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5
5. 신학기 시작(1)
[1987년 3월 3일]밤새 뒤척거리며 잠을 설친 유서준이 일어난 시각은 8시가 다 되어서였다.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뜨고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자신의 앞에서 흥얼거리는 구인혁을 발견했다.
“하하, 잠꾸러기구나?”
그는 이미 세면을 하고 온 듯 수건으로 머리의 물을 털고 있었다.
유서준은 기지개를 켜며 대답했다.
“평소에는 일찍 일어나. 어젠 잠자리가 바뀌어서 제대로 못 자서 그래.”
사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보통 학생과 비교해서 유서준은 시간 관리를 잘 하는 편이었다. 밤에 잠이 드는 시각과 아침에 일어나는 시각을 비교적 규칙적으로 가져가는 타입이었다. 물론 그런 생활이 몸에 밴 이유는 농사를 짓는 부모님 때문이었지만.
“하하, 그럼 나쁘지 않네. 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성향이거든.”
구인혁이 웃음을 지었다.
유서준은 그 의미를 이해했다. 함께 방을 쓰면서 서로 자는 시간대가 다르면 방해되는 점이 많았다. 한 사람은 잠을 자야 할 때 다른 사람은 깨어 있어서 불을 켜고 부스럭거린다면 서로 방해가 될 것이다. 다행히 두 사람은 취침시간대가 비슷했다.
유서준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책상 위에 둔 다이어리를 확인했다. 역시나 다이어리는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쌓여 있었다. 어제의 사건은 역시 꿈이 아니었다.
그의 눈이 책상 위로 향하자 구인혁의 눈길 역시 따라갔다.
그가 무심결에 그 다이어리에 손을 대며 말했다.
“우와! 일기다! 노트가 다소 낡은 것을 보니 꽤 오랫동안 써왔나 본데?”
깜짝 놀란 유서준이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다.
돌발적인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구인혁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짜샤, 놀라기는. 남의 다이어리는 안 본다. 봐봐야 재미도 없고. 뭔가 중요한 것 적어 둔 모양이지? 연애 이야긴가?”
괜히 머쓱해진 유서준은 손을 내저었다.
“중요한 거라니. 그건 아니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구인혁이 말했다.
“빨리 서둘러라. 밥 안 먹고 싶어? 기숙사 아침 식사 시간은 8시 30분이 마감이야.”
부랴부랴 세면을 한 다음 옷을 갈아입는 유서준의 어깨를 구인혁이 툭 쳤다.
“인문대는 여기서 가깝지만, 자연대는 엄청 멀어. 밥을 먹자마자 바로 뛰어가야 해.”
유서준은 오늘 배울 교재 몇 권과 필기구를 책가방에 넣었다.
“넌 책 안 가져가니?”
“글쎄, 오늘 수강과목이 교양물리, 교양화학 이런 것인데 굳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아. 뭐, 성질 더러운 교수라서 책 없다고 혼내면 다음부터는 준비하고.”
“책이 필요 없어?”
“이미 머릿속에 다 있어.”
별 것 아니란 투로 구인혁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키며 휘휘 저었다.
유서준은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했다. 역시나 그는 천재였다. 학부 수준, 그것도 교양과정 정도는 이미 완벽히 끝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괜히 그가 부러워진 유서준은 책상 위를 정돈했다.
그는 가장 첫 다이어리를 손에 들고 머뭇거리다가 가방에 넣었다. 중간에 비는 공강 시간에 그 다이어리를 세세히 훑어볼 생각이었다. 다른 다이어리는 서랍 속에 넣었다. 굳이 여기까지 들어와서 뒤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늦게 일어나 헐레벌떡 뛰어오는 학생들이 많았다. 게으른 자식들. 늦었다고 생각했건만 두 사람은 비교적 준수한 편이었다.
첫 교시 수업이 끝난 후 점심시간까지는 공강 시간이었다.
유서준은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아직 학생증이 나오지 않은 관계로 도서관 출입은 합격증이나 등록금 영수증으로 가능했다. 도서관 내부는 구경 온 신입생으로 다소 혼잡했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도서관부터 구경하는 것 보면 역시 서울대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열람실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칸막이가 된 책상은 비교적 혼자만의 공간을 제공해주었다.
그는 다이어리 첫 권을 꺼냈다.
가장 먼저 살핀 것은 오늘 3월 3일 자 일기였다. 일기 내용은 별 것 없었다. 첫 수업을 들었던 느낌이 전부였다.
그는 다음날인 3월 4일의 일기를 주목했다.
