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41
41. 국방부 시계는 흐른다(2)
1989년 6월 마지막 주를 폭락으로 마감한 주식시장은 12월까지 횡보를 거듭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가 급변했던 1989년의 주식시장은 주가지수 909.72로 마감했다. 1년 전 대비 +0.3% 상승했지만 4월 초 고점 대비 약 10% 하락한 수치였다.
투자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비록 연초에 기대했던 대폭 상승은 빗나갔지만 그래도 년 단위로는 하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모두가 1990년에는 다시 상승으로 전환할 것으로 생각했다.
1990년 1월 22일.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고민하던 노태우 정부는 여당인 민정당과 제 2야당인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제 3야당인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와 합당하여 새로운 정당인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김영삼 총재는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3당 합당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여당 내의 선두주자로 부상한 김영삼 대표와 제 1야당인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새로운 양김 경쟁이 시작되었다.
90년 1월의 주가는 상승과 하락의 치열한 격전 속에 보합으로 끝났다. 전년 대비 약 1% 하락한 수준. 하지만 투자자의 기대와 달리 2월에도 주가는 오를 줄 몰랐다.
주가를 압박한 것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 선언이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당시 세계 군사력 4위였던 이라크에 선전포고했다. 세계적으로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주식시장을 짓눌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하락 폭은 더욱 커졌다.
하락을 감당하지 못한 투자자의 시위와 성토가 이어졌다. 정부에서는 90년 5월, 증시안정기금 조성을 발표했다. 기업의 직접 자금조달이라는 증시 본래의 목적이 반대로 상장사 스스로의 돈으로 주가를 떠받치는 기이한 관제 주가가 시작된 것이다.
증안기금이라는 메가톤급 호재로 5월의 주식시장은 잠시 상승으로 돌아섰지만 6월이 되면서 다시 하락으로 반전했다.
90년 8월 2일 마침내 걸프전이 발발했고 주식시장은 폭락했다. 전쟁의 여파는 컸다. 걸프전이 한창이던 8월 25일 주식시장은 장중 저가인 580.97을 찍었다. 작년 말 대비 -36% 하락했고 전고점인 89년 4월 초 대비 -42% 하락했다. 모든 주가가 반 토막이 난 것이다.
정부에서는 추가 주가 부양조치를 취했지만 하락하는 주가는 멈출 줄을 몰랐다.
1990년 9월 12일, 폭우가 쏟아졌다. 중부지방에 쏟아진 폭우로 인하여 서울에는 4일간 486mm라는 기록적인 비가 내렸다. 서울의 중심가인 강남 고속터미널 상가가 완전히 침수됐고 시내버스 및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었다. 한강 범람으로 광명시를 비롯한 지역에서 아파트가 3층 높이까지 물에 잠기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신도시가 들어서고 있던 분당, 일산은 물바다가 되었다.
일산 지역 한강 제방 붕괴는 서울 북서부 지역을 완전히 물바다로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강북 제방 도로인 자유로 건설이 앞당겨졌다.
해방 이후 서울지역 최대 홍수였던 이날 126명의 사망자와 18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유서준은 홍수로 큰 피해를 본 지역에 대민지원 작전을 나갔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홍수에 그는 아연실색했다. 지하철역이 물에 잠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물에 잠겼다가 물이 빠지며 다시 드러난 도시는 황당했다. 고지대 학교로 대피했던 주민은 갈 곳이 사라졌다.
유서준은 군 병력에 포함되어 홍수 뒤처리 지원에 나섰다. 주민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배포했다. 물이 빠지고 모습을 드러낸 집은 처참했다. 진흙이 온 집안을 메우고 집에 있던 가재도구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는 물에 젖은 방 내부를 도배하는 한편 가구를 씻고 정돈했다.
대부분은 망연자실한 상태로 물이 빠진 집터만 보고 있었다.
한순간에 집이 물에 잠겨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을 보며 유서준은 마음이 아팠다. 먼 훗날 제 이의 금융위기를 맞아 자살했을 자신도 저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90년 10월 13일,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급증하는 인신매매와 치안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의 조직폭력배 소탕을 명령했다. 아마 이 정부 들어 최고의 실적이라면 북방정책과 더불어 범죄와의 전쟁이 아니었을까.
91년에 들어서도 주가 하락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증시안정기금이 주가 하락을 방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관제 주가에 길든 투자자는 정부를 바라보았지만, 정부도 더 꺼낼 카드가 없었다.
