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64
65. 음흉한 마수(2)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온 유서준은 주말 저녁을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오후에 잠시 보았던 서하나의 안색이 계속 떠올랐다. 뭔가 불안하고 쫓기는 듯했던 표정.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유서준은 서하나에게 삐삐를 쳤다. 연락은 오지 않았다.
다시 그는 음성을 남겼다. 집으로 연락을 달라고. 기다리고 있다고.
그는 저녁도 먹지 못하고 집안을 서성거리며 연락을 기다렸다.
긴 여름 낮이 그새 저물고 어둠이 창밖에 내려앉았다.
유서준은 그녀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실감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불안감을 일으키는지 확실히 느꼈다. 이미 그녀와의 관계는 단순한 동아리 선후배나 동업자의 관계를 떠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는 자신에게 연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불안감이 깊어 갔다. 오후에 얼굴을 보았을 때 왜 아는 체를 하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었다. 40억을 빌려주는 계약을 그녀의 일과 연계시켰더라면 이렇게 불안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띠리리링-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하나 누나?”
다급한 그의 반응에 수화기 저쪽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삐삐에 호출 전화번호가 떠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무슨 말인지 유서준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아, 저희 가게 손님으로 오신 아가씨 한 분이 가진 삐삐에 남겨진 번호라서 말입니다.”
“거기 어디예요?”
“강남역 부근입니다. 지금 아가씨가 정신을 못 차리셔서…….”
더 들을 생각도 없었다. 그곳 가게 위치를 확인한 다음 그는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
이 층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서하나가 테이블에 쓰러져 있었다.
주변에는 맥주병이 잔뜩 널려있고 마감을 하려는 웨이터가 난감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폭음을 한 서하나가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진 듯했다. 그녀의 옷차림은 낮에 보았던 회사 유니폼 그대로였다.
유서준은 그녀를 깨워 보려 했지만, 그녀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적당히 업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술에 취해 비몽사몽이 된 서하나를 침대에 눕히고 그는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
대체 낮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렇게 술에 떡이 된 것일까.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낮에 보았던 그녀의 어두운 안색, 걱정스러운 표정, 그리고 김사장이란 작자의 기분 나쁜 눈초리가 뒤섞여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불길한 생각을 버리려고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한번 술에 취한 그녀를 업고 온 일이 있었다. 그때는 그녀와 사귀기도 전이었고 결국 김현아네 집에 그녀를 맡겼었다.
그때 그녀가 술에 취한 이유는 회사 생활의 고달픔과 자신의 인생에 대한 비관 때문이었던가. 오늘 이런 사달이 난 이유도 분명히 회사와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유서준은 아련한 눈빛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서하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 이 행동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 뛰어난 미모와 최고의 학벌이 증명해주는 머리를 가진 그녀. 말 그대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그녀다. 그랬기에 누구보다도 자존심도 셌다. 천성적으로 부드러운 성격을 타고났지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갖고 있었다.
거기에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려는 독립심까지.
그를 대하는 태도 역시 항상 누나처럼 다정했다.
그런 그녀가 이처럼 세상을 포기한 듯 인사불성으로 쓰러져있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이불을 끌어다가 그녀를 덮어주었다.
일단 내일 아침에 그녀가 일어나야 모든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서준은 침대에 누운 그녀의 옆을 지키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
“미안해.”
정신을 차린 서하나의 첫마디였다.
그렇다고 그냥 쉽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유서준은 그녀를 추궁했다.
서하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그녀의 대답을 강요했다.
“누나와 나는 서로 간에 중요한 사이잖아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나이가 어려 미덥지 못할지 모르지만 전 충분히 상황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떨리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를 향해 그는 다시 확실하게 못을 박았다.
“우리 서로 사귀는 사이 맞죠?”
키스한 사이였건만 사귄다는 말을 한 적은 서로 간에 한 번도 없었다. 그 애매했던 관계가 유서준의 말로 확실해졌다. 연인의 관계로.
놀라는 표정에서 점차 안정된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본 유서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서하나가 멈칫거리며 그의 손을 피하려 했지만, 그는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제가 누나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듯 누나도 저에게 기대줬으면 좋겠어요.”
유서준은 그녀와 눈을 맞추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서하나의 입가에 살짝 어리기 시작하는 미소를 보았다.
“자, 어서 말해 봐요.”
서하나가 한숨을 내쉬며 어제의 일을 실토했다.
**
서하나는 치마를 올려보라는 김사장의 말에 정말 고민했다. 눈 딱 감고 올리기만 한다면, 그래서 계좌가 그대로 있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갈등 속에서 앞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을 조롱하는 듯이 쳐다보는 김사장의 음흉한 눈빛을 만났다. 사흘 전 호텔에서 그녀를 침대에 강제로 눕히려고 했던 그의 행동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의 그 음흉한 표정도.
아침에 그녀에게 신신당부하던 지점장의 목소리도 다시 귓전을 울렸다. 분명히 지점장도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렇다고 해도 감히 회사를 그만둘 생각을 하기는 어려웠다. 당장 아버지 병원비가 걱정되었으니까.
스륵-
무너지는 자존감 속에 치맛자락을 움켜잡을 때였다.
그 순간 유서준과 함께 만든 공동계좌가 떠올랐다. 현재 잔고는 대략 1억 6천만 원. 그녀의 몫만 해도 8천만 원이었다. 그것이라면 다시 직장을 잡을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4년 이내에 찾을 수 없다는 제한이 존재했지만 그건 다음 문제였다.