*
1987년 3월 4일 수요일. 첫 전공 수업이다. 전공이라 생각하니 은근히 긴장된다. 수업시간이 되자 교수님이 들어왔다. 나름 학계에서 유명한 교수님이라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깐깐하게 생겼다.
들어오자마자 교재 유무부터 확인하셨다. 교재 준비가 안 된 학생을 향해 정신상태가 글러 먹었다고 야단을 쳤다. 첫날부터 욕을 먹어 황당하다.
교수님께서 서양철학의 기원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크게 두 계파로 나눌 때 이오니아학파의 시작이 누구인가란 질문이었다. 철학과 학생이 철학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핀잔을 들었다.
다행히 한 학생이 아낙시만드로스란 정답을 말했고 질문은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관으로 넘어갔다. 이게 누구여? 나로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철학자다. 다음 시간까지 아낙시만드로스라는 철학자를 조사해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첫날부터 숙제가 넘치니 고생문이 트였다. 대학교 수업이란 게 이런 것인가.
*
유서준은 울상을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절로 웃음이 배어났다.
“전공 수업이 만만치 않은가 보네. 전공 수업이라면…….”
그는 시간표를 확인했다. 일학년들이 1학기에 수강하는 전공과목은 ‘서양고대철학’이란 과목이었다.
사실 그는 아직도 다이어리의 내용을 믿기 어려웠다. 미래가 적인 다이어리란 것을 쉽게 믿을 수 있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구인혁이란 룸메이트 이름은 일치했지만, 과연 다른 것도 맞을지 의문이었다.
그는 내일 전공수업시간으로 그 진위 여부를 한 번 더 확인해보겠다고 결심했다. 과연 그런 질문이 쏟아질 것인지, 또 그런 내용의 리포트가 주어질 것인지.
그렇다면 그가 준비해야 할 것은 분명했다. 일단 교재가 무엇인지 확인해서 교재를 준비해 간다. 그리고 아낙시만드로스란 이상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조사해 간다. 잘 대처하면 첫 수업을 흥미롭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다이어리를 넘겨 다음 장을 확인했다. 몇 장을 넘겼을까. 일기가 빠지는 날이 점차 많아졌다.
작심삼일이란 것이 이 경우에도 통용되나 보다. 아마 일기를 처음에는 꼬박꼬박 쓰려고 했겠지만, 점차 쓰는 것이 귀찮아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유서준은 자신의 대학 생활을 미리 가늠할 수 있는 것 같아 내심 미소를 지었다.
한 달쯤 뒤의 일기에서 그는 자신이 맞닥트린 고민을 발견했다. 철학에 관한 회의와 하고 싶었던 경제학에 대한 동경에 관한 것이었다. 일기 내용에는 재수까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결국 재수를 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의 전공에 대해, 또는 학교에 대해 대학에 들어온 후 고민을 하지 않은 학생이 있을까. 누구나 한번 고민을 한다고 들었었기에 그는 그리 실망스럽지 않았다.
역시나 그런 고민 때문인지 4월에 있었던 중간고사에서는 성적이 엉망이었던 모양이었다. 성적이 나쁘다고 탄식한 날이 며칠 보였다. 그 부분 역시 그로서는 이상하게도 그리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전교 1등이 곳곳에서 밟히는 이 학교 특성상 이곳에서도 최고를 유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시험 문제에 관한 내용은 전혀 적혀있지 않았다. 만일 시험 문제를 조금이라도 적어두었다면 그가 훨씬 쉽게 점수를 딸 수 있지 않았을까.
“일기를 쓰려면 좀 제대로 쓰지.”
유서준은 투덜대며 다이어리를 넘겼다.
중간고사를 친 직후부터 다이어리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 직후 그는 학생을 가르치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그 돈을 종잣돈 삼아 주식투자에 뛰어들었다. 경제와 금융을 전공하고 싶었던 그의 바람이 그런 식으로 나타났던 것 같았다.
물론 그의 투자실력은 시원치 않았다. 때로는 잃고 때로는 벌었다. 전반적으로 주식시장이 활황세였기에 그의 자산은 점차 불어났다. 그때부터 일기에 적힌 내용은 그날의 주가와 주식투자 결과를 요약해 놓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이어리를 넘기던 유서준의 안색이 달아올랐다. 갑자기 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
[1987년 3월 4일]2교시가 시작되는 오전 10시에 유서준은 전공 수업인 서양고대철학 수업을 들어갔다. 다른 수업과 달리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은 자신과 함께 입학한 철학과 신입생들이 전부였다.
