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68
69. 저 PBR 혁명(3)
만호제강은 10월 26일 그동안의 횡보를 마무리하고 상한가로 올라서며 2차 상승을 시작했다. 이후 사실상 거래량을 말리면서 점상 행진을 하는 놀라운 파죽지세가 펼쳐졌다.
신문에 만호제강을 공개적으로 매수하고 있는 한 사람의 기사가 떴다. 그는 일명 왕개미로 알려진 개인투자자로 경영에 개입할 생각은 없지만, 회사 자산 대비 주가가 너무 싼 까닭에 적정가격이 될 때까지 사 모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경영에 위협을 일으킬 만큼 주식을 과다하게 매집했으므로 기존 경영진과 대주주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투자자 입장에서 이런 논란은 오히려 이득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11월 15일 월요일, 만호제강은 드디어 10만 원을 돌파했다. 아침 시작부터 상한가로 문을 열고 거래 자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계속 오르다 보니 사실상 팔려는 자가 없었다.
다음날 16일 아침, 유서준은 서하나와 매도를 준비했다.
장소는 유서준의 오피스텔. 이곳은 여전히 그들의 주식매매 아지트 역할을 했다.
거래량이 적은 종목이라 그들이 가진 수량을 단번에 팔아치울 수는 없었다. 상한가가 깨지지 않는 선에서 눈치를 보며 팔아치워야 했다.
유서준은 그녀와 작전을 세웠다.
“오늘부터 이 종목을 팔 생각입니다. 목표했던 10만 원을 돌파했으니까요. 어때요?”
유서준의 제안에 서하나 역시 동의했다.
“언제까지 계속 오를지는 모르지만 그만 욕심을 부리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녀 역시 주가의 고공행진에 고소공포증을 느끼던 중이었다.
“물량은 조금씩,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지를 보고 팔아치워야 해요. 갑자기 대량거래를 유발하는 것도 좋지 않고요. 그러다가 상한가 무너져서 하한가 찍기 시작하면 매도할 방법이 없어지니까요.”
그들은 세부적인 계획을 짰다. 그날부터 물량을 나누어 슬슬 풀어놓는 것이 그들의 작전이었다.
유서준이 기억하는 다이어리의 내용은 11월 22일 아침 시가에 최고치인 119500원을 기록한 다음 곧바로 무너져 하한가로 직행한다는 것이었다. 하한가로 떨어진 이 주식은 그때부터 10일가량 점하로 내리꽂으며 상승의 상당 부분을 반납했다. 만호제강이 다시 이 최고가 수준으로 올라서는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후였다. 16일에서 22일 사이에 보유한 전 주식을 팔아치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일단 개장 동시호가에 일부 물량을 상한가에 매도주문을 내며 서하나가 말했다.
“아, 그때 우리가 내기하지 않았어?”
그녀는 이제야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유서준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내기했었죠. 기억 안 나세요?”
서하나가 한참 기억을 떠올리더니 말했다.
“그때 내가 주변이 아주 어지러울 때였잖아? 회사 그만두고 아버지 병환에…… 아, 10만 원 이상에서 매도하면 네가 이기는 것이었니?”
“네, 10만 원. 어제부터 10만 원 넘었으니까 제가 이긴 겁니다.”
“아냐. 10만 원 이상에서 다 팔 수 있을지 아직 몰라.”
서하나가 지기 싫은 표정으로 투덜댔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오늘 장도 시작하면 10만 원이 확실하게 넘어 있을 것임을. 그녀가 아무리 부정해도 지금까지의 기세로 보아 뒤집힐 만호제강이 아님을.
유서준은 패배를 수락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만 지었다.
대략 보유 주식 수와 매도 금액을 계산하던 그녀가 깜짝 놀라며 입을 쩍 벌렸다.
“헉! 50억이 넘네?”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금액에 서하나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유서준이 곧바로 정정했다.
“아직 며칠 더 오를 테니 최종으로 따지면 60억가량은 될걸요?”
그도 말하고 보니 큰 금액이었다. 숫자로는 이해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금방 이해되지 않는 큰 금액이었다. 부잣집도 아니고 강원도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으니 이런 숫자를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서하나도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집안에 재산이라곤 변변찮았으니 이런 금액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서하나가 한숨을 내쉬며 투덜댔다.
“아아, 조금 더 빨리 퇴사해서 퇴직금도 넣었으면 좋았을걸.”
유서준은 웃음을 터트렸다.
