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56
57. 시간은 흐르고(3)
8월 말을 기점으로 주식시장은 상승으로 돌아섰다.
하락에 젖어있던 투자자는 상승을 의심했다. 대부분이 약간의 상승에 조금이라도 원금을 건지려고 팔아치웠다. 급한 매물이 소화되고 나면 시장은 본격적으로 상승 기조를 내보일 것이다.
92년 하반기는 대통령 선거가 최대 이슈였다.
여당인 민자당 최고 권력자인 김영삼 대표는 업무를 중단하고 거제도로 귀향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대통령이나 5공 세력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 과정을 거치며 그는 여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야당인 평민당의 김대중 대표는 대적할 자가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대통령 후보에 올랐다.
이변은 경제계에서 나왔다.
대한민국 1위의 최대그룹 현대가의 회장이었던 정주영이 국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이다. 반 재벌 정서를 갖고 있던 국민은 정주영을 마냥 반기지 않았다. 3김 정치에 식상했지만 그렇다고 재벌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 최대그룹을 맨손으로 일구었던 정주영 후보는 이층고속도로와 수도권 반값 아파트라는 파격적인 공약을 들고 나왔다. 국민은 반신반의했다.
92년 14대 대선에서 국민은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라던 김영삼을 선택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장식했던 군부 시대가 종식된 것이다.
새 정부에 대한 기대와 함께 1992년 주식시장은 678.44로 마감했다. 8월에 깨진 500선을 회복하고 600선마저 훌쩍 넘어서 전년 대비 11%의 상승으로 마감했다.
서하나가 집중 관리한 유서준의 계좌 역시 소소한 수익을 냈다.
두 사람은 연말에 만나 한 해 동안 선방했던 축하연을 열었지만, 더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이날 유서준은 다이어리에 현재의 자산을 기록했다.
*
1992년 12월 31일, 총자산 9억 9천3백만 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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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시대를 부르짖으면서 야심 찬 출발을 보였던 1993년은 시작부터 시련을 맞았다.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부터 큰 사고가 잇달아 터졌다. 27명이 사망한 우암아파트 붕괴, 78명이 숨진 구포역 열차 사고, 34명이 숨진 정신병원 방화, 66명이 사망한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 사고가 연달아 일어났다. 이 사고는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로 이양되면서 해이해진 국민 탓이란 소문이 돌았다. 정부에서는 사고를 줄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정작 더 큰 사고는 그다음 해에 일어난다.
93년 2월, 유서준은 구인혁과 헤어지는 시간을 맞이했다.
구인혁은 서울대 물리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그는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표준연구원에 입사했다. 군대 문제는 전문 연구 요원 제도를 통해 자연히 해결되었다.
구인혁은 시공간 문제 해결을 위해 각고 노력했지만,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아직 개념 정립이 되지 않은 물리학적 문제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타임머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개발되어야 할 전자부품이 너무 많아 현재는 불가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아직은 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남아있는 것이다.
유서준은 구인혁과 헤어지기 직전 자신을 괴롭혀왔던 문제에 대해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자, 문제를 하나 내볼게. 2027년에 미래의 구인혁이 다이어리를 현재로 보냈어. 그렇지?”
구인혁이 그에게 물었다.
유서준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현재의 넌 다이어리를 얻고 뭔가를 하게 돼. 그리고 시간이 미래로 흘러 2027년이 됐어. 만일 그때의 구인혁이 다이어리를 과거로 보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유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복잡하고 난해했다.
구인혁이 설명했다.
“대 전제조건이 있어. 미래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하지만 현재는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예를 들어 지금 네가 열심히 노력하면 미래의 너는 잘살게 되겠지. 즉 미래가 바뀌는 거야. 현재의 사건이 미래를 바꾸는 거지. 반면 미래에 네가 아무리 잘살게 되었다고 해서 과거의 가난했던 그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냐. 즉 과거는 변치 않아.”
“그렇다면 미래의 구인혁이 타임머신을 만들든 만들지 않든 다이어리는 이미 과거로 와 있으니까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지?”
“빙고!”
구인혁이 엄지손가락을 내보였다.
유서준은 잠시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했다. 점차 안개가 걷혀가는 기분이었다.
구인혁이 다시 말했다.
“현재의 추측으로는 미래의 구인혁은 어떤 정보를 과거의 LTCM에 넘겼어. 이 때문에 미래의 참사가 발생했지.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유서준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래의 네가 정보를 보내지 못하게 만들면 되잖아? 예를 들면 타임머신을 만들지 않는다든가.”
구인혁이 고개를 저었다.
“정보를 보내는 시점에서 정보가 흘러간 시대는 이미 과거야. 즉 바뀌지 않아. 내가 타임머신을 만들든 만들지 않든 정보가 LTCM에 주어진 사실은 절대 변할 수 없다는 말이지. 마찬가지로 다이어리도 똑같아. 앞으로 내가 타임머신을 만들지 않더라도 이 다이어리는 없어지지 않아. 이미 과거의 한 시간을 점유한 거니까.”
“그렇다면 타임머신을 못 만들게 한다고 해서, 또 정보를 못 보내게 한다고 해서 그 시점의 과거가 바뀌지 않는다는 거네?”
“그렇지.”
어딘지 모르게 어렴풋하게 정리가 되는 것 같았다.
구인혁이 그의 표정에 만족스러운 기색을 내보였다.
“유일하게 막을 방법은 미래의 정보를 얻은 LTCM을 방해하는 것뿐이야. 예를 들어 2027년에 미래의 정보를 2020년에 보냈다고 한다면 이를 막는 방법은 2027년에는 불가능해. 왜냐하면 2027년 시점에서 2020년은 이미 고정된 과거니까. 유일한 방법은 2027년이 아니라 2020년에서 정보를 못 받게 해야 해. 남아있는 다른 방법은 다른 정보를 과거로 보내어 더 이전 과거의 시대에서 과거를 지워야 해. 이게 다이어리가 보내진 이유지.”
