를 마시면서 박강수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눈빛으로 물었다.
‘졌으니 현아에게서 손을 떼지?’
그의 물음을 알아들었는지 박강수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강수가 뿔테 안경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박강수의 입장에선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먼저 유서준에게 도발한 상태에서 변명할 건더기도 없었다.
일단 지금은 김현아를 포기하겠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올 기회를 노릴 생각이었다.
당장 김현아와의 사귐 문제보다 그를 더 괴롭히는 것은 유서준과의 거듭된 경쟁에서 번번이 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작년 연말에는 작전주를 잘못 건드려서 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여름에 격차가 다소 좁혀지는가 싶더니 연말 하반기 대회에서는 올림픽 이후 장세를 잘못 예측하는 바람에 격차가 엄청 벌어지며 망가졌다. 거기에다 종목 찍기에서도 완패했다. 유서준이 찍은 종목이 설사 운이었다고 쳐도 자신이 찍은 종목은 너무 평범했다.
한 번이라면 운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거듭된 결과는 운이 아니라 실력이란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이 보잘것없다는 반성과 함께 유서준의 실력이 자신의 예상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고 유서준의 실력을 본인보다 높이 평가할 생각은 없었다. 경제를 전공하지도 않은 변변찮은 놈이 그렇게 잘 할 리가 없다. 결국 그는 유서준의 연이은 승리를 후진국 스타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내 증시 환경으로 돌렸다.
박강수는 92년으로 예정된 자본자유화 계획을 떠올렸다. 그때가 되면 선진 기법으로 무장한 외국인이 국내에 몰려올 것이다. 부실 저가주에 인기로 승부가 갈리는 미개한 주식시장은 그때가 되면 안녕이다.
‘몇 년 후면 네놈은 명함도 못 내밀어. 제대로 알고 투자해야지. 단지 감각으로 투자하는 시대는 끝나거든.’
박강수는 자신의 앞날을 그렸다. 금융 방면으로 뛰어들겠다고 결심한 이상 자신도 선진 기법을 배워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신선영이 밝혔던 유학계획도 자극이 되었다. 박강수도 그쪽에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름 자신의 앞날을 계획 세운 박강수는 기분이 풀어지자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새로운 제안을 떠올렸다.
“이번에는 내가 완전히 망가졌지만, 앞으로는 자신 있다. 한 번 더 내기할까?”
유서준이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가운데 김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판판이 깨졌잖아? 서준이는 진짜 재능을 타고난 것 같아. 난 다시 하고 싶지 않아.”
박강수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년 동안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이 바닥 생리도 파악했어. 이제는 자신 있다.”
그런 말을 일 년 전에도 들었던 것 같지만 유서준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공부한 거야 너만이 아니고 나랑 서준이도 했어. 어째 표정을 보니 오늘은 진짜 자신 있는 모양인데?”
김현아가 살짝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박강수가 유서준을 노려보며 물었다.
“다음 상반기 투자대회도 내기하기로 하자. 어때?”
유서준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뭘 내기할까? 맥줏값은 이제 지치고 다른 것으로는 할 만한 게 없는데?”
“진 사람이 하루 동아리 회식 전체 비용을 부담하기로 하지. 어때?”
곧바로 치고 들어오는 박강수의 태도를 보니 이번에는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유서준은 속으로 불쌍한 놈이라며 혀를 찼다.
유서준이 슬그머니 그의 성질을 건드렸다.
“자신 있다면 좀 다르게 해볼까? 두 사람 수익률 차이만큼 동아리에 기부하는 것으로.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수익률이 80%, 다른 사람이 50%라면 그 차이인 30만 원 만큼 내는 거지.”
지금과는 약간 다른 내기였다. 금액이 정해지지 않은 내기.
박강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수락했다. 적어도 이번에 무리하지 않으면 막판에 망가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이가 크게 날 일은 없을 테니까. 어쨌든 그는 진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여전히 그에게 유서준의 승리는 단순한 우연에 불과했다.
유서준은 그의 태도를 보고 내심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에는 엄청나게 깨준다. 나도 누구나 기억할 사고 한 번 쳐보자.’
