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63
64. 음흉한 마수(1)
서하나는 퇴근과 동시에 가도건설로 갔다.
더운 여름, 길거리를 걷는 것마저 쉽지 않았지만 따질 겨를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든 계좌를 옮겨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가도건설은 한강 남쪽 서초동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 평범한 지상 오 층 건물에서 한 층을 사용하는 사무실은 여느 건설회사 사무실답게 어수선했다.
토요일 오후였지만 사무실에는 꽤 많은 사람이 남아있었다. 건설 현장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흑판에 그려진 상황판을 보니 분당 쪽에 꽤 많은 아파트 건설을 하청받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하나는 안내 직원을 따라 사장실로 들어갔다.
비교적 넓은 실내 공간에 커다란 검은색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외부와 달리 에어컨이 켜진 실내는 꽤 시원했다.
가도건설 김사장은 소파의 중앙에 앉아 험상궂은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그녀는 상대방을 향해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지난번 호텔에서 그 난리를 친 이후로 사흘 만에 보는 셈이다.
김사장이 그녀를 흘낏 보고는 곧바로 아무 말 없이 자신의 할 일을 계속했다. 서하나는 앉기도 서기도 애매한 상황에 빠졌다. 마치 자신을 못 본 듯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모양새였다.
서하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황이 어려우리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힘들 것 같다는 느낌만 왔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가라앉은 김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왔나?”
상대방도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를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서하나는 용기를 내어 또박또박 말했다.
“계좌를 그대로 유지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김사장의 기분 나쁜 눈초리가 그녀를 슬쩍 쳐다보았다.
“난 이번에 너 때문에 부도를 맞게 생겼어. 그러고도 그런 말이 나와?”
김사장의 음성에 신랄함이 묻어있었다.
서하나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이번에 실명제가 그렇게 전격적으로 시행될 줄 몰랐습니다.”
“그것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나?”
“주식 관련 건은 예전에 미리 말씀드렸던 사항입니다. 회식 때도 다시 확인했고요.”
“그걸 말이라고 해? 나로선 그런 건 전문가가 다 알아서 한다고 생각하지 않겠나?”
김사장의 음성이 점점 올라갔다.
서하나는 할 말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같이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다시 상기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곧바로 한발 후퇴했다. 어쨌든 상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해야 했다.
김사장의 눈길이 그녀를 쓱 훑고는 빈정대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뻔뻔하군. 그날 뺨을 때리지 않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다시 사정하려 할 때였다.
사장실 문이 열리며 안내 아가씨가 들어왔다.
“명동 이대표께서 오셨습니다.”
김사장이 황급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명동 인베스트먼트의 이영호 대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유서준이 그를 보좌하며 따라 들어왔다.
서하나는 유서준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유서준 역시 그녀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곤란함을 느낀 서하나는 한쪽으로 물러서며 유서준에게서 시선을 뗐다.
유서준은 그녀가 아는 척하는 것을 원치 않음을 눈치챘다.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지는 대략 짐작이 갔다. 가도건설 김사장이 증권사에 맡겨둔 계좌를 그녀가 관리하고 있었으니 분명히 자금 흐름 문제 때문일 것이다. 실명제로 인하여 금융시장이 경색된 상황에서 이런 하청 건설사는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테니까.
그는 서하나가 이곳에 온 것이 정상적인 업무 관련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김사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에 한 번 보았던, 음흉한 눈빛을 지닌 반 대머리 사내가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외모에 기분 나쁜 표정도 여전했다.
김사장은 이영호를 극진하게 맞았다. 마치 살이라도 베어줄 것처럼.
곧바로 커피와 음료수가 들어왔다. 이것 역시 정성을 들인 티가 역력했다.
탁자를 가운데 두고 이영호와 김사장이 마주 앉았다. 유서준도 이영호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유서준은 조용히 커피를 음미했다.
“이 분은 누구입니까?”
김사장이 유서준의 존재를 의식하고 이영호에게 물었다.
“아, 우리 회사 직원이네. 요즘 나를 수행하고 있지.”
이영호가 유서준을 소개했다.
“유서준입니다.”
“가도건설 사장 김만학이네.”
김사장이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유서준은 명함을 주지 않았다. 굳이 건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가도건설 측의 실무자 한 사람이 더 들어온 다음 대부에 관한 실질적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영호가 관련 서류철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대출금이 많은데…….”
“건설회사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파트 단지를 짓는 대형건설사 보십시오. 그게 어디 자기 돈으로 짓는답니까? 전부 은행 돈이죠.”
김사장이 황급히 해명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지금이 비상사태라는 것에서 차이가 있다.
“알고 있다네. 하지만 지금 때가 때인 만큼 문제가 되지. 다음 주가 되면 넘어지는 기업이 숱하게 나올 거야.”
중소기업 가운데에는 대부업체의 사채를 빌려 연명하는 기업도 많았다. 실명제로 대부업체의 자금이 묶인 곳이 많아 기업이 돈을 빌리기 어려워진 것이다.
이영호가 서류철을 세세하게 살폈다.
유서준은 옆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영호가 손가락으로 문제 부분을 짚을 때마다 김사장 옆의 실무자가 곧바로 설명했다.
