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44
44. 애환(3)
서하나가 과일을 베어 물며 물었다.
“혀… 현아는 졸업했지? 뭐 한데?”
“유학 갈 생각인가 봐요.”
“그렇구나.”
서하나가 부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나도 졸업하면서 고민 진짜 많이 했는데…… 계속 공부하고 싶었어. 그런데 그럴 수가 없더라고…….”
서하나가 술잔을 들이켰다. 그녀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 빈 맥주잔이 뽀드득 소리를 내었다. 애환 어린 그녀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그… 때도 고민했었는데 지금도 고민하네…….”
진학을 포기하고 졸업 후 바로 입사했던 서하나는 공부에 미련이 많았다. 돈 걱정 없이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가는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그래도 그들과 다른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는 생각에 자신의 길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었다.
5년가량이 지난 지금 다시 그녀의 고민이 커졌다.
빠른 친구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일부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국내로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친구는 국내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다른 친구는 경제기획원이나 재무부로 들어갔다. 증권사를 감독하는 주무부서인 증권감독원으로 들어간 친구도 있었다.
단순히 고객을 다루는 그녀에 비해 그들의 직업은 더 전문적이고 우대받았다. 그녀는 그들이 부러웠다.
아직은 한두 사람이었지만 몇 년 지나면 그런 친구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다. 간신히 증권사에서 대리를 달고 성희롱을 참아가며 퇴직을 고민하는 그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고 퇴사를 할 용기도 없었다. 실질적으로 부모를 부양하는 책임을 지고 있는 그녀이기에 무조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여자 동기 중 일부는 결혼했다. 그녀가 보기에 대부분 시집을 잘 갔다. 남편 되는 사람이 재벌인 경우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판사나 의사 같은 직업도 많았다.
대부분 학교 다닐 때 그녀보다 공부도 별로였고 외모는 더더욱 차이가 났던 여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어리기만 했던 생각이었다.
어느새 나이는 들어가고 주변에 남자는 없었다. 직장 동료는 배우자로 적합하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을 끌지도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팍팍 느껴졌다.
직장생활에서도 인생에서도 그녀는 점차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든 게 자신의 욕심인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몇 년 후의 자신의 모습을 익히 그려낼 수 있었다. 수동적이며 꿈도 자신감도 없이 집과 직장만을 돌고 있는 그녀의 삶을.
그런 가운데 오늘 같은 일이 터졌으니 그녀의 감정은 격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고 마침 유서준이 옆에 있었다. 어린 후배였지만 믿음직하고 능력도 있어 보이는.
서하나가 술김에 자신의 이런저런 사연을 줄줄이 내뱉었다.
유서준은 별다른 반응 없이 호응하며 들어주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가 필요한 것임을 그도 알고 있었다.
술을 끊임없이 마시는 그녀가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었다.
말을 하는 서하나가 고개가 저절로 아래로 내려갔다. 술이 많이 취한 것 같았다.
유서준은 더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이미 많이 마신 데다 자신까지 완전히 취하면 돌봐줄 사람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갖가지 사연을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 한때 누구보다도 자신감 넘쳤을 그녀가 인생에서 좌절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하나는 탁자에 엎어져 눈을 감고 있었다.
유서준은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서하나의 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누나, 어디로 가야 해요?”
유서준이 그녀의 귀에 대고 물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 했다.
**
유서준은 서하나의 손가방을 들고 그녀를 부축한 채로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바람에 이동이 힘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부근의 모텔로 데려갈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것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집을 모르니 데려다줄 수도 없었다. 그녀를 깨워 물어보았으나 그녀는 제대로 깨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고민하던 유서준은 김현아를 떠올렸다. 학교 부근에서 여전히 자취하는 그녀의 집이 가장 무난하게 생각되었다.
길 저쪽 편에 택시가 줄을 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를 부축해서 거기까지 가는 것은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
유서준은 서하나를 등에 업었다. 덩치 좋은 그였기에 업는 것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녀가 옆으로 기울지 않도록 자세를 잘 잡은 다음 택시로 향했다.
