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48
48. 다시 시작하다(2)
유서준이 맡겨 놓은 2억 6천은 지점 입장에서 적은 돈이 아니었다. 즉 유서준은 지점의 중요고객이었다. 거기에다 파란 옷 아줌마가 유서준의 연락처를 달라고 난리를 쳤던지라 지점장은 유서준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
“그럴까요?”
유서준도 흥미가 동했다. 그도 지점장이나 되는 높은 자리의 인물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거기에다 예전에 서하나와 술을 마셨을 때 은근히 지점장이 그녀를 괴롭힌다는 말을 들었던지라 지점장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는 지점장 얼굴이나 봐두자는 생각에 수락했다.
서하나가 지점장실로 그를 데려갔다.
문들 두드리고 먼저 서하나가 들어가서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곧이어 서하나가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유서준은 지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뚱뚱한 체구의 머리가 반쯤 벗어진 중년 남성이 보였다. 그는 원목으로 만든 커다란 사무용 책상 뒤에서 주먹을 턱에 괴고 앉아있었다. 나이는 대략 오십은 되어 보였고 겉보기에도 욕심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살이 붙은 얼굴은 탄력이 없었고 눈빛은 탁했다.
그는 유서준이 들어오자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유서준이 보기에 지점장은 그리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욕심 많은 스크루지가 이 땅에 있다면 저런 모습일 것이다.
군에서 제대하여 아직 머리가 덜 자란 유서준이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린 대학생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지점장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유서준이 먼저 인사를 했다.
“유서준입니다.”
“아, 난 이곳 지점장인 박필석이라 하네. 생각보다 아직 어리군.”
유서준은 내심 실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지점장이 연장자이고 자신이 어리더라도 자신은 이곳의 고객이지 않은가. 그것도 큰 자산을 맡겨둔 중요고객이었다. 그는 지점장의 태도에서 고객을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었다고 판단을 내렸다.
유서준이 멀뚱거리자 지점장이 마지못해 한마디 했다.
“수익률이 좋다고 하던데 재주가 많구먼.”
“운이 좋았죠.”
유서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도 잘 해주게. 물론 서하나 대리가 잘해주겠지만.”
지점장이 다시 한마디를 던지고는 턱에 손을 괴었다. 다소 귀찮아하는 모습이 보였다.
유서준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약간 난처해진 서하나가 그에게 눈짓했다. 그만 나가자는 표정이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창구 직원이 들어왔다.
“지점장님, 김사장님 오셨습니다.”
동시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유서준의 눈이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향했다.
남색의 고급 양복을 입은 중년인이었다. 나이는 지점장과 비슷한 오십 대가량. 거기에 머리 역시 지점장과 마찬가지로 절반이 벗겨진 대머리였다. 키는 꽤 작은 편이었다. 체구는 뚱뚱했다. 한마디로 지점장과 요모조모가 많이 닮았다. 얼굴이 닮은 게 아니라 체구와 분위기가 닮았다. 차이점이라면 지금 나타난 김사장이란 작자는 눈빛 하나는 매우 날카로웠다.
서하나가 급히 지점장에게 인사했다.
“그럼 저희는 나가보겠습니다.”
서하나가 유서준에게 손짓하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김사장이란 자가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문이 닫히자 말을 건넸다.
“방금 그 아가씨 누군가?”
박필석 지점장이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대답했다.
“우리 지점 대리야. 서하나 대리. 우리 지점 최고 미인 사원이지. 아니, 우리 증권사 전체에서 최고일걸?”
“나 방송국에 온 줄 알았네.”
“왜? 관심 있나? 자리 한번 만들어봐? 크흐흐.”
박필석의 음흉한 말투에 김사장이 신음을 삼켰다.
“흐음, 결혼했나?”
“아직 안 했지. 남자친구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어. 서대리가 타주는 커피가 진짜 죽여. 다방 레지보다 월등해. 흐흐.”
김사장이 흥미가 동하는 눈빛을 보였다.
“학교는 어디 나왔지?”
“수재야. 서울대 나왔어. 그만하면 완벽하지 않나?”