서하나는 완전히 투명인간이 되었다. 그녀는 어느 쪽에도 낄 수 없었다. 그녀는 한쪽 구석에 서서 그들의 협상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윽고 이영호가 서류를 덮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만기로 돌아오는 어음을 막아야 하고, 목요일 날 돌아오는 게 또 있고…… 자금 경색에서 벗어나려면 3주 뒤 시행사에서 대금을 지급해야 가능하다 이런 말인데…… 맞나?”
“예, 그렇습니다. 3주 후면 확실히 다 해결됩니다. 그때까지만 빌려주시면…….”
김사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얼마나 필요한가?”
“대략 40억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이영호가 한참 뜸을 들였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보였다.
김사장은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마침내 이영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기색을 보였다.
“알았네. 검토 후 별일 없다면 빌려주도록 하지. 그 대신 이자는 최고 수준이네. 요즘 시기가 시기인 만큼. 어떤가?”
“당연하지요. 빌려만 주신다면 그 정도는 감수하겠습니다.”
김사장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피어났다.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일 것이다.
유서준은 김사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 모든 결정은 이영호 대표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다 서하나가 관리하던 계좌와 연결된 사장이니 부도가 나는 것에 비하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슬쩍 서하나를 쳐다보았다. 이곳 회의와 무관하게 그녀는 한쪽 구석에 서서 멀뚱거리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의 행동이 다소 이상해 보였다. 안색도 어두웠다. 다소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
그와 눈빛이 마주친 서하나는 시선을 외면했다.
잠시 후 모든 것이 마무리되자 이영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서준 역시 따라서 일어났다.
김사장이 연신 굽신거리며 두 사람을 배웅했다.
이영호와 유서준이 밖으로 나가고 잠시 후 혼자 돌아온 김사장이 문을 닫았다.
김사장이 소파에 앉더니 깊은숨을 들이켰다. 안도하는 숨이었다.
서하나는 다시 그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일은 잘 해결되었는지요?”
김사장이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년이 싸지른 문제를 지금 해결한 거다.”
“죄송합니다.”
무례한 말을 들었건만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김사장이 서류를 정리하며 그녀를 무시한 채 자신이 할 일을 계속했다.
서하나는 김사장의 옆에 멍하니 서서 다시 한참을 기다렸다.
얼마 뒤 김사장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서하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탁드립니다. 계좌를 유지해주십시오. 앞으로 잘 해드리겠습니다.”
“흥.”
김사장이 콧방귀를 끼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서하나는 주먹을 쥐고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이대로 물러나야 할까.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지점장이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계좌만은 유지해야 한다고. 거기에다 그녀의 아버지 병환을 구실로 위협했던 일도.
서하나의 온몸이 떨렸다. 그녀는 결심을 굳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는 김사장이 앉아있는 소파 옆에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 바닥의 하얀 타일이 그녀의 무릎에 닿았다. 더운 여름이라 스타킹도 신지 않은 상태에서 에어컨 바람 때문에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는 김사장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감돌았다. 자기 뜻대로 되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상대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서하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바로 앞에 소파에 앉은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사흘 전에 내 뺨을 때리고 도망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그런 소리를 해?”
김사장이 지난번 일을 꺼냈다.
서하나는 굴욕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김사장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계좌를 옮겨가면 회사에서 쫓겨날 거란 경고를 들었나 본데 그런가?”
서하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지점장에게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김사장의 눈빛이 이리처럼 그녀를 훑었다. 서하나는 섬뜩한 느낌이 들어 그 눈길을 피했다.
서서히 김사장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서하나의 하얀색 블라우스와 그 아래로 이어진 단아한 남색 스커트로 내려갔다. 스커트 앞으로 머리를 내민 새하얀 허벅지와 무릎으로.
꿇어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서하나를 향해 김사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치마 올려봐.”
순간 서하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네?”
반문하는 그녀를 보며 김사장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기 올 때 그만한 각오도 없이 왔나?”
서하나는 김사장의 질책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김사장이 탐욕스러운 눈빛을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 강요할 생각은 없어. 실수했으면 그만한 벌을 받아야지. 내 계좌를 유지하게 하려면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을까? 싫으면 말아. 쫓겨나든 말든 난 상관 하지 않을 테니.”
서하나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분노가 저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일어나서 때려치우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이대로 돌아가면 지점장은 분명히 그녀를 해고할 것이다. 퇴직금이라도 건지려면 사표를 내야 한다. 아버지의 암 치료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고 있다. 지금 현재도 버티기 쉽지 않은데 실업자가 된 상태에서 과연 버틸 재간이 있을까.
회사 유니폼인 하얀 블라우스에 남색 스커트를 걸친 그녀가 무릎 위에 올린 손으로 치마를 꽉 쥐었다. 힘이 빠지고 온몸이 떨렸다.
김사장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부도 막느라 내가 얼마를 손해 보는지 알아? 너 때문에. 네년 몸값이 그렇게 비싸지는 않을 것 같은데?”
대놓고 그녀에게 막말을 퍼붓고 있었다.
서하나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오늘의 이 수모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지금 당장 치마를 올려 팬티를 내보이는 정도는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잘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하지만 그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더한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 지금 치마를 올려보란 이야기가 단지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설사 적당한 수준에서 마무리 짓는다고 해도 내일은? 그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서하나는 눈앞이 막막했다. 치마를 움켜쥔 그녀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치맛자락이 구겨지며 하얀 허벅지가 슬쩍 드러났다.
그녀의 심리적 갈등을 눈치챈 김사장이 음탕한 눈초리로 그녀의 치맛단을 바라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