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6
6. 신학기 시작(2)
대부분의 대학 신입생에게 3월은 술과 미팅이라는 비슷한 생활이 반복된다. 상당수가 술로 점철된 하루를 보내는 것도 당연지사.
이 기간 신입생 생활의 핵심은 선배와의 만남이다. 학과, 동문회,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를 거치며 선배를 만나고 신입생은 대학 문화 속으로 스며든다.
유서준도 마찬가지였다.
3월 둘째 주가 지나갈 무렵 그는 동문회 선배를 만났다. 강원도에 자리한 시골 남자 고등학교를 나온 그에게 바로 위 학년 선배는 없었다. 그보다 이 년 위의 선배 한 명이 전부였다.
서울의 유명 고등학교는 한해에 스무 명 이상씩 서울대에 진학시켰지만, 그가 나온 학교는 몇 년에 걸쳐 한 명씩이었다. 단 둘뿐이었기에 동문회랄 것도 없었지만 덕분에 그 정은 상당히 끈끈했다.
유서준의 선배 한석현은 경영학과를 다녔다. 처음 그를 만났던 날 유서준은 자신도 경영학과에 진학하여 직속 후배가 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한석현 선배와 만난 그날 그는 선배가 주는 술을 족족 받아 마셨다.
술이 은근히 많이 들어가 정신이 혼란스러울 때 한석현 선배가 그에게 물었다.
“서준아, 너 과외 해볼 생각 있니?”
중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개인 과외 아르바이트는 5공화국에 들어서면서 전면 금지된 상태였다. 초기에는 그 서슬 시퍼런 칼날이 두려워 아무도 감히 과외 할 생각을 못 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입주 과외 형태가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일반적인 방문 과외로 바뀌었다. 지금 현재도 서민들은 당국의 눈이 무서워 과외를 할 수 없었지만, 권력가나 부잣집이라면 빠짐없이 몰래 과외를 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학생은 과외를 몰래바이트라 불렀다.
“몰래바이트요?”
“응, 내가 하던 곳인데 요즘 바빠져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려고. 네가 딱 맞을 것 같다.”
보통 때였다면 유서준은 감히 과외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장된 법이지만 아직 법을 어긴다는 생각을 하기엔 너무 순진한 그였다.
순간 그의 머리에 오늘 자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
1987년 3월 13일 금요일. 동문회 선배를 만났다. 2년 위 선배다. 술을 마시다가 선배가 과외를 해볼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정부에서 과외를 단속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바가 있어 망설여졌다. 일단 거절했다.
*
다이어리 내용으로 보면 결국 그는 중간고사를 친 다음 과외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아르바이트에서 번 돈이 종잣돈이 되어 주식투자의 세계로 뛰어들었었다.
시기로 보아 그 과외는 지금 선배가 권하는 곳과는 다른 곳일 확률이 높았다. 순간 그는 고민했다. 자신이 다른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될까. 미래가 달라질 것인가.
첫 전공 수업시간이 떠올랐다. 그가 교수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함으로써 리포트가 사라졌다. 미래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매우 민감한 문제였다. 미래가 바뀐다면 얼마나 바뀔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최근 유행하는 카오스이론이 생각났다. 중국 북경의 나비가 날개를 저으면 미국 뉴욕에서는 폭풍이 일어난다는 이론이다. 초기의 작은 조건이 점차 증폭되어 나중에는 커다란 변화를 유발한다는 의미로 나비이론이라고 표현되기도 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지금 다르게 선택하는 작은 변화가 훗날 엄청난 변혁을 유발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가급적 미래에 적게 영향을 주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까, 그게 아니면 많은 부분을 바꾸어야 할까. 미래의 다이어리를 자신에게 보낸 미래의 구인혁은 과연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아직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지금 퍼마신 술이 그를 호기롭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다이어리의 활용도를 빨리 시험해보고 싶었다. 나아가 미래의 변화까지.
“그 과외자리 저에게 주세요. 마침 용돈도 부족하고…….”