박필석 지점장이 대답하며 김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김사장의 시선이 한동안 서하나가 나간 곳에 머물렀다.
**
서하나를 따라 나온 유서준은 기분이 찜찜했다. 지점장 인상이 별로였고 마침 들어온 김사장이란 사람 역시 인상이 마찬가지였다. 특히 김사장이란 자의 눈빛엔 날카로우면서도 끈적끈적함이 묻어났다. 별로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누구예요?”
유서준이 서하나에게 물었다.
서하나가 지점장실로 쓱 눈길을 돌렸다가 대답했다.
“가도건설 사장. 보통 김사장이라고 부르지. 특수 관계자 빼면 우리 지점 최대 고객이셔.”
“최대 고객이면 대략 얼마 정도 예치해 있어요?”
“글쎄다. 내가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는데 대략 20억가량 되지 않을까?”
서하나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자신의 책상을 정리했다.
“20억이라…….”
유서준은 내심 되새겼다. 가도건설이라? 처음 듣는 건설사였다. 아마 주로 하청을 받아 건물을 시공하는 중소형건설사일 것이다. 자산이 2억가량인 자신보다는 무려 10배나 큰 고객이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자신도 오래지 않아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정리를 마친 서하나가 퇴근 준비를 서두르며 말했다.
“오늘은 장이 안 열려서 한가하네. 퇴근해도 될 것 같은데 같이 나갈래?”
“저야 좋죠. 밥 사주시는 거죠? 히히.”
유서준의 넉살에 서하나가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거리를 걸었다. 차가운 날씨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도 추위가 느껴졌다.
서하나가 그의 팔짱을 낀 상태에서 딱 붙어서 나란히 길을 걸었다.
유서준은 함께 길을 걷는 서하나가 마치 여자 친구인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 들어 꽤 많은 시간을 붙어있었던 것 같았다. 이만하면 애인이라 생각해도 되는 것 아닐까. 그녀 같은 미인이 애인이라면 더는 바랄 게 없다.
상상을 편 유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서하나가 가전제품 판매점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들이 멈춘 곳에는 삐삐라 불리는 무선호출기가 널려있었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폭발적인 유행이 시작되고 있는 제품들.
“우리 저것 같이 살까?”
서하나가 조심스럽게 그의 의사를 물었다.
사실 둘은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서준은 그녀에게 증권사 번호로 연락했다. 하지만 그것은 업무시간 중에만 가능했고 그녀가 바쁠 때는 사적인 전화를 하기가 어색했다. 반대로 서하나가 유서준에게 연락할 방법은 없었다. 하숙집 주인 전화번호로 연락하면 가능하긴 했지만, 그것은 급한 경우에 한정됐다. 아직 그럴 일도 없었고.
앞으로 계좌를 함께 운용하면 연락할 일이 잦아질 것이다.
유서준도 찬성했다.
용팔이처럼 생긴 판매사원이 요즘 모토롤라 무선호출기가 대세라 선전했다. 두 사람은 똑같은 모양에 색상만 다른 무선호출기를 골랐다. 번호는 012-***-****. 두 사람은 번호 역시 끝자리를 맞추었다.
유서준은 그녀와 공유하는 것이 늘었다는 사실에 기뻤다.
연말을 맞아 유서준은 다이어리에 잔고를 정리했다.
*
1991년 12월 31일. 총자산 2억 6천만 원.
*
**
[1992년 1월 3일]92년 주식시장은 1월 3일부터 열렸다. 역사적인 자본시장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외국인의 입질이 시작됐다. 외국인은 장 초반부터 무려 1천억 원에 달하는 무차별 상한가 매수 주문을 넣었다. 체결률은 대단히 낮았지만.
이튿날인 4일 토요일에도 주식시장의 폭등세는 이어졌다. 이날 거의 전 종목이 폭등하여 종합주가지수는 무려 4.18%가 올랐다.
월요일인 6일부터 주식시장은 다소 양상이 달라졌다. 외국인의 무차별 매수는 일부 저 PER 주에 국한되었고 진정되는 양상을 보였다. 주식시장은 과거와 그 움직임이 확연히 차별화되었다.
