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54
55. 시간은 흐르고(1)
삐삐 음성사서함을 확인해보니 역시나 짐작하던 대로였다. 대한화섬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묻고 있었다.
유서준은 그녀에게 삐삐로 위치를 문의했다. 서울대학교 병원에 있다는 답변이 왔다.
그는 대학로 부근에 있는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황급히 떠났다.
서울대 병원 폐암 센터 입원실 복도에서 서하나를 만났다.
그녀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암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말을 예전에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아버지 상태가 안 좋아요?”
유서준은 조심스럽게 상세를 물었다.
서하나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직 검사 중이야. 그동안 폐암이 점차 진행되어 말기인 4기에 다다랐어. 병원에선 한계를 길어봐야 1년 정도로 보고 있나 본데 아직 모르겠어.”
그녀의 아버지는 폐암과 관련된 각종 치료제를 순차적으로 시험해보는 상태였다. 환자마다 제대로 작용하는 약이 다르기에 약을 찾는 과정을 밟고 있었다. 대개의 경우 제대로 된 약을 찾기 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외국에서 시도되는 표적 치료제 같은 고급약이나 약물을 국내에서 치료받는 것은 사실상 힘들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당분간 그 어려움을 벗어나기 쉽지 않겠지만.
서하나가 우울한 목소리로 조용하게 말했다.
“어제 갑자기 악화 되어 급하게 병원에 입원시켰어. 예전의 경험으로 보면 대략 한 달가량 입원해 계셔야 할 것 같아.”
“비용은?”
“아직은 내 월급으로 버티고 있어. 점차 쉽지 않아지겠지.”
그녀의 목소리에서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공적보험인 건강보험이 있다지만 아직 암 치료비용을 제대로 보장받는 것은 무리였다.
말기 암 단계까지 가면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치료를 계속해볼 거야. 나으실지도 모르잖아.”
유서준은 그녀의 어려움을 새삼 느꼈다. 그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안아주었다.
“아참, 대한화섬 정말 잘 오르더라. 네 말대로 다시 3차 상승이 시작되어서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어. 네가 점찍었던 15만 원대가 코앞이야. 이번엔 팔아야겠지?”
오늘 오전 대한화섬의 주가는 147900원이었다. 내일 하루 상한가면 15만 원을 돌파할 것이다.
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치 도달하면 팔아야죠. 월요일엔 일단 그냥 두고 화요일 하루 더 상한가 치면 절반을 파세요. 나머진 수요일 아침 장 시작할 때 모두 다 던지죠. 내 계좌의 것도 다 팔아주시고요.”
“너무 오르니까 도무지 감이 안 오더라. 저 PER 대표주인 태광산업도 만만치 않던데. 정말 네 말처럼 국내 최초로 20만 원 돌파할 것 같아.”
태광산업의 오늘 주가는 19만9천 원이었다. 월요일 다시 오르면 20만 원을 돌파하는 역사상 최초의 종목이 될 것이다. 지난 80년대 말 우리나라에서 10만 원을 돌파했던 최초의 종목은 소형 전자주였던 삼영전자였다. 그 기록을 섬유주인 태광산업이 갱신하는 것이다. 그 후발주자로 대한화섬도 주목받고 있었다. 적어도 선두주자인 태광산업이 오르는 한 대한화섬도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투자자는 저 PER 종목인 이 두 종목을 사려 했지만, 거래량 없이 점상으로 말아 올리는 기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서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즘 내 주변이 우울해서 기분이 그저 그런데 그나마 대한화섬을 보면 힘이 나. 고마워.”
유서준은 다소 자신이 무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장대한 자신의 계획에 동참시키기 위해 무려 3년이란 옵션을 걸어버린 것이 찜찜했다. 그 3년 동안 서하나는 아무리 돈이 필요해도 그 돈을 찾을 수 없다. 부모님 병환으로 돈이 많이 필요할 상황임에도.
어쨌건 그건 나중에 다시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 뵙고 갈래?”
서하나가 넌지시 제안했다.
유서준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온 것이니 뵙는 것이 도리일 듯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4인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반쯤 누워있는 그녀의 아버지는 생각보다 건강해 보였다.
다소 연로하긴 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말기 암 환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주름진 얼굴 위로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었다. 저 머리카락이 항암치료를 지속하면서 점차 다 빠지게 될 것이다.
“안녕하세요. 유서준이라 합니다.”