다음 해인 89년 상반기는 우리나라의 주가지수가 처음으로 1000을 돌파하는 시점이다. 그 이후부터는 긴 하락으로 접어든다.
유서준은 자신의 인생 설계에서 이 암흑기 동안 군대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다음 상반기는 군대 가기 전 동아리 활동을 하는 마지막 학기다. 다른 사람에게 오랜 기간 회자할 수익률을 기록해보고 싶었다.
나아가 그가 높은 수익률을 기록할수록 박강수의 부담이 커질 그런 내기를 계획했다. 자꾸 도발해오면 그 실력 차를 확실히 보여주어 앞으로는 절대 도발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망가트려야 한다. 그는 동아리 역사에 길이 남을 수익률을 기록할 생각이었다. 압도적인 차이가 바로 그가 노리는 것이었다.
다시 내기가 성립되고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던 그들은 시간이 늦어지자 자리를 파했다.
맥줏값 계산은 당연히 박강수가 했다. 하반기 주식투자대회에서 졌으니까.
부잣집 출신인 박강수에게 이런 계산은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그의 용돈 범위에서도 거의 흔적이 남지 않을 그런 비용이었다.
계산을 치르는 박강수를 슬쩍 보고 지나가며 유서준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과연 다음 내기에서도 그렇게 여유만만하게 돈을 낼 수 있을까?’
박강수를 보내고 유서준은 김현아와 동네 유흥가를 걸었다.
예전이라면 기숙사로 가는 낙성대 길을 함께 걸었겠지만, 지금은 하숙집이 있는 신림동 동네를 배회했다.
연말인 만큼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밤이 늦었음에도 술집에서는 사람들이 많았다. 3저 호황으로 인한 경기가 좋은 만큼 분위기가 들떠 있었다. 아마 그중에서도 주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적어도 누구나 88년의 수익률은 최고였을 테니까.
하지만 내년은 어떻게 될까? 주가지수가 1000을 찍은 이후부터 하락을 탄다. 주식 암흑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경기가 하강하면 지금처럼 흥청망청 분위기를 타는 연말은 힘들어질 것이다.
아니, 이 정도는 사실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약 10년 후인 90년대 말 즈음에 도래하는 외환위기 때는 그야말로 죽음일 것이다. 원화 절하와 주가 하락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고통을 받는다.
물론 유서준도 겪어보지 않았기에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단지 다이어리에서 본 내용으로 짐작만 할 뿐. 그리고 2027년에 맞이할 두 번째 외환위기는 더 큰 고통을 이 사회에 드리울 것이다.
반짝거리는 거리의 네온사인 사이로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사귀기로 약속한 지 벌써 일 년. 그동안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김현아는 항상 이성 친구인 유서준을 많이 신경 써 주고 챙겨주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남들은 100일을 넘기지 않는다는 그 흔한 키스도 아직 두 사람은 하지 못했다.
가끔 유서준은 오늘은 꼭 키스를 해보겠다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거나 다른 일이 생겼다. 어쨌든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증거는 손을 잡고 걷는 것과 가벼운 포옹이 전부였다.
유서준은 계획대로 다음 학기 기말고사를 마치고 89년 6월 말에 입대를 한다면 91년 말이 되어야 다시 사회로 복귀한다. 정확히 30개월을 군 복무로 보낸다. 그가 돌아올 92년 초부터 국내 자본시장은 외국인에게 개방되어 새로운 시대가 열릴 예정이다.
그 사이 암흑기는 군대에서 보내기에 가장 좋은 시기다. 주식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은행에 묻어두는 것이 남는 시기이니까.
지금부터 2년 반 후라면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김현아는 졸업하지 않았을까. 그녀가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학교에 계속 남아 있다면 그와는 복학 후에도 인연이 이어지겠지만 그녀가 유학을 가거나 취업을 한다면 인연을 지속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유서준은 티를 내지 않았다. 아직 남은 6개월의 기간이나마 서로 간에 뜻깊은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그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김현아는 그의 행동에 고개만 갸웃거렸다.
연말에 유서준은 다이어리에 자산 총액을 써넣었다. 88년은 그에게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준 해였다.
*
1988년 12월 31일, 총자산 4507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