등으로 그녀의 불룩한 가슴이 닿는 촉감이 왔다. 거기에다 그녀의 몸을 받치기 위해 엉덩이에 닿은 손도 미묘했다. 등에 올라탄 그녀의 다리가 그의 몸을 감싸서 많이 벌어졌다. 비교적 짧은 치마여서 치마가 꽤 올라갔을 것이란 생각에 그는 조심스럽게 손으로 치마를 덮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민망한 모습을 보면 안 되니까.
야릇한 기분이 들었으나 유서준은 무시하고 택시로 뛰어갔다.
일단 뒷좌석에 서하나를 구겨 넣었다.
“으응?”
서하나가 취한 상태로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유서준은 곧바로 그녀에게 말했다.
“현아네 집에 갈 거예요.”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녀의 머리가 옆으로 넘어갔다.
택시 운전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부근 호텔이나 모텔로 갈까요?
군인이 술에 떡이 된 여자를 안고 있으니 무슨 일인지 짐작한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을 보니 예쁜 여자랑 재미 많이 보았냐고 묻는 듯했다.
“아뇨, 신림동으로 가주세요.”
유서준은 목적지를 말했다.
운전사가 묘한 웃음을 흘리며 서하나를 쓰윽 훑어보더니 차를 출발시켰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은 채 한시름을 놓은 유서준은 서하나의 몸을 받치며 그녀를 살펴보았다.
도로의 가로등 불빛이 비치는 어둠 속에서 그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치렁치렁 웨이브진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절반가량 덮고 있었다.
머리카락 아래로 붉게 칠한 그녀의 입술이 보였다. 아름다운 얼굴과 함께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얼굴 아래로 갸름한 턱선이 보이고 사슴처럼 긴 목이 아래로 이어졌다.
하얀 목 아래 그녀의 가슴 부위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 블라우스 옷깃을 붙잡고 있던 옷핀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그녀를 업었을 때 떨어져 나간 듯했다. 그 바람에 블라우스가 벌어져 가슴 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하얀 브래지어가 감싸고 있는 풍만한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노출된 부위는 절반가량이었지만 그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치마도 문제였다. 업었을 때 말려 올라간 데다 택시에 급히 태운다고 마구잡이로 그녀를 자리에 넣은 탓에 사실상 허벅지가 거의 노출되어 있었다. 걷힌 남색 스커트 아래로 하얀 팬티가 보였다.
‘이래서 운전사가 자꾸 훑어봤나?’
유서준은 운전사의 뒤통수를 째려보고는 다시 눈을 돌렸다. 군인은 치마만 두르면 미스코리아로 보인다고 했던가. 물론 유서준은 그럴 단계가 아니었지만 서하나 같은 미인이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속옷을 노출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블라우스를 여미고 치마를 아래로 내려주었다. 그녀가 꿈틀거리며 움직이다 보니 또다시 속옷이 드러났으나 다시 여며주었다.
일단 택시로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들어갔다.
택시에서 내리는 그를 향해 운전사가 재미 많이 보라고 말하며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유서준은 다시 힘을 내야 했다. 그곳에서 김현아네 자취방까지는 대략 오십 미터가량 떨어져 있었다.
한 번 더 업을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뒷모습이 이상할 것 같아서 이번에는 앞으로 안았다.
업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안긴 여자가 목이라도 둘러주면 편하겠지만 그냥 축 늘어져 있으니 온전히 팔로 그녀의 몸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안고 걸어가는 그의 눈앞에 블라우스 틈 사이로 하얀 브래지어가 살짝 보였다. 엉덩이가 아래로 처지면서 치마 역시 스르륵 미끄러져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남색 스커트 끝단에서 다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 하얀 팬티가 눈을 자극했다.
다시 제대로 안을까 생각해보다가 주위가 어둡고 보는 사람도 없어 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초인종을 누르니 김현아가 튀어나왔다.
선배인 서하나가 축 늘어진 채 안겨있으니 그녀는 많이 놀란 듯했다. 황급히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김현아의 방은 처음 가봤다.
그동안 몇 차례 방문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한사코 거부해서 들어가지 못했었다. 서하나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방에 진입하는 것을 성공한 셈이었다.
