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47
47. 다시 시작하다(1)
유서준은 구인혁과 함께 예전처럼 하숙했다. 다이어리도 다시 돌려받았다. 구인혁은 다이어리를 손대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했다가 그에게 되돌려주었다.
예상대로 1991년의 주식시장은 하락으로 마감했다. 종합주가지수는 전년 대비 -85.11 포인트가 내린 610.92를 기록했다. 일 년간 -12.2%의 하락이었다. 하락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89년 4월 1000 포인트를 찍은 후 지속해서 하락했기에 심리적인 타격은 만만치 않게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은 내년을 기대하는 희망을 불태웠다.
1992년 1월 4일에는 빅 이벤트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의 자본시장이 개방되는 날,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직접 살 수 있게 되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전에는 우리나라 기업에 투자하려면 기업에 직접투자하는 방법 외에 없었지만, 이제는 주식시장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으로 기업에 입질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간의 평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업은 선진국에 비해 저평가 상태라 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북한 리스크였다.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기에 기업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외국인의 투자를 제한하는 후진국형 증시 제도 때문이었다.
92년부터 외국인 투자가 가능해짐으로써 냄비 증시로 일컬어지는 후진국 유형에서 상당 부분 탈피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수요가 늘어나니 주가도 오를 것이라는 평과 함께.
유서준은 92년의 투자계획을 세웠다.
다이어리에 따르면 전문가의 예측은 옳았다. 하지만 주가는 금방 오르지 않는다. 92년에도 여전히 하락을 지속하여 뜨거운 여름이 되어야 주가는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즉 연초의 시장은 여전히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유서준은 이 시기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92년에는 대한민국 증시의 새로운 전환점이라 할 가치투자 시대가 외국인의 진입과 함께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기업이 우량하고 순익이 늘어나면 당연히 주가가 올라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증시는 업종별로 움직였다. 동일업종의 기업은 함께 오르내림을 반복했다. 그마저 정부의 입김에 좌우되는 관제 주가였다. 주가를 부양하기 위해 도입된 증시안정기금이 대표적인 예다.
92년부터는 그런 경향이 대폭 줄어들 것이다.
다이어리에 따르면 우량한 기업은 주변 상황과 무관하게 주가가 상승했다. 훗날 이 시기를 저퍼주 혁명이라 불렀다. 주가수익비율을 나타내는 PER와 주당 순자산비율을 나타내는 PBR이 새로운 투자지표로 등장하여 대박 종목을 터트린 시기였다.
다이어리에 나타난 저 PER 혁명을 대표하는 주식은 대한화섬, 태광산업, 삼아알미늄, 백양, 남영나이론, 롯데제과 같은 종목이었다. 92년 초기부터 이들 종목이 대폭 오른다. 과거처럼 일시적인 대박 종목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올라가는 진정한 대박 종목의 출현이었다. 저 PER 혁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즈음 다음 차례로 저 PBR 혁명이 시작된다. 지금부터 유서준이 본격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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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27일]91년 증시 폐장일 다음 날인 12월 27일, 유서준은 증권사로 서하나를 찾아갔다.
시장이 문을 닫았으므로 객장은 한산했다. 가끔 입출금 업무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연말 마무리 정리를 하던 서하나는 그를 반갑게 맞았다.
“어쩐 일이야? 여기에 다 오고.”
“누나 보고 싶어 왔죠.”
유서준의 능글맞은 대답에 서하나가 미소를 지었다.
서하나가 유서준의 계좌 잔고를 뽑아주었다.
예상대로 지난 2년 6개월 동안 주식은 전혀 보유하지 않았고 안전한 채권이나 국채, MMF 같은 것으로 돌렸다. 2억을 간신히 넘었던 잔고는 2억 6천으로 불어있었다. 은행이율이 10% 정도였던 때였으니 그만하면 선방한 셈이었다. 유서준이 절대 안전 운용을 외쳤기에 이 정도의 이익이었지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더 많은 이득을 내지 않았을까.
“서준이 엄청 부자네. 대학생으로 이만큼 돈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걸? 재벌 2세 아니라면.”
서하나가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금액은 많다면 많을 수 있고 적다면 적을 수도 있다. 금융사를 차리기에는 턱도 없는 적은 돈이었지만 일반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시할 수 없는 큰돈이었다.
