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39
39. 1000 고점을 찍고(2)
4월 2일 장중 최고가인 1015.75를 찍은 종합주가지수는 이후 내리막을 걸었다.
4월 말에는 전달 대비 -6%가 빠진 940.54를 기록했다. 고점 대비 다소 많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두가 다음 달에는 오를 것이라 믿었다. 최근 상승기 동안 두 달 연속해서 하락한 경우는 사실상 없었으니까. 상승에 길들여진 심리는 역시나 무서웠다.
모두의 바람과 무관하게 5월에는 -0.8%로 미세한 하락과 함께 횡보 장세를 이어갔다.
상승해야 하는 시점에 상승하지 못한다면 뭔가 문제가 있다는 신호였다. 경험 많은 큰손은 빠져나가기 시작했지만, 초보자는 싸게 살 기회라며 오히려 더 많은 자금을 투입했다.
투자자는 6월을 기대했다. 하지만 6월에 접어들자마자 다시 폭락세가 시작되었고 중순을 지나면서 결국 주가지수 900선마저 무너졌다. 고점에 시작했던 투자자는 거의 사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증권사 객장에는 주가 하락을 항의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가끔 전광판이 깨지고 유리창에 금이 갔다는 소식도 들렸다.
“주식을 사기만 하면 떼돈을 번다고 그랬잖아?”
“은행이자 두 배는 보증한다던 브로커 어디 갔어?”
돈을 잃어 화가 난 초보자가 항의 목소리를 높였다. 여의도 거래소 앞은 주가 부양을 촉구하는 시위대가 등장했다. 정부 역시 각종 부양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지만, 내림세로 돌아선 주가는 오를 줄을 몰랐다.
유서준의 입대일은 기말고사가 끝난 6월 26일이었다.
3일 전까지 그는 누구에게도 입대를 밝히지 않았다. 단지 하숙집 아주머니와 절친 구인혁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증권사 직원 서하나까지 더하면 모두 셋이었다.
유서준은 계획을 세웠다. 금요일인 6월 23일에 동아리에서 입대 선언을 한다. 24일에는 고향에 다녀오고 26일 월요일 새벽에 기차를 타고 입영 장소인 논산 훈련소로 내려갈 것이다.
6월 23일 금요일 오후 동아리 방은 시름에 잠겨있었다. 주가 상승기 때와는 달리 분위기가 무거웠다.
주가지수는 900을 하회하고 있었다. 연초대비 하락한 데다 무리해서 추가매수를 하거나 추격매수를 일삼은 공격적 투자자는 큰 손실을 보았다. 특히 트로이카주를 매매했던 투자자의 손실이 컸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격언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유서준은 동아리 방의 벽에 붙어있는 5월까지의 실적을 보았다. 예상했던 내용과 거의 차이가 없는 실적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1위는 당연히 그였다. 4월부터 매매를 중단했으니 3월까지의 실적 또한 변함이 없었다. +518%. 동아리 역사에 길이 남을 수익률이었다.
3월에 2위였던 박강수는 장세 전망을 잘못한 탓에 아래로 추락했다. 그는 10위에 턱걸이했다. 수익률은 -11%. 하락하는 주식을 무리하게 보유하며 추격한 것이 패인이었다. 그가 제 페이스를 잃은 이유 가운데 유서준과의 내기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동아리 회원 대부분의 수익률이 손실이었다. 유서준을 제외하면 단지 김현아만 플러스를 기록했다. 그녀도 하락장을 온전하게 피하지 못했지만, 유서준의 경고를 믿은 덕분에 몸을 사린 점이 주효했다. 수익률은 지난 3월의 +29%에서 다소 낮아진 +25%였다.
2위인 김현아 아래로는 김동식이 3위를 차지했다. 김동식은 조심스러운 매매를 하는 경향이 강했다. 상승기 때는 적게 먹고 하락기 때도 손실을 적게 가져가는 타입.
다른 사람의 처참한 수익률에 유서준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로서도 어쩔 도리는 없었다. 그는 분명히 경고했고 그 경고를 믿지 않은 사람 본인의 탓이니까.
그를 본 신입생이 구세주를 만난 듯 주식시장의 전망을 물었다.
“형, 앞으로 어떻게 하죠? 이젠 그만 떨어지겠죠?”
걱정이 가득한 질문이다.