그는 꾸벅 인사를 드렸다.
그녀의 아버지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하나가 웬일로 남자도 다 데려오네.”
“잘 왔어요.”
그녀의 어머니가 환자 옆에 앉아있다가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서하나와 많이 닮았다. 다소 나이가 들었음에도 꽤 미인이었다. 서하나는 어머니를 닮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유서준에게 말했다.
“하나 애인이야? 우리 하나에게 잘 해줘.”
서하나가 손사래를 쳤다.
“어휴, 아버지, 아녀요. 애인 아녀요.”
아버지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옛날 같으면 너 나이 때 애를 몇씩이나 낳았어. 얼른 결혼하거라. 남자 너무 골라봐야 다 그게 그거야. 내가 죽기 전에 너 결혼 하는 건 보고 죽어야지.”
“죽긴 뭘 죽어? 손자 손녀 볼 때까지 살아야 해.”
그녀의 어머니가 곧바로 거들었다.
유서준은 그녀의 부모님을 보며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자기 고향의 부모님이 생각났다.
“얼른 날 잡아. 너 이제 서른 다 됐잖아?”
아버지가 다시 재촉했다.
서하나가 재빨리 유서준을 밖으로 끌어냈다.
“아직 서른 멀었어요. 잠시 나갔다가 올게요.”
두 사람은 병실을 나섰다.
서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그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참 주책이셔.”
유서준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자신이 지금 만으로 스물넷이니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이다. 다행히 아직 노처녀 소리를 들을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수명이 이제 일 년 남짓하다는 선고를 받은 이상 그녀는 앞으로 일 년 이내에 결혼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려면.
병원 복도를 걸으며 그는 서하나와의 결혼을 떠올려보았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일 년 뒤인 내년 여름에야 졸업하게 될 것이다. 그다음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증권사 같은 곳으로 취직을 할지 아니면 금융사를 설립할지. 일 년 뒤에 금융사 설립은 사실상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럼 백수일까.
어쨌든 일 년 이내의 결혼은 그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는 아쉽지만 서하나와는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은 만난 김에 부근 분식점에서 간단한 저녁 식사를 했다. 두 사람이 참으로 오랜만에 함께 한 식사자리였다.
**
5월 18일 월요일 아침 장이 시작되자마자 대한화섬은 3000원이 오른 상한가 150900원을 기록했다. 시가부터 상한가는 무너지지 않았고 거래량도 거의 없었다. 다음날에도 전날의 여세를 몰아 4000원이 오른 상한가를 찍었다. 154900원이었다.
서하나는 계획대로 전체 물량의 절반을 팔아치웠다. 매도 물량을 내자마자 곧바로 팔려나갔다. 다음날인 5월 20일, 서하나는 개장 동시호가에 상한가인 158900원에 남은 물량을 매도했다. 이틀간 매도 평균가는 156900원. 그녀가 사들였던 매수가가 28000원이었으니 한 주당 128900원의 이익을 봤다. 순익만 대략 4.6배가량이었다.
두 사람의 공동계좌는 불과 5달 만에 1억을 돌파했다. 유서준의 계좌는 대한화섬에 절반을 약간 넘게 투자했었고 이 주식으로 인한 수익만 6억원이나 되었다. 그동안 유서준이 틈틈이 매매한 수익까지 합하여 유서준의 계좌 잔고는 9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유서준의 잔고를 확인한 서하나는 고개만 설레설레 저었다.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엄청난 금액이었기 때문이다.
서하나가 잔고를 확인하고 유서준에게 연락하려고 전화기를 들었을 때였다.
직원 한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 지점장실로 가보라고 했다.
서하나는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지점장실 내에는 지점장 박필석이 평소와 달리 손님맞이용 소파에 거만한 인상으로 앉아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비슷한 나이 또래인 한 중년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서하나는 그 남자가 이 지점에서 최고의 금액을 예치하고 있다는 김사장이란 자임을 확인했다. 건설회사 사장이란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녀가 들어서자 지점장이 옆자리를 권했다. 서하나는 지점장의 옆, 김사장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서하나가 김사장을 향해 인사를 했다.
지점장이 그녀를 소개시켰다.
“우리 지점 최고의 인재라네. 고객들의 평도 좋고 계좌 수익률도 좋지.”
김사장이 그녀를 향해 눈동자를 굴리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민망하게도 한참 그녀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헤벌쭉 벌렸다.