“모두 누나 덕분이죠.”
유서준이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서하나가 손사래를 쳤다.
“그게 무슨 말이니. 난 네 주문을 대행해준 것 외에는 없는데.”
어쨌건 유서준은 서하나가 경험한 최고의 주식투자가였다. 큰 흐름을 읽고 종목을 기가 막히게 찍어 절대 실패하지 않는 특이한 투자자였다.
“앞으로는 다시 직접 매매할 거지?”
“그래야죠.”
“아쉽다. 내가 일임하던 동안 흡사 내 것 같아서 뿌듯했었는데.”
서하나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리는 말에 그는 웃었다.
서하나의 안면에도 미소가 번졌다.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는 것이 참 예뻤다. 그는 그녀의 화사한 웃음을 띤 얼굴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민망해진 서하나가 그를 툭 쳤다.
“무슨 생각해?”
“아, 아녀요.”
유서준은 황급히 정신을 수습하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는 주식 투자 안 해요?”
“난 안 해. 아니 못하지.”
“왜요?”
“원래 증권사 직원은 주식매매 금지란다. 증권사 직원이 자기 돈으로 매매하면 각종 작전에서 비리까지 별별 게 다 난무할 거다.”
유서준은 금방 이해했다. 하지만 주위에 보면 증권사 직원이면서도 매매에 동참하는 때도 있지 않던가.
그의 의문을 눈치챈 서하나가 곧바로 부연설명을 했다.
“실제로는 주식을 매매하는 직원도 많아. 당연히 자신의 계좌는 아니고 보통 친지의 명의를 빌려 투자하지. 실은 그게 돈을 벌겠다는 것보단 실적 관리 때문이야. 직원은 자신의 아래로 얼마의 자산을 책임지고 있느냐가 엄청 중요하거든. 즉 관리하는 고객의 수와 자산규모가 직원 평가의 기준이 되니까.”
“혹시 누나도 차명으로 된 본인 계좌가 있어요?”
유서준의 궁금증이 커졌다.
서하나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없다면 거짓말이고, 있긴 하다. 입사할 때 실적 위협을 많이 받아서 내 돈 넣어 부모님 계좌를 텄지. 수익률은 보잘것없지만. 또 많이 빼서 써버렸고.”
유서준이 약간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서하나가 의문의 눈길을 보내며 물었다.
“왜?”
“혹시 계좌 하나 개설하실래요? 명의는 누구 명의라도 상관없고요. 저랑 같이 투자하죠.”
유서준이 제안했다.
서하나는 그의 제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사실 서하나는 돈을 모으지 못했다. 입사하고 5년이나 되었으니 시집갈 자금 정도는 모아야 정상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집안이 가난해서 부모님을 보살펴야 한다는 점이었다. 거기에다 얼마 전 폐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 앞으로 돈이 들어가고 있었다. 사실상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휴…….”
서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돈을 모으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주변 여건 자체가 안 되었으니까.
유서준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누나 그러지 말고 제 말대로 해봐요. 지금 총 얼마 정도 있으세요? 부모님 계좌로 얼마 있다고 했잖아요?”
“흠, 이리저리 끌어모으면 천만 원가량은 될까?”
“그것이면 충분해요. 누나 돈 천만 원에 제 돈 천만 원을 합해 2천만 원짜리 공동 매매계좌를 하나 만들어요. 명의는 누나 명의가 좋겠지만 안 된다니까 부모님 명의로 하죠. 아니면 제 명의라도 상관없고요. 관리는 누나가 하고. 매매 결정은 둘이서 같이 하고요.”
서하나는 그의 제안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강제로 모으면 조금이라도 돈이 모이지 않을까. 거기에다 유서준은 특별한 감각을 갖고 있으니까. 자신도 한때는 매매를 정말 잘했었으니까. 가능성이 커 보였다.
서하나는 찬성했다.
“알았어. 현재 죽어 있는 어머니 계좌를 살리지 뭐. 아니면 네 이름으로 새로 하나 만들래?”
“아뇨, 부모님 명의도 괜찮네요.”
두 사람의 새로운 연결 고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서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서준은 명확하게 조건을 내걸었다.
“적어도 3년 동안은 계좌에서 돈을 찾아갈 수 없어요. 괜찮죠?”