3저 호황은 끝이 났고 잠시 흑자였던 무역은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이웃 나라인 일본도 거품 붕괴가 일어나며 경고를 보냈다. 80년대 말 흥청거리던 모든 분위기가 사실상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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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 22일]입대한 지 약 2년이 지났을 즈음 유서준의 계급은 병장이었다. 이제 제대 날짜만 세는 말년병장이 된 것이다. 제대 3개월 전부터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직 그럴 군번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그보다 선임은 한둘에 불과했다.
그동안 김현아는 가끔 면회를 왔다 갔다. 유서준도 휴가를 받으면 그녀를 만났다. UIP 직배 반대 시위가 격화되던 때, 청담동에 새롭게 등장한 멀티플랙스 영화관, 시네하우스에서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도 보았다. 패드릭 스웨이지와 데미무어가 주연한 이 영화는 남자가 죽은 후 유령이 되어 여자 친구를 지키려고 애쓰는 블록버스터 로맨스 영화였다. 김현아는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을 본받으라고 놀렸다. 정작 유서준은 영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미모에 혹했다.
휴가 때에는 절친 구인혁에게 신세를 졌다. 구인혁은 여전히 예전 하숙집에서 살았다.
졸업한 김현아는 유학 준비를 했다. 구인혁은 서울대학교 대학원 물리학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가족을 제외하고는 이들 외에 유서준을 면회 온 자는 없었다. 학과 친구와는 그리 친하지 않았고 주식 동아리 친구는 그와 마찬가지로 입대한 사람이 많았다.
장마가 시작된 6월 22일 토요일, 유서준은 휴가를 받아 서울에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증권사를 방문했다. 서하나에게 인사도 하고 계좌 상황도 확인할 겸 해서였다.
증권사를 들어선 유서준은 남다른 감흥을 느꼈다. 앞으로 6개월만 있으면 그도 제대하고 다시 주식시장에 뛰어들게 된다. 이제 정말 뭔가 해볼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주말을 맞은 즐거운 오후. 토요일은 전장뿐이라 객장 내 손님은 비교적 한산했다. 장이 이미 끝이 난 탓도 있었지만 원래 하락기에는 손님이 적었다.
전광판은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오늘도 폭락이었다.
오늘 마감 주가지수는 590.57. 어제 대비 -0.68%인 -7.12 포인트 하락했다. 바로 전날 지수 600을 깨고 1% 이상 하락한 데 이어 추가 하락이 이어진 관계로 그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이번 주 내내 하락했다.
주가지수가 1000을 넘은 지 약 2년 만에 지수는 그 절반인 500대까지 미끄러진 것이다.
전광판을 바라보는 몇몇 손님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일부는 넋을 놓고 있었다. 아마도 손실이 큰 모양이었다. 지수 자체가 -40% 이상 하락했으니 사실상 벌고 있다면 이상할 것이다.
유서준이 서하나를 찾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증권사 입구 문이 벌컥 열리더니 파란색 옷을 입은 다소 뚱뚱한 중년 아줌마가 들어왔다. 언뜻 보기에 부동산 복부인에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유서준이 입가에 미소를 띠는 순간 보라색 아줌마가 객장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지점장 나와!”
창구 직원을 포함하여 모두의 시선이 파란 옷 아줌마에게로 모였다.
“안 나와? 지점장 나와!”
아줌마가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직원들은 안색이 질린 채 섣불리 아줌마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열 받은 아줌마가 한쪽 구석 선반에 놓인 작은 화분을 들고는 냅다 집어던졌다.
쨍그랑!
화분이 유리창에 맞아 박살이 나며 커다란 유리창 하나가 금이 쫙 갔다.
그제야 몇몇 직원이 아줌마를 말리려고 뛰어갔다.
유서준은 그 장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가 하락기에 증권사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꽤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직접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놀랍게도 전광판을 구경하던 손님마저 아줌마를 두둔했다. 하락기에 증권사는 모두의 적이었다.
“아주머니,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창구 아가씨가 비명을 지르며 외쳤다.
파란 옷 아줌마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지점장 어디 갔어? 그 자식이 내 계좌를 완전 걸레로 만들어 놨어.”
“그… 그게…….”
창구 아가씨가 몸을 사리며 멈칫거렸다.