그는 자리에 앉기 전에 강의실 내를 쭉 훑어보았다. 남녀 구성비는 여학생이 약간 많은 정도로 보였다. 학생들의 겉모습은 극과 극이었다. 반듯한 도시풍의 외모를 잘 가꾼 남녀이거나 수염도 깎지 않고 언제 세수했는지 알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한 학생들. 역시나 철학과다웠다.
유서준이 자리에 앉자마자 교수님 한 분이 들어왔다. 뿔테 안경에 치렁치렁한 머리, 콧수염을 기른 사십 대 중반의 남자 교수님이었다. 역시나 다이어리의 내용처럼 깐깐하게 느껴졌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학생들을 쭉 둘러보더니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교수 이정용.’
이정용 교수는 학생들과 잠시 눈을 마주치더니 칠판에 적은 자신의 이름을 지웠다. 곧바로 그는 다른 내용을 길게 적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칠판에 적힌 내용이었다.
모두가 당황하는 가운데 이정용 교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철학과 학생이다. 철학을 전공할 생각을 가졌다면 기초적인 철학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묻는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누가 대답해보기 바란다.”
학생들은 긴장하여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정용 교수는 앞자리의 몇몇 학생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하자 교수가 인상을 찡그렸다. 곧이어 그는 학생의 자질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그 끝은 교재 준비로 이어졌다.
“교재를 준비해온 사람 손들어.”
유서준은 이 장면이 다이어리에 적힌 바로 그 순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교재를 준비한 학생은 전체 중에 불과 넷.
“이래서 요즘 학생은 안 된다는 거야. 군인이 전쟁에 나가면서 무기를 버리고 가면 어떻게 되나? 학생이 책도 없이 수업에 들어와?”
이정용 교수의 화가 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 첫 수업이라…….”
앞자리에 앉은 학생이 변명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문제야. 철학이라 하니 동네 철학관을 연상하지 않나, 대체 여기에 앉아있는 이유가 뭐야?”
다소 거칠어진 교수의 질책에 강의실 내부가 조용해졌다.
교수가 눈을 번뜩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부터 몇 가지 물어보겠다. 서양 고대철학자 중에 누구를 알고 있지?”
“소크라테스요.”
“피타고라스요.”
“플라톤요.”
학생들의 다양한 대답이 쏟아졌다.
“고대 그리스철학은 크게 두 학파로 나뉜다. 이오니아학파와 이탈리아학파다. 이탈리아학파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로부터 시작된다. 이 학파에는 제논, 에피쿠로스 같은 철학자가 속해 있다. 그럼 이오니아 학파를 시작했던 사람은 누구냐?”
이정용 교수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서준은 약간 멍한 상태였다. 다이어리에 적힌 내용이 그대로 현실화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날 이후 적힌 다이어리의 모든 내용 역시 앞으로 순서대로 현실에 나타날 것을 뜻했다. 세 권이니 무려 지금부터 30년이나 되는 내용이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폭탄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정보다.
“아는 사람 없어? 요즘 학력고사 세대는 학교 교과서를 암기할 줄만 알지 그 깊은 내용을 전혀 몰라. 단답식 문제는 백날 풀어봐야 실질적인 지식을 얻기 힘들다. 여러분이 바로 단답식에 최적화된 그런 학생이지 않나? 대학에서는 하루빨리 그런 습성을 탈피해야 한다.”
한참 동안 담당 교수는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토로했다.
학생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정용 교수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시 한차례 교수의 매서운 눈초리가 돌아갔을 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아낙시만드로스입니다.”
대부분 학생이 누구인지 몰라 웅성댔다.
다소 화를 누그러트린 교수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냐?”
유서준은 어제 도서관에서 열심히 자료를 찾아 예습한 내용을 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정용 교수가 다시 호통을 쳤다.
“역대로 이렇게 무식한 학생은 처음이다. 여러분이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이란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어떡하나? 모르면 공부해야지. 자, 그래서 리포트를 내겠다. 아낙시만드로스를 조사해온다. 리포트 열 장 이상! 조금 전에 이름을 맞춘 학생은 내지 않아도 된다.”
아마 해마다 이런 식으로 초반에 학생들의 기를 죽여서 공부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유서준은 곧장 손을 들었다.
“넌 뭐야? 왜 손들어?”
이정용 교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해 대답하려 합니다.”
유서준은 냉큼 대답했다.
“해봐.”
“아낙시만드로스는 기원전 6세기의 철학자로 탈레스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최초로 자연철학에 대해 논문을 집필한 사람으로…….”
유서준은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해 밤새도록 외웠던 내용을 읊었다. 강의실 내 학생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이정용 교수 역시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리포트가 사라졌음도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