유서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대답은 뻔했다. 앞으로 오를 것이라는 대답. 더 내릴 것이란 대답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돈이란 것이, 사람의 욕심이란 것이 보는 시야를 좁게 만들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한다.
그는 다음 주인 6월 마지막 주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주는 주가지수가 더 떨어져서 한 주에 -5%에 달하는 폭락이 일어났다. 최근 일어난 폭락을 능가하는 크기다. 투자자의 아우성이 더 커질 것이다.
입을 다문 유서준을 흘낏 본 박강수가 좌중을 향해 일장연설을 했다.
“다음 주는 6월 마지막 주야. 상반기 결산이 있는 때지. 은행도, 증권사도 투신사도 자신들이 보유한 종목의 주가를 관리할 수밖에 없어. 그래서 주가는 절대 내리지 않을 거다. 걔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선진국에선 이런 현상을 윈도드레싱이라 하지. 우리나라도 그렇게 할 거야. 즉 다음 주는 무조건 오른다.”
희망적인 말에 모두의 안색이 밝아졌다.
유서준은 그의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떨어진다고 경고해도 보유 주식을 정리할 만큼 강심장은 없을 것이니 굳이 희망을 빼앗을 필요는 없다. 마음이라도 편해야 한다. 잠시뿐이겠지만.
신입생 하나가 슬그머니 박강수의 눈치를 보며 유서준에게 물었다.
“그렇겠죠?”
동의를 구하는 눈치다.
유서준은 단지 웃음만 지어 보였다.
지켜만 보고 있던 김현아가 그의 내심을 눈치채고 질문을 던졌다.
“서준아, 넌 아직도 계속 현금 보유 중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그녀의 질문이 이어졌다.
“언제 다시 주식을 살 건데?”
그녀의 질문은 우회적이었다. 다시 그가 주식을 매수하는 순간이 오르는 시기가 될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았지만, 유서준은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만 했다.
“정확히 말하면 난 92년 초부터 다시 주식을 살 거야.”
“응?”
89년 말도 아니고 92년 초? 모두가 잘못 들은 것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냥 웃고 넘기기엔 그가 보여준 실적이 너무 컸다.
유서준은 웃음을 머금으며 폭탄선언을 했다.
“나 3일 뒤에 군대 간다.”
모두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김현아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시 물었다.
“거짓말이지?”
“진짠데?”
“에이.”
김현아가 장난치지 말라며 혀를 찼다.
유서준은 거수경례하며 한바탕 군인 흉내를 냈다.
“이병 유서준, 6월 26일 자로 논산 훈련소 입소를 명받았습니다.”
동아리 방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거짓이 아닌 진짜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김현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마치 배신을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유서준은 그녀에게 미안했지만, 일찍 알았다고 해서 달라질 일은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유서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을 향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앞으로 상당 기간 주식시장은 어려울 것입니다. 공격적인 매매보다는 보수적인 매매가 유리할 거라는 말만 하겠습니다.”
사실 유서준은 주식 말고 현금을 보유하라고 일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곳 주식투자연구회는 문을 닫게 될지도 모른다.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하고 최대한 보수적인 투자를 하라고 당부했다.
말을 마친 유서준은 김현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미리 이야기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뭐,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남들도 다 가는 곳이니깐 마음 편하게 보내줘.”
김현아가 서운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말이 없었다.
박강수가 웃으며 유서준의 어깨를 툭 쳤다.
“잘 다녀와라. 30개월 동안 갔다 오면 이곳에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겠지만.”
다소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유서준이 물었다.
“넌 군대 안 가냐?”
박강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난 안가지. 허리 디스크 환자라고 진단서 제출했거든.”
“허리디스크?”
“아, 그런 게 있어. 주변을 봐라. 국회의원이나 재벌 아들 가운데 군대 가는 녀석들 거의 없잖아?”
유서준은 박강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어떤 경로를 택했는지 모르지만, 적당히 돈을 이용해서 군을 뺐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유서준은 화를 억누르며 지난 내기를 꺼냈다.
“허리 망가져서 좋겠다. 그리고 내기 말인데, 내 수익률은 이미 결정 났으니까 1주일 후 6월 말이 되면 알아서 동아리에 기부금 내라. 5월 말 기준으로 529만 원이다. 아마 다음 주말이 되면 더 벌어지겠지만. 알았지?”
넌 다음 주에 더 잃을 것이란 비아냥도 섞여 있었지만, 박강수는 그것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박강수의 안면이 하얗게 변했다. 529만 원이라면 대학 등록금을 5학기나 낼 수 있을 돈이다. 상당히 크고 부담되는 돈이었다.