구인혁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찌 알겠어? 미래의 정보를 LTCM이 언제 어디에서 받게 되는지. 즉 LTCM이 정보를 얻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지.”
“결론이 뭐야?”
“미래에 유서준 네가 세우는 SJ 투자금융이 LTCM을 이겨야 외환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거야. 너무 단순한 결론인가?”
다른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결론이었다. 부담감이 백배 가중되긴 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의 손에 나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노력하면 뭔가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유서준에게 구인혁이 말을 덧붙였다.
“이것이 확실하게 알리는 사실이 있어. 이제 나 구인혁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앞으로 없다는 뜻이야. 지금 내가 타임머신을 개발하지 않더라도 이미 다 벌어지는 일이니까. 다만 결국 네가 실패해서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미래의 구인혁은 다른 계획을 세울지도 모르지. 다시 정보를 과거로 보내서 새로운 시도를 할 가능성은 남아있어.”
“흠, 그냥 책임을 회피하고 싶다는 의미로 들리는데.”
“하하.”
구인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었다.
“미래의 내가 과거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인혁이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번뜩 떠오른 생각에 유서준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래, LTCM은 성공했다고 여긴다면 내가 타임머신을 개발하지 못하게 할 거야. 원래는 개발하게 유도했던 것을 이제는 개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겠지.”
생각지도 못했던 결과가 튀어나왔다.
유서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개발하려 한다면…….”
“LTCM은 날 죽이려 들 거야.”
유서준은 구인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런 무서운 말을 태연하게 하는 그가 신기했다.
구인혁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먼 훗날 내가 타임머신을 만들려고 하면 난 위험해질 거야. 그땐 네가 날 구해줘야 해.”
유서준은 할 말을 잃었다.
구인혁이 말을 덧붙였다.
“예전에 네가 말했던 2001년에 죽었다던 그 여자. 너의 신부가 되었을 그 여자. 누군지 알아냈어?”
유서준은 고개를 저었다. 2001년의 다이어리에 적힌 그 사건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날을 전후로 몇 번이고 다이어리를 읽어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눈에 띄는 사건이 하나 있긴 했다.
*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티비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속보가 떴다. America is under attack. 미국 주식시장은 문을 닫았다. 내일 우리나라 시장이 걱정된다. 젠장, 풋을 샀으면 대박인데 콜을 사서 쪽박이다.
*
그녀가 죽었다던 날로부터 대략 2주일가량 전에 적혀 있던 내용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이날의 일기를 몇 번이고 읽어보았지만,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국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 세계 최강국 미국이? 세계대전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소련도 붕괴된 마당에 갑자기 무슨 소리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미국 주식시장이 문을 닫았다면 분명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전쟁 외에 떠오르는 사건은 없었다.
게다가 풋? 콜? 이건 또 무슨 이야긴지. 완전히 암호를 보는 기분이었다.
유서준이 다이어리를 떠올리며 고민하고 있을 때 구인혁이 말했다.
“지금 너랑 가까운 여자라면 딱 둘이잖아? 현아랑 그 선배라는 여자.”
“응, 하지만 현아랑은 이제 완전히 끊어졌다고 봐야지.”
구인혁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사람 인연이란 모르는 거야. 훗날 다시 만날 수도 있어. 어쨌든 내가 보기에 그 선배라는 여자는 만일 네가 다이어리를 갖고 있지 않았던 경우라면 가까워지기 어렵지 않았을까?”
유서준은 다이어리에 적힌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벌고 잃고의 무한반복이었다. 장이 좋으면 약간 벌었다가 장이 나빠지면 손해를 보았다. 그런 평범했던 그에게 과연 서하나가 관심을 가졌을까? 물론 그가 적극적으로 상담을 받았다면 모르지만 아마 절대 그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서하나는 단지 얼굴만 아는 사이였을 확률이 높았다.
“아마 그랬겠지?”
“나도 그랬을 거로 생각해.”
구인혁이 거들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서하나가 유서준이 주식 고수여서 돈 때문에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와 유서준 사이는 주식이란 매개체가, 그것도 고수라는 매개체가 반드시 존재해야 했다.
“그렇다면 그 선배라는 여인은 아니지. 상식적으로 2001년이면 그녀의 나이가 서른여섯이야. 그때까지 사랑하는 사이임에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뭔가 이상해.”
“응.”
유서준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한 명이 남았다. 바로 김현아였다. 물론 2001년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 다른 여자가 나타날 수도 있었다.
“내 생각에는 현아가 맞아. 죽은 여자는.”
구인혁의 음성이 섬뜩하게 들려왔다.
유서준은 불안한 생각이 들어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보니 다이어리의 그 사건과는 얼추 맞아떨어졌다. 김현아가 미국으로 유학 갔으니. 미국이 공격을 당하고 현아가 그때 죽었다?
그렇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이 뭘까? 현아가 죽지 않기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이 미국을 전쟁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란 말일까? 이건 규모에서 그가 건드리기엔 너무 거대한 부분이었다. 다이어리 정도로 해결 가능한 문제도 아니고.
미국에 있을 현아를 국내로 데려와서 목숨을 건지게 한다? 이건 나름대로 가능성 있는 소리이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끼워 맞춘 느낌이 강했다.
“유서준, 넌 그때쯤 해서 현아를 잘 지켜보고 있다가 현아를 구해줘야 해. 그게 다이어리의 중요한 목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