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40
40. 국방부 시계는 흐른다(1)
[1989년 6월 26일]얼마나 잠을 잤을까.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유서준은 다이어리를 구인혁에게 맡겼다. 구인혁은 미래에 시간여행 방법을 알아낼 핵심인물이다. 적어도 그는 믿을 수 있기에, 또 믿어야 했기에 안심하고 다이어리를 맡겼다.
밤이 짧은 여름이라 밖은 이미 밝았다. 제시간에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려면 지금 나가야 한다.
짧게 밀어버린 머리가 어색했다. 그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유서준은 구인혁에게 손을 흔들고 대문을 나섰다.
하숙집을 보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감정을 가라앉히며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을 걸었을까.
“서준아!”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서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뛰어오는 발소리. 손을 흔들며 다급하게 다가오는 몸짓. 나풀거리는 주홍색 원피스. 그녀였다. 바로 김현아였다.
생각지도 못한 마주침이었기에 유서준은 눈을 한차례 비볐다.
“어떻게 알고 왔어?”
“구인혁에게 시간을 물어봤었거든.”
얼마나 열심히 뛰어왔는지 숨을 멈추지 못하고 헉헉거렸다. 한참 숨을 고른 다음 가까스로 그녀가 유서준의 팔을 잡았다.
“다행히 안 늦었네. 늦을까 봐 막 뛰었는데.”
유서준은 그녀의 차림새를 다시 살폈다. 놀라웠다.
그의 기억에 그녀가 치마를 입었던 적이 생각나지 않았다. 항상 가벼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 전부였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살짝 꾸며본 듯한 화장기. 평소 화장을 하지 않고 다녔던 그녀였다.
워낙 본바탕이 예쁜 얼굴이었기에 화장하지 않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얼굴이었지만 역시나 화장을 하고 나니 더 예뻐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한껏 멋을 낸 옷을 챙겨 입은 티가 역력했다.
김현아에게 이런 여성적인 면모가 있었나?
그녀답지 않았기에 놀라웠고 유서준 그를 위해 했을 거로 생각하니 감격스러웠다.
“나 바래다주려고 온 거지? 고마워.”
유서준이 웃으며 좋아했다.
김현아가 그와 눈을 마주치며 삐진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나 안 보고 갈 생각이었어?”
“부담 주지 않으려고.”
퍽!
김현아가 그의 등을 내리쳤다. 곧바로 선머슴 같은 성격이 드러났다. 역시 치마 입는다고 요조숙녀로 변신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미워 죽겠네.”
유서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김현아가 곧바로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서울역에서 논산 연무대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표를 끊었다.
기차 안에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들은 열차 중간쯤에 있는 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창 쪽은 김현아, 통로 쪽은 유서준이었다. 그의 왼쪽에 그녀가 앉아있었다.
천천히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거리를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울적해진다. 입영이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김현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정말이야, 정말 미웠어.”
유서준이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는 미소만 지었다.
솔직히 그녀와 이 마지막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말도 없이 혼자 결정해버릴 수 있어?”
유서준은 손만 꼭 잡아주었다.
김현아가 계속해서 투덜댔다.
“하긴 내가 너 인생에 끼어들 만큼 비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유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그런 비중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김현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인생 계획이 선 것이구나?”
대화 내용이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역시 김현아답게 상황을 제대로 감지했다.
“지금이 가장 군대 가기에 유리한 시기라 생각했어.”
“왜?”
“주가 하락기이니까. 다음 상승기를 잘 잡으려면 지금이 최적이라 생각했어.”
“정말 앞으로 3년간 주가가 내린다고 보고 있구나?”
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현아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넌지시 물었다.
“올해 많이 벌지 않았어? 대체 뭘 하려고 그렇게 돈을 벌어?”
대답하려는 유서준의 입을 그녀가 손가락으로 막았다.
“잠깐! 올해 들어 삼성증권 신입사원 연수를 받았고 명동 인베스트먼트에도 다녀왔고…….”
김현아가 그를 의혹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너 졸업 후 증권사 입사할 거야?”
“아니.”
김현아가 생각에 잠겼다.
“흐음…… 그럼?”
유서준은 아직 김현아에게 다이어리나 자신의 주식매매 목적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그녀에게 말할 사안이 아니기도 했다. 신선영은 편지에서 언급된 사람이었지만 김현아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으니까. 애초부터 그녀와는 인연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완전히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나, 금융사를 차릴 거야.”
너무 뜻밖의 대답이었을까. 김현아가 그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생각보다 더욱 거대한 포부였다. 꿈은 클수록 좋은 것이란 글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엄청나구나.”
그녀가 그리 동의하지 않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유서준은 곧바로 풀어서 말했다.
“지금부터 10년쯤 후에는 내 이름으로 된 금융사를 설립할 거야.”
“그래, 꼭 실현해.”
진심인지 아닌지 모호한 목소리로 그녀가 대꾸했다.
유서준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처음부터 그렇게 목표를 잡고 있었어. 대학에 들어와 계좌에 처음 넣은 돈이 25만 원이었어. 돈이 불어서 100만 원이 되니까 뿌듯하더라. 뭔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500만 원이 되었을 때는 그런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1000만 원이 넘어가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 마치 부자가 된 느낌이랄까.”
김현아가 수긍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1억이 넘어가니까 느낌이 다르더라. 이젠 무엇이든 할 수 있겠다는 느낌, 내 꿈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1000만 원이 마음의 안정을 가져왔다면 1억은 인생의 힘을 불러오더라.”
“설마…… 1억이 넘었어?”
김현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1억은 적은 돈이 아니다. 그들처럼 어린 대학생뿐만 아니라 직장인에게도 1억은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김현아는 생각 이상으로 훨씬 큰 규모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는 유서준을 다시 보았다. 그가 부자라는 느낌보다 그의 그릇이 의외로 크다는 느낌이 그를 다시 보게 했다.