서하나는 다소 불안했다. 그녀는 모아둔 돈이 없어 빠듯한 데다 아버지 병환도 큰 변수였다. 하지만 이 일은 뭔가 큰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서하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유서준은 내심 환호성을 질렀다. 이런 일은 서로 간의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는 서하나를 믿었다.
무엇보다 그는 서하나를 끌어들이고 싶었다. 향후 자신이 설립할 투자금융사에 그녀를 데려오고 싶었다. 단순히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설립 초기 멤버이자 주주로서.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언뜻 내비친 그녀의 환경은 다소 열악했다. 이대로라면 그가 금융사를 설립하기도 전에 그녀 신변에 변화가 생길 것 같았다. 돈이 없는 상태에서 그의 계획에 동참하기도 힘들고. 그녀를 자신과 옭아매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제일 좋아 보였다. 나아가 그녀를 돕는 일이기도 했다.
“제 계좌에서 천만 원을 빼서 신설된 계좌로 옮겨주세요.”
“그래 나도 내일까지 천만 원 넣을게”
그렇게 두 사람이 공동 관리하는 계좌가 만들어졌다.
서하나가 그를 보며 골똘히 생각하더니 물었다.
“이렇게 서두르는 것을 보니 너 분명 뭔가 있지? 분명히 나 좋으라고 하는 일은 아닌 것 같고.”
유서준은 대답 대신에 씨익 웃었다.
서하나는 그의 입에서 답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유서준이 결국 내년 초에 매매할 내용을 털어놓았다.
“내년부터 바뀌는 가장 큰 사실이 뭐죠?”
“외국인이 들어오는 거지.”
서하나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다. 오래전부터 국내 증권사에서도 대비를 해왔다.
“그럼 주식 트랜드가 어떻게 바뀔까요?”
“당연히 기업가치 위주로 바뀔 거라고 예측되잖아? 수익 잘 나는 회사의 주가가 오르겠지. 그건 왜?”
“맞아요, 그게 답이죠.”
“연말 장세를 보면 이미 거기에 대한 선점 물량이 들어오고 있어. 예를 들어 대표적인 저 PER 주인 백양을 봐라. 최근 3개월간 무려 100% 이상 올랐어.”
서하나는 곧바로 주가 지표의 하나인 PER의 중요성과 이를 이용한 선진 매매기법, 그리고 최근 증권사나 투신사에서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모두 외국인 직접 투자에 대비한 변화였다.
“딩동뎅. 바로 그겁니다.”
유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나가 미간을 모으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럼 어떻게 투자해야 할까요?”
유서준이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서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많이 올랐잖아? 과거 각종 대박주를 참고해보면 더 오르기 쉽지 않아.”
서하나의 반박에 그는 곧바로 정정했다.
“아직 한참 더 올라야 할 거예요.”
“응?”
서하나는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다음 그는 확신하는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런데 실행을 못 하죠. 올랐으니 떨어질까 봐 겁이 나서. 그래서 이등주를 잡거나 아니면 하락하는 놈을 잡죠. 결과는 다시 후회. 그렇죠?”
유서준이 하는 말은 서하나가 평소에 후배나 초보자에게 하던 말이었다.
서하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서준은 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속삭였다.
“공동계좌로 92년 장이 개장하는 1월 3일, 대한화섬을 매수하세요. 제 계좌의 것도 모두 다 사주시고.”
서하나가 미덥지 않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대한화섬이 PER가 낮은 종목인 것은 확실하지만 거래량이 많지 않아. 최근에는 완전 조용히 횡보하는 종목이라…….”
“외국인 들어오면 다를 겁니다.”
유서준은 단호하게 말하며 슬며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서하나가 슬그머니 손을 빼내려고 하다가 얼굴을 붉혔다.
“서준이 감각을 믿으니까 사긴 하겠지만…….”
“만일 상한가를 쳐서 못 사면 다음 날 또 주문 내세요. 살 때까지. 아시겠지요?”
“으응.”
유서준은 그녀의 확답을 받은 다음 손을 놓았다.
서하나가 손을 회수하며 배시시 웃음을 짓다가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참.”
유서준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말했다.
“지점장님께서 너 한번 보자고 하셨어. 지금 한번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