용돈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었다. 다달이 부모님이 기숙사비와 약간의 용돈을 보내오기로 했지만, 그것은 식비 정도면 끝이었다. 친구들과 커피 한 잔, 술 한 잔 마시기도 어려운 것이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학생의 현실이었다. 등록금까지 자신이 벌어 부담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용돈이나 기숙사 생활비 정도는 부모님의 손을 덜어주고 싶었다. 물론 선배도 그 사실을 익히 알기에 그에게 권유하는 것일 거다.
“한 달에 얼마 주는데요?”
다소 민감한 문제이긴 했지만 유서준은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선배 한석현이 그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으면서 껄껄 웃었다.
“그래, 그래. 그게 제일 중요한 거니까. 그 집이 조금 잘 살아. 아버지가 국민투자신탁 펀드매니저라더라.”
“펀드매니저…….”
물론 유서준은 펀드매니저란 직업에 대해 몰랐다. 또 국민투자신탁이란 회사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당시 우리나라는 금융회사가 분야별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고객의 돈을 일임받아 투자할 수 있는 투자신탁업이 가능한 곳은 3대 투신사라 불렸던 한국투자신탁, 대한투자신탁, 국민투자신탁 세 곳뿐이었다.
1986년부터 주식시장이 활황기에 접어들며 주가가 크게 상승했기에 고객의 돈을 모아 주식을 사고파는 펀드매니저란 직종이 꽤 인기를 얻고 친숙해졌다. 당연히 그들의 연봉 역시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과외비가 좀 세다. 한 달에 이십 오만 원이다.”
한 달 기숙사비가 10만 원 남짓이었고, 서울대 등록금이 100만 원이 채 안 되었기에 25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헤벌쭉 입이 벌어지는 나를 향해 선배가 뒤통수를 쳤다.
“으이그, 더 중요한 게 있어.”
머리가 아파 인상을 찡그리는 나에게 선배가 말했다.
“과외받는 애가 현재 고등학교 2학년 문과생인데 엄청 예쁘다.”
“여학생?”
“공부도 잘해.”
“네?”
여학생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남자 대학생에게 여고생 과외를 의뢰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으니까.
“이왕이면 예쁜 애랑 과외 하면 좋잖아? 나중에 잘 될지 알아?”
물론 유서준에게 그런 사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지금 단계에선 생각 밖이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유서준에게 선배가 덧붙여 말했다.
“목표가 연세대 들어가는 것이라더라. 강남 아이들 특징이 영어 하나는 잘하잖아? 영어는 손볼 필요 없고 수학만 가르치면 돼. 시간 나면 국어나 사회과목도 봐주고. 연세대 입학 정도는 네가 조금만 잘 봐주면 가능할 거다.”
시골 출신인 유서준은 상대적으로 영어보다 수학을 잘 했다. 그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언제부터 시작해요?”
유서준이 적극적으로 묻자 한석현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역시 예쁜 애라니까 관심이 동하나 보네.”
“아, 그런 것 아니라니까요.”
“나야 네가 빨리 맡아줄수록 좋지. 그래야 내가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유서준으로서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았다.
자신이 관심을 가진 경제 관련 투자를 실험한다는 것이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다이어리에 따르면 그의 일생은 주식투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였다. 과외를 통해 번 돈을 주식투자로 돌리면 그 다이어리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아가 그것은 그의 인생과 국가의 운명을 바꾸게 될 것이다. 다이어리에서 나온 편지가 옳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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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를 의뢰한 집은 강남 대치동의 은마아파트에 있었다. 강남 8학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아파트. 서울에서 비교적 잘 사는 중산층이 밀집한 동네인 데다 교육열이 높기로 소문난 곳이다.
주소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간 그곳에 도착했을 때 유서준은 내심 기가 질렸다. 시골에 있는 그의 집과는 다르게 번쩍번쩍 빛나는 아파트 내부 장식은 꽤 화려해 보였다. 운동장처럼 느껴지는 넓은 거실은 분위기를 환기하는 장식나무로 꾸며져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를 맞이한 것은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안경을 쓴 인상이 다소 날카로웠으나 한때 꽤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음 직했다.
유서준은 아주머니가 안내해 준 소파에 앉았다.