파란 옷 아줌마가 독기 오른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지점장이 자기한테 계좌를 맡기면 두 배는 확실하다고 그랬다고! 그런데 반 토막이야. 이제 다 떨어졌으니 오를 일만 남았다고 했는데 오늘 또 떨어졌어! 내 계좌 물어내.”
아줌마가 소리치며 길길이 날뛰었다.
창구 아가씨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만류했다.
“아주머니, 지점장님은 지금 안 계세요.”
“이 자식이 도망갔어?”
아줌마가 씩씩대며 윽박질렀다.
“외근 중이세요. 오늘은 못 들어오신다고…….”
파란 옷 아줌마가 창구 아가씨를 밀쳤다.
“그럼 다른 놈이라도 나와!”
막무가내였다.
유서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투자는 자기 책임이라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또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었고.
파란 옷 아줌마와 창구 아가씨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 마침 안에서 서하나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죠?”
파란 옷 아줌마의 시선이 서하나를 향했다. 곧바로 그녀의 안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네년 잘 만났다. 지난번에 지점장 아래에서 주문 냈던 년이잖아? 내 돈 물어내!”
갑자기 파란 옷 아줌마가 서하나에게 달려들었다.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말릴 틈도 없었다. 아줌마가 서하나의 머리채를 붙잡더니 마구 밀고 당겼다.
“악, 아줌마 누구예요?”
서하나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년, 물어내!”
서하나가 아줌마의 손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아줌마가 한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흰색 블라우스를 잡고는 마구 흔들었다.
유서준은 말리고 싶었지만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 같아 머뭇거렸다.
옆에 있던 창구 아가씨가 가세해서 간신히 아줌마를 붙잡았다.
세 사람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이년아!”
아줌마의 걸쭉한 욕이 내뱉어지고 세 사람이 한 덩이가 되어 주가 전광판 앞에 있는 고객 의자로 무너졌다.
남자 직원 한 사람과 경비가 후다닥 뛰어왔다.
그들은 간신히 세 사람을 떼어 놓았다.
파란 옷 아줌마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고 서하나는 머리가 엉클어져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흰색 유니폼 블라우스의 앞쪽 단추가 두 개나 떨어져 나가 옷이 흘러내렸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긴 목덜미 아래 가슴 일부와 하얀 브래지어가 언뜻 내비쳤다. 창구 아가씨도 상태는 비슷했다.
서하나가 곧바로 자신의 블라우스를 추스르며 말했다.
“이 아줌마 누구죠?”
“아, 예전에 지점장님께 계좌를 위탁하셨던 강남의…….”
남자 직원에게 팔을 잡혀 씩씩거리는 아줌마를 다시 살피며 창구 여직원이 말했다.
서하나가 헝클어진 머리를 가지런히 손으로 넘기며 말했다.
“일단 상담실로 모셔요. 제가 곧 들어갈 테니까요.”
뭐라고 투덜거리는 아줌마를 남자 직원이 한쪽에 있는 밀폐된 상담실로 데려갔다.
그제야 유서준을 발견한 그녀가 인사했다.
“서준이 왔구나. 잠시만.”
그녀는 안쪽에 있는 탕비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서하나가 머리와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나타났다. 뜯겨나간 단추는 옷핀으로 대충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일단 고객 상담부터 해야 할 거 같아. 잠시 여기서 기다려줄래?”
서하나가 유서준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서준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따라갔다.
“저도 같이 들어가도 될까요?”
“응?”
의아한 눈초리로 서하나가 유서준을 바라보았다.
유서준은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주고 싶었다. 아줌마의 태도로 보아 아까 전과 같은 폭력 사태가 발생해도 도움을 줄 수 있고 계좌 관리와 관련해서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망설이던 서하나가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유서준은 그녀와 함께 상담실로 들어갔다.
서하나를 보고 발끈하던 파란 옷 아줌마가 뒤이어 들어온 유서준을 보고는 바로 성질을 죽였다.
유서준은 빡빡 깎은 머리에 군복을 입고 있는 데다 키가 크고 덩치도 상당했다. 거기에다 군대에서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을 하면서 몸매가 매우 좋아졌다. 이전에 약간 뚱뚱하게 보이던 살은 다 사라지고 근육으로 바뀌었다. 누가 보아도 어깨가 떡 벌어져 잘 다져진 몸으로 변신했다.
산적 같은 인상만 좀 받쳐줬으면 대단한 미남으로 보였을 것이다.
서하나와 유서준이 맞은편 자리에 앉자 파란 옷 아줌마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