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 돈은 하나 누나에게 일임해 두었어. 알아서 안전하게 굴려주실 거야.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렇구나.”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중단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깥 풍경이 서서히 뒤로 지나갔다. 구름이 자욱한 하늘과 한여름의 싱그러운 산과 들이 펼쳐져 있었다. 다행히 장마철이었지만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다.
“오늘 들어가면 앞으로 2년 반이 지난 후에야 다시 학교로 돌아올 거잖아?”
김현아가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난 그때쯤 되면 졸업하고 외국에 나가 있을 거야. 선영 언니처럼 유학 가고 싶어. 그렇게 된다면 너랑 나랑 앞으로 보는 것이 사실상 힘들어질 텐데 이렇게 우리 사이를 끝내고 싶었어? 엊그제 동아리 방에서 황당하게 헤어진 그런 사이로?”
솔직히 유서준은 할 말이 없었다. 그녀에게 미안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오늘 내가 새벽에 이렇게 나타나지 않았으면 얼굴도 못 보았을 텐데.”
서운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휴가받으면 볼 거 아냐.”
유서준의 대답에 김현아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절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유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무엇보다 보통 친구와 이성 친구라는 그 중간에 그녀가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자신에게는 어쩌면 부담스러운 미모와 학력 등이 알게 모르게 이런 사태를 만들었을 뿐.
“나 고무신 거꾸로 신으면 어떡할 건데?”
김현아가 넌지시 물어왔다.
유서준은 장난 섞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도 군화 거꾸로 신지 뭐.”
“죽을래?”
김현아의 주먹이 그의 가슴을 두들겼다.
잠시 키득거리던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김현아가 그에게 몸을 기대왔다. 유서준은 자연스럽게 한쪽 팔을 둘러 그녀를 안았다. 그녀가 닿은 옆구리가 따뜻했다.
유서준이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오늘 놀랐다.”
“뭘?”
“너 치마 입은 거 처음 본 거 같아. 화장한 것도.”
“아닌데…….”
김현아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유서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동안 무 다리여서 치마를 안 입는 줄 알았어. 오늘 보니 정말 날씬하네.”
“피. 농담은.”
솔직히 농담은 아니었다. 여자치고는 다소 큰 키인 김현아가 곧게 뻗은 다리를 내보이고 있으니 정말 멋있었다.
유서준에게 실리는 그녀의 몸무게가 약간 더 가중되었다. 그는 더 가깝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몸이 밀착되며 약간의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지만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녀를 안고 있다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유서준의 눈앞에 그녀가 차고 있는 은색의 심플한 귀걸이가 눈에 띄었다. 귀걸이와 맞추어진 은색의 반짝거리는 목걸이도. 목걸이가 걸려 있는, 분이 묻어날 것처럼 하얀 목이 함께 보였다.
‘현아가 귀걸이도 했었나?’
분명히 오늘을 위해 멋을 낸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귀걸이와 목걸이, 주홍색 원피스. 모든 것이 정말 미치도록 잘 어울렸다. 세심하게 단장을 한 그녀가 새삼 고마웠다.
자신도 모르게 그의 눈길이 그녀의 살짝 부푼 가슴을 지나 잘록한 허리와 매끄러운 다리로 이어졌다. 어깨를 간질이는 머리카락과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지금 이 순간의 그녀는 정말 단아하고 고왔다.
그녀를 안은 그의 왼손이 그녀의 옆구리를 슬금슬금 건드렸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중에 그의 다리에 놓였다.
김현아가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서준아, 장담 못 하지만 기다려줄게.”
돌아보는 그의 볼에 김현아가 살짝 입을 맞추었다.
유서준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가녀리게 느껴지는 그녀의 몸이 그의 품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곧이어 그의 입술이 그녀와 겹쳐졌다. 당황하며 살짝 뒤로 물러나는 그녀의 입술을 따라가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뭔가 부드러운 촉촉함이 느껴졌다가 여운을 남기며 사라졌다.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김현아가 당황스러운 표정 속에서 초점을 잃은 듯 멍한 표정으로 멈칫거렸다. 그녀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유서준은 곧바로 다시 그녀를 끌어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이 감기고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음미하며 혀를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느낌이 전신을 감전시키듯 온몸을 휘감았다.
길게 이어지는 입맞춤과 함께 그의 오른손이 슬금슬금 그녀의 가슴으로 올라갔다. 잠시 김현아의 손이 그의 진로를 방해했지만, 그의 손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의 굴곡을 타고 위로 제 갈 길을 갔다. 저지하려다 결국 포기한 그녀가 손을 풀어주었다. 안타깝게도 원피스라 옷 속으로 손이 들어갈 수는 없었다.
아쉬움은 다른 것으로 보상이 돌아왔다. 잠시 후에는 그녀의 주홍색 원피스 치맛자락을 슬그머니 올리고 새하얀 허벅지를 볼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열차 안 통로 건너편 자리에는 손님이 없었다. 물론 있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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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손을 흔드는 김현아를 뒤로하고 유서준은 연무대 안 신병 집합 장소로 들어갔다.
곳곳에 배웅 나온 가족이 보였고 차마 떨어지지 못하고 껴안은 채 울음을 터트리는 연인도 많았다.
그가 보기에 김현아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살짝 감정이 격해지긴 했지만, 힘껏 억눌렀다.
한참 후에 뒤를 돌아봤을 때 여전히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아마도 둘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을. 앞으로 다시 만난다 해도 이성으로 만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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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유서준은 서부전선에서 남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기갑부대에 배치됐다. 30개월의 군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