거기에 대학 때까지만 해도 꽤 주식매매에 재능을 보였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지금은 증권사 직원이라 직접 매매하지 못하지만, 환경만 주어진다면 다시 예전처럼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유서준의 도움도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에 가까운 감각을 보여주며 계좌를 크게 불리는 그가 그녀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서하나는 결심했다.
그녀는 꿇어앉은 무릎을 펴고 벌떡 일어났다.
김사장이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을 때 그녀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전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렇게 치사하게 살지 마세요. 언젠가는 인과응보로 돌아올 겁니다.”
서하나는 그를 노려본 다음 방을 나섰다.
김사장의 놀라는 표정과 분노어린 눈빛이 그녀의 뒤에 남았다.
가도건설을 나온 서하나는 그 길로 곧장 증권사로 돌아왔다.
이미 모두가 퇴근해버린 증권사 객장은 컴컴했다. 그녀는 사직서를 쓴 다음 지점장의 책상 위에 놓았다. 퇴직을 결심한 것이다.
막상 증권사를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답답하고 분한 마음을 술로 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불러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유서준과 술을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 레스토랑에서 술에 취해 뻗어버린 것이다.
**
서하나의 말을 들은 유서준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실망도 컸다. 그녀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동안 자신은 정작 그녀를 보았음에도 무심코 넘겨버렸다.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한 자신이 실망스러웠다.
유서준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죄송해요. 어제 분명히 제가 도울 수도 있었는데…….”
“아냐, 괜한 자존심에 입을 다문 내가 문제야.”
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서하나가 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내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서준이 너 때문이야. 그 공동계좌라도 없었다면 나는 감히 사표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야. 그랬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해도…….”
서하나가 말을 잇지 못하고 몸을 한차례 떨었다. 그만큼 어제의 일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유서준은 순간 다이어리를 떠올렸다.
다이어리에는 이런 일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사실 사회 전반의 중요한 변동을 제외하고 그의 주변 일에 대해 적혀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니까.
만일 그가 다이어리를 이용해 돈을 많이 벌지 않았더라면 그녀와 공동계좌를 만들 일도 없었을 것이다. 즉 원래대로라면 그와 그녀는 단지 친한 고객과 증권사 직원 사이였을 뿐이었다. 그런 상태에서도 금융실명제는 시행되었을 것이고 그녀에게는 똑같은 위기가 닥쳤을 것이다. 아마 그녀는 그들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어렵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가도건설 사장과 지점장에 대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유서준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가도건설 김만학 사장! 그 자식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서하나가 깜짝 놀라 그를 말렸다.
“서준아, 그러지마. 결국 아무 일도 없었잖니?”
“아무 일도 없긴요, 회사 그만 두셨잖아요?”
서하나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녀는 괜히 유서준이 사고를 칠까 두려웠다. 그러잖아도 겉보기에 유서준은 산적처럼 생기지 않았던가. 주먹 쥐고 힘쓰면 영락없이 조폭처럼 보이는.
말리는 서하나에게 유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시켰다.
그의 내심은 달랐다. 서하나 몰래 가도건설을 응징하고 싶었다. 그렇게 상대를 힘으로 억누르는 자라면 자신도 힘이란 게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
밖으로 나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커피숍 테라스에 앉아 한가한 일요일 오전을 보냈다.
“어젯밤에 집에 안 들어갔는데 괜찮아요?”
“친구 집에서 잔다고 적당히 둘러댔어.”
서하나가 커피를 마시며 대답했다.
유서준은 주스를 빨대로 마시면서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런 변명도 통하나 보네요.”
“이젠 나도 나이가 있잖아? 밤에 야근하는 때도 있고 해서 대학 다닐 때처럼 심하게 간섭은 못 하셔. 게다가 어머니께서 아버지 병간호에 치중하느라 신경 쓰시기도 힘들어.”
“그럼 앞으로 종종 저희 집에서…….”
서하나가 그의 팔을 툭 쳤다.
“얘가 못하는 말이 없네.”
커피숍 앞을 지나가는 사람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유서준은 자신의 마음이 즐거운 탓임을 깨달았다. 서하나와 많이 가까워진 느낌, 그녀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 그녀도 이제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자, 그래서 내일부터 무엇을 하실 예정인가요?”
서하나의 안색이 다소 어두워졌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증권사를 알아봐야겠지? 경력직으로 적당히 들어갈 곳 있으면 무조건 입사해야지 뭐. 형편도 별로라…….”
유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 저희 금융사로 오시죠?”
“응?”
“일 년 정도 더 있다가 설립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거 반년 후로 당길 생각입니다. 예전에 제가 목표 말한 것 있죠? 금융사 설립. 그 중추적인 역할을 누나가 해주세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서하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정리가 안 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월급은 충분히 드릴게요.”
유서준은 씩 웃음을 지었다.
서하나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면서 물었다.
“그렇다고 벌써 설립하기는 어렵지 않아? 돈도 부족하고 사람은 더 부족하고…….”
유서준이 서하나에게 손짓했다. 그는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저 PER 혁명이 끝나면 뭐가 온다고 했죠?”
“저 PBR 혁명.”
“맞아요. 그게 바로 내일부터 시작됩니다.”
유서준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