마실 것을 내온 아주머니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유서준 학생이라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아주머니가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유서준의 인상은 언뜻 보면 산적처럼 생겼다. 물론 그의 체구 때문이었다. 하지만 찬찬히 얼굴을 살펴보면 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청년 모습이라 절대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 물론 샤프하게 보이는 천재형이거나 꽃미남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인상을 보니 성격이 참 순할 것 같군요. 과외는 처음이죠? 이제 입학했으니…….”
“네, 과외는 처음입니다.”
유서준은 긴장감을 떨치며 대답했다. 뭐, 순박한 인상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실제로 순박하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아주머니가 본격적으로 과외 학습에 대한 내용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선배에게서 들었던 것과 같았다.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목은 국어와 수학이었다. 특히 이 학생은 수학이 약하다고 했다. 반면 영어는 상당히 잘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나. 국어와 수학 과목은 그가 잘하는 과목이었기에 부담은 없었다.
“사실 우리 애가 선생님 성향을 많이 타요. 칭찬해주면 애가 신나서 열심히 하고 그 반대면 죽으라고 안 해요. 애를 잘 구슬려서 가르쳐주길 바라요. 선생님과 잘 맞으면 생각보다 손은 별로 가지 않을 거예요.”
유서준은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아주머니가 마음에 들었다. 많은 것을 무리하게 요구할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지갑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그녀는 유서준에게 곧바로 봉투를 넘겼다.
“약속한 대로 25만 원 선불이고요. 매달 이 날짜에 맞춰 줄 거예요. 만일 애 성적이 오르면 보너스도 드릴 용의가 있답니다.”
계산 하나는 시원시원했다. 잘 사는 집이라 그런가.
돈을 받으니 절로 미소가 어렸다. 유서준은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가방에 봉투를 넣었다. 이 돈은 앞으로 그에게 주식투자를 위한 기초 자금이 되어 줄 것이다.
“곧 애가 올 거예요. 오늘은 야간자습을 절반만 하고 일찍 온다고 했거든요.”
아주머니가 다과를 가져와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과일을 먹으면서 학생을 기다렸다.
저녁 8시가 약간 넘었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리고 한 여학생이 들어왔다.
유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여학생이 다가와 꾸벅 인사부터 했다. 살짝 덤벙대는 느낌이 드는 게 밝은 성격으로 보였다.
여학생이 얼굴을 들었을 때 유서준은 내심 놀랐다. 듣던 바대로 아주머니를 꽤 많이 닮아 미인형의 얼굴이었다. 키는 다소 작은 편에 볼에 살이 약간 올라있어 상당히 귀여운 타입. 만일 훗날 화장이 약간 받쳐준다면 한 인물 할 것이 분명했다.
유서준이 자신을 소개하기도 전에 아주머니가 먼저 소개했다.
“오늘부터 네 공부를 봐줄 선생님이란다. 이미 이야기 들었지?”
여학생이 맞은편에 앉아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산적 같은 그의 모습에 처음에는 다소 겁을 먹은 것 같더니 곧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송예은입니다.”
여학생이 자신을 소개했다.
순간 유서준은 벼락이 머리를 강타하는 쇼크를 받았다. 송예은. 분명 들어보았던 이름이었다. 바로 미래에서 보내진 편지에 언급된 인물이었다. 훗날 국제투기자본인 LTCM에 들어가 우리나라 자본을 망치는 데 앞장섰다고 했던가.
“설마 아니겠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도 많으니까. 눈앞에 있는 순진하게 생긴 여학생이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일 사람으로 생각되진 않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을 본 여학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곧바로 정색하며 물었다.
“학교 공부는 어떠니? 수학 문제집은 무엇을 풀고 있지?”
간략하게 앞으로의 공부에 대해 전반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대부분 그녀의 어머니와 이미 맞추어 놓은 데다 학생 역시 본인이 해야 할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첫날은 송예은 학생의 실력을 간단히 테스트하는 것으로 끝났다. 학생의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무엇보다 밝은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어쨌든 예상했던 것처럼 과외 대상으로 그리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