“그럼 난 정리할 게 많아서 이만 들어간다.”
유서준은 손짓으로 인사를 하고는 동아리방을 나왔다. 이들과의 인연은 아마도 여기까지가 될 것이다. 많은 정이 든 곳이지만 일단 이쯤에서 잘라내야 한다.
멍한 표정으로 뒷모습을 쳐다보던 박강수가 화를 내려다가 꾹 참았다. 자신의 투자수익률을 무시하는 유서준이 얄미웠지만, 곧바로 그는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유서준이 사라지면 김현아는 이제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까? 홀로 남은 김현아를 옆에서 계속 공략하면 결국 고무신을 거꾸로 신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보기에 유서준과 김현아는 그리 찐하게 사귄 사이도 아닌 것 같았다.
군대에 가는 그 중요한 이야기도 며칠 전 통보할 정도라면 별 것 아닌 사이라 보는 것이 옳다. 자신이라면 김현아 같은 아름다운 여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텐데.
‘바보 같은 자식.’
박강수는 김현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안색이 창백한 것이 배신당한 표정이 역력했다. 돈은 많이 깨졌지만 대신 김현아를 얻을 수 있다면 그의 승리가 아닌가?
앞으로 자그마치 30개월이나 남았다. 그 긴 시간 동안 여자 하나 제 것으로 못 만든다는 생각을 박강수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었다. 외모, 매너, 배경 등 모든 면에서 자신이 있는 그였다. 거기에 그녀와는 학과와 동아리라는 커다란 접점마저 존재하니까.
박강수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입맛을 다졌다. 그는 뿔테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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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유서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연히 가야 하는 군대이건만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다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박강수가 증권사 사장 아들이라 했던가? 어느 증권사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냥 중소형 증권사였던 것 같다.
어쨌든 박강수가 가지 않는 군대를 그는 가야 했다. 군대에 가는 사람이 애국자라고 몇 번을 되새겼다. 그렇다고 기분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이왕 가는 것 기분 좋게 다녀오자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았다.
정작 마음이 콱 막힌 것 같은 이유는 김현아와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녀를 이렇게 떠나보내기는 당연히 싫었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기다려달라고 할 염치는 없었다. 아마 그래서 그녀에게 군대 통보를 마지막에야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녀와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유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흥가를 걸어가면서 주위를 지나가는 연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녀가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행복한데 자신만 불행에 빠진 것 같았다.
생각보다 김현아를 잃은 상실의 아픔은 컸다. 하지만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 입대하면서 그녀를 놓아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장마철이라 밤인데도 후덥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서준은 편의점에서 맥주와 오징어 땅콩 안주를 샀다. 구인혁과 함께 할 마지막 술자리다.
며칠간 유서준은 자신의 짐을 대부분 정리했다. 전공 책이나 옷가지 같이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고향으로 옮기기로 했다. 내일 부모님께 안부 인사를 드리러 가면서 가져갈 것이다. 나머지 간단한 것 중에서 일부는 구인혁에게 맡기기로 했다.
구인혁은 그가 제대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 하숙집에 그대로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 군대는 생각이 없는지, 졸업 후 어떻게 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남아 있겠다고 장담했으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짐의 일부라도 그에게 맡겨둘 수 있으니 그로서는 부담을 덜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이어리다. 사실 입대를 결심했을 때 가장 고민된 물건은 다이어리였다. 다이어리를 안전하게 보관할 장소가 없었다. 고향 집에 가져다 두기엔 불안했다. 그렇다고 따로 보관해 둘 장소도 없었다.
현재 그를 제외하고 다이어리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구인혁이 유일했다. 유서준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구인혁이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다이어리 세 권을 그에게 맡겼다.
구인혁도 미래의 자신이 관련된 일이고 다이어리의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소홀히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 금요일 밤에는 구인혁과 맥주를 마시며 보내고 일요일 저녁에나 다시 돌아와 머리를 깎고 하숙집에서 쉴 것이다. 그 밤이 채 지나지 않은 새벽에 그는 서울역으로 기차를 타러 가게 될 것이다.
맥주를 사서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이 점차 가벼워졌다. 지금까지 자신과 연결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잠시 덮어두고 잊을 수 있는 시간을 입대를 통해 가진다는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때가 아니면 앞으로 경험하지 못할 심리적 자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