“과연 미인이구먼.”
“감사합니다.”
서하나는 찜찜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지점장이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서대리가 김사장의 계좌를 관리해줘야겠어.”
“네?”
지금까지 김사장의 계좌는 명목상으로는 지점장이 관리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지점의 넘버 투라 할 박차장이 매매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는 사람, 그것도 건설업이라 입출금이 잦았다. 다른 계좌처럼 느긋하게 사놓고 기다리기 어려운 유형의 계좌였다. 한마디로 주식매매나 보유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계좌다. 대신 자주 매매하는 계좌라 수수료 수입이 좋아 실적 올리기는 그만이었다.
놀란 서하나의 표정에 지점장이 물었다.
“왜? 자신 없어?”
“아… 아뇨, 너무 뜻밖이라…….”
“우리 지점 최고 계좌라면 최고의 사원인 자네가 관리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지점장의 제안에 서하나는 쉽게 가부를 결정할 수 없었다. 물론 그녀가 가부를 결정할 위치도 아니었다. 맡으라면 맡아야 하는 게 직장의 규율이다.
망설이는 그녀를 보며 지점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혼자 부담된다면 부하 직원을 하나 붙여주지. 우리 막내 직원인 훈재 있잖아? 훈재더러 매매하라고 시켜. 자네는 감독만 하고.”
최훈재는 올해 입사한 막내 직원이었다. 부하 직원이 붙으면 손이야 다소 덜긴 하겠지만 그래 봐야 책임은 어차피 그녀가 져야 한다.
그녀를 향해 김사장이 온화한 얼굴로 권유했다.
“내 계좌를 맡아주게. 자네 실력이 좋다고 해서 맡기고 싶어. 난 큰 수익 바라지 않아. 그냥 평균적이면 된다니까.”
일임 계좌를 싫어하는 그녀였기에 웬만하면 고객계좌를 일임하는 경우는 없었다. 지점장도 그런 그녀의 성향을 알고 있어서 지금까지 고객의 계좌를 굳이 그녀에게 넘기려 하지 않았다.
지점장이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 계좌를 맡으면 실적도 팍 올라갈 거야. 지금 서대리가 관리하는 계좌 가운데 큰 건은 하나도 없잖나?”
이제는 실적을 들먹이며 유혹하기 시작했다.
서하나는 다소 이상함을 느꼈다. 분명히 지점장이 그녀 좋아지라고 이런 일을 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지점장이 결론을 내렸다.
“그럼 맡은 것으로 하겠네.”
당황한 서하나는 김사장에게 요구 사항을 말했다.
“저는 일임매매를 하지 않습니다. 모두 고객이 시킨 매매를 대행할 뿐이죠.”
“그럼 자네가 결정해서 나에게 알려주게. 그럼 내가 선택이나 가부를 결정할 거니까. 그것은 일임매매가 아니잖나? 투자 조언이지.”
“맞아, 투자 조언. 하하.”
김사장의 말에 지점장이 맞장구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이 서하나는 김사장의 계좌를 관리해주기로 했다.
김사장의 눈길이 서하나의 다리에 머물렀다.
회사 유니폼인 짧은 치마를 입고 소파에 앉은 상태라 손으로 가리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상대의 음탕한 눈길을 의식한 그녀는 치마가 벌어지지 않도록 단정하게 여미며 무릎을 모았다.
상대의 눈길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을 때 지점장이 말했다.
“그럼 나가보게.”
서하나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서는 순간에도 김사장의 눈길이 치마 속을 파고드는 것을 그녀는 알아챘다.
지점장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김사장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날렸다.
“몸매가 죽이는군.”
“흐흐, 그렇지? 내가 저년을 부리는 재미로 이 지점을 못 떠난다니까.”
지점장이 맞장구쳤다.
김사장이 머리를 맞대고 속삭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방법이야 많잖나? 매매할 때마다 전화로 아름다운 목소리 듣는 것만 해도 그게 어딘가? 가끔 계좌 관리 하는 것 수고한답시고 불러내서 회식도 같이하는 거지. 그러다가 사고 한번 나면 그것을 빌미로 옭아매면 돼. 흐흐, 김사장, 나에게 평생 고마워해야 할 거야. 생애 최고의 미인을 따먹을 기회를 마련해 줄 테니까.”
지점장이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으흐흐흐.”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