첫 느낌은 매우 아담했다. 한쪽엔 책상과 책장이 놓여있고 아담한 분홍색의 침대 하나가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옷장, 그 옷장 위로 작은 인형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영락없는 여학생 방이었다.
그녀의 방에 처음 들어섰다는 기분을 느끼기도 전에 조심스럽게 서하나를 눕혔다.
유서준이 그녀를 침대에 내려놓고 물러서자 김현아가 다가가서 서하나의 옷차림을 매만졌다.
김현아가 안색을 찌푸리며 물었다.
“언니가 왜 이래?”
“오늘 나랑 술을 많이 했어. 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근데 옷차림이 왜 이래?”
김현아는 약간 화가 난 표정이었다.
유서준은 그녀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는 오늘 낮에 있었던 증권사에서의 일을 말해주었다.
“나중에 내가 업고 오다가 옷핀이 떨어져 나가서…….”
“그래도…….”
김현아의 눈썹이 상큼 올라갔다.
유서준은 손을 저으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난 절대 손 안 댔다.”
김현아가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물었다.
“봤어? 안 봤어?”
“뭘?”
유서준이 모른 척하자 그녀가 더욱 수상쩍은 눈초리로 보았다.
김현아가 가지런히 누워있는 서하나의 가슴과 허벅지를 가리켰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서하나를 쳐다보았다. 이제는 김현아에 의해 완벽하게 옷매무새가 단정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치마 아래로 쭉 뻗은 다리가 멋있게 보였다.
유서준이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그냥 보… 보이던데…….”
김현아가 주먹을 쥐고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너, 하나 언니한테 다 이를 거다.”
“내… 내일 아침에 올 게. 하나 누나한테 아침에 온다고 전해줘.”
유서준은 곧바로 뒤로 물러나며 도망치듯 나왔다.
김현아가 뒤에서 소리쳤다.
“너, 내일 죽을 줄 알아.”
**
유서준은 구인혁의 방에서 잠을 잤다.
구인혁은 유서준이 휴가를 나온 줄 알고 있었기에 갑자기 나타났어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유서준은 대충 씻은 다음 다급하게 다이어리를 폈다.
과연 파란 옷 아줌마의 계좌를 무리 없이 운용 가능할 것인지 궁금했다. 아줌마의 문제보다 이 일로 서하나가 곤란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1991년 7월 31일 수요일.
주가지수는 717.03을 기록했다. 오늘은 월말이었음에도 -2.4% 대폭 하락했다. 그런데도 전달 대비 +18% 상승했다. 이달에는 수익이 많이 났지만, 그동안의 하락 손실을 다 메우기 어렵다. 다음 달에도 오르려나?
한 달간 가장 많이 오른 업종은 단연 증권주였다. 우선주를 제외한다면 상승률 1위가 상업증권으로 6월 말 13300원에서 7월 말 20000으로 한 달간 약 +50% 올랐고 2위는 대우증권이 15400원에서 22600원으로 +47% 올랐다. 상업증권의 월간 최고가는 21200원, 대우증권의 최고가는 24400원이었다.
*
“빙고!”
유서준은 다이어리의 내용을 보고 환호성을 터트렸다. 역시 기억이 맞았다. 주식시장은 6월의 대폭 하락 이후 7월에는 급반등을 일으켰다.
1등 종목이 대략 50%이면 일단 이 종목으로 한번 우려먹은 다음 한 번 정도만 더하면 바로 반 토막 난 주식의 본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증권주의 향방에 대해 자세히 검토했다. 일단 해당 종목의 오늘의 주가부터 확인했다. 이 무렵 장마감 후 종가는 전화 자동응답으로 확인 가능했다.
6월 22일의 종가는 대우증권이 14900원이었다. 이것의 의미는 대우증권은 15400원 아래에서 내일부터 사 모으면 된다는 의미였다.
다이어리를 뒤적이던 유서준은 8월 6일 종가에 대우증권이 24800원이었음을 발견했다. 8월 7일에는 주식시장에 큰 폭의 하락이 발생했다. 유서준의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14900원에 사서 24800원에 팔면 된다. 그럼 주당 +66%의 수익이 난다. 이걸로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