외국인이 선호하는 저 PER 주의 대표주자인 남영나이론과 롯데제과는 상한가 행진을 펼치며 감리종목으로 지정됐다. 반면 그동안 국내 증시를 주도했던 부실 건설주는 하한가로 추락했다. 92년의 특징을 결정지을, 종목 선별의 신호탄이었다.
저 PER 주로 인식된 대한화섬은 91년 말 주가 25500원에서 연초인 3일, 배당락으로 약간 내린 24800원에 거래되었다. 하지만 이날 거래량은 불과 50주 남짓. 당연히 매수는 불가능했다.
대한화섬은 4일부터 폭등세를 띠기 시작했다. 4일에는 개장부터 상한가인 25800원을 찍었다. 6일인 월요일도 마찬가지였다. 시작부터 상한가인 26800원이었다. 매수가 불가능했다.
서하나로부터 그래도 매수할 것인지 연락이 왔다. 유서준은 오늘도 상한가면 일단 거르고 상한가가 무너진 날 매수하겠다고 답했다.
3일 연속 상한가였던 1월 7일, 대한화섬은 평소와 달리 대량거래를 유발했다. 다음날인 8일에는 상한가 출발 후 곧바로 무너지는 양상을 보였다. 서하나는 종가에 대한화섬을 전량 매수했다. 매수가는 28000원이었고 공동계좌로 700주, 유서준의 계좌로는 5000주였다. 금액으로는 1960만 원과 1억4천만 원. 유서준은 계좌에 아직 현금으로 남아있는 1억 원가량으로 다른 종목을 매매할 생각이었다.
유서준의 계획대로라면 이 대한화섬 주식은 5월까지 폭등하여 투자금융사를 설립할 꿈을 실현해 줄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나아가 서하나를 지탱시켜주고 그와 그녀를 엮어줄 가장 든든한 동아줄이 되어줄 것이다.
**
다시 대한화섬이 상한가 대열에 들어섰던 1월 9일, 유서준은 명동머니를 방문했다.
명동 인베스트먼트라는 로고가 붙어있는 유리문은 예전과 똑같았다. 인터리어가 화려한 것도 다시 보니 익숙했다. 창구 여직원은 바뀐 것 같았다. 물론 오래전이라 그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었다.
명동머니 대표인 이영호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다소 늘긴 했지만, 그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이영호는 유서준을 보고 격하게 반갑게 맞았다.
“벌써 제대했나 보구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군대에 가서 죄송합니다.”
유서준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한동안 안부 인사를 비롯하여 군대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윽고 인자한 웃음을 머금던 이영호의 눈빛이 예리하게 유서준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여기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인사차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예전에 저에게 제안하신 것 있지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싶습니다.”
유서준은 공손하게 의사를 전했다.
이영호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난 당연히 환영이네만 예전에는 올 것처럼 안 보였는데?”
“그땐 군대가 우선이었거든요.”
“돈 때문에 이 일을 하겠다는 것은 아닐 것 같고 심경의 변화가 생겼나 봐?”
이영호가 넌지시 그의 속마음을 떠보았다.
유서준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심경 변화는 아니고요. 돈은 주식으로 충분히 벌고 있어요. 그보다는 제 꿈이 명확해졌습니다.”
“꿈?”
“제 꿈은 투자금융사를 설립하는 겁니다. 증권사나 투신사 같은. 그래서 이곳에서의 아르바이트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영호가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주식에 관심 많은 젊은이라면 세계적인 펀드매니저가 되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펀드매니저와 금융사 설립은 약간 다른 문제다.
“금융사 설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유서준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영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알고 대답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꿈은 클수록 좋은 거니까. 향후 자네가 금융사를 설립한다면 나도 일부 투자를 고려해보지.”
“감사합니다.”
유서준은 인정받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영호가 금융사에 관한 설명을 나열했다.
“금융사 가운데 종합 증권사는 덩치도 크고 자본금도 많아야 해. 처음에 기본으로 들어가는 투자비도 많고. 그나마 손쉬운 것이 투자자문사나 자산운용사인데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일단 손쉬운 것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언제쯤?”
“3년 정도 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