장이 시작되고 그들이 낸 주문이 상한가에 체결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오늘 주가는 어제보다 3천 원이 올라 상한가인 10만4500원. 내일도 모래도 당분간 모든 물량을 팔 때까지 이 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른바 분할매도 전략이다.
환호성을 지르던 서하나가 갑자기 유서준을 째려보며 물었다.
“우리가 뭘 내기했었지?”
“이긴 사람 소원 하나를 들어주기로 했죠.”
유서준이 능글맞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응?”
묘한 웃음을 짓는 유서준을 보며 서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소원? 흐음, 뭔가 수상쩍다?”
서하나가 그를 요리조리 훑어보며 인상을 썼다.
담담하게 미소만 짓는 그를 향해 서하나가 갑자기 울상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녀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설마 너?”
“네?”
서하나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너 이 누나에게 이상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겠지?”
유서준이 그녀의 옆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직 소원이라곤 생각지도 않았는데 누나 표정 보니 뭘 해야 할지 떠올랐어요.”
그의 안면에 호기심 가득한 소년 같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내심을 눈치챈 서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있던 베개로 얼굴을 가리며 쓰러졌다.
“으아, 안돼!”
유서준은 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웃음만 지었다.
도대체 그녀가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지 그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
만호제강은 예상대로 11월 22일 연중 최고가인 119500원을 아침 시가에 찍고 곧바로 무너졌다. 이날 아침 유서준은 마지막 남은 주식을 모두 팔아치웠다.
만호제강을 매도한 후 수수료 및 세금을 제하고 통장에 남은 잔고는 무려 61억에 가까웠다. 두 통장 잔고를 모두 합한 것이다. 이중 서하나의 것도 2억을 넘어섰다.
이날 유서준은 서하나가 다니던 증권사 지점의 최고 자산 예치 고객으로 떠올랐다. 기존의 최고 고객이었던 가도건설 김사장은 이미 파산한 후라 경쟁자도 없었다.
이틀 후 모든 잔고가 현금화되었을 때 유서준과 서하나는 증권사를 방문했다.
서하나는 옛 직원에게 환호를 받았다. 오랜만에 예전 직원이 찾아왔으니 모두가 즐거워했다.
그녀는 지점장을 찾았다.
마침 지점장은 자리에 있었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지점장이 책상에 앉아 들어오는 두 사람을 거만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점장이 반들거리는 대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말했다.
“서대리, 어쩐 일로 왔어?”
지점장은 서하나와 함께 들어온 건장한 청년을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신경 쓸 일이 없는 자라고 판단을 내린 그는 서하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서하나가 접대용 소파에 앉고 유서준도 따라서 옆에 앉았다.
지점장이 그들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서대리, 요즘 어떻게 지내나? 아, 이제 대리가 아닌가? 하하.”
혼자서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서하나를 훑었다.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서하나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지점장이 문득 생각난 듯 그녀에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그날 내가 바빠서 말이지.”
지점장은 장례식장에 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유서준은 표정을 찌푸렸지만 서하나는 밝은 표정을 유지했다.
“바쁘시면 그럴 수 있죠.”
“그렇지. 요즘 뭐 하고 있나? 직장은 알아봤고?”
서하나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지점장이 딱한 눈초리로 그녀를 훑어보며 말했다.
“요즘 형편이 어렵나 본데 서대리가 원한다면 재입사를 추진해보도록 하지. 물론 서대리의 반성이 전제되어야겠지만 말이야.”
지점장은 서하나가 취업을 위해 이곳에 다시 나타났다고 짐작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녀가 여기에 찾아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는 머릿속에서 그녀를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게 잘못을 저지르고 퇴사한 것을 받아주면 그녀도 알아서 자신의 앞에서 기게 될 것이 눈에 보였다. 예전처럼 뻣뻣하게 굴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는 그녀를 떠올렸다.
매일 아름다운 부하 직원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즐겁지만 때에 따라서는 더한 것도 시킬 수 있지 않을까. 잠시 그의 머릿속에서 즐거운 상상 장면이 명멸했다.
기가 막힌 표정을 짓던 서하나가 큰소리로 지점장의 상념을 깨트렸다.
“지점장님!”
“왜? 퇴사하고 보니 여기가 아쉽지? 이만한 직장 드물어. 나처럼 마음씨 좋은 상사도 없고.”
유서준은 가볍게 코웃음을 날려주었다.
서하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메모지를 내밀었다.
“지점장님, 이 계좌를 해지하려고 왔습니다.”
“응?”
그제야 상상에서 깨어난 지점장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계좌 해지는 창구에서 하면 되지 왜 여기까지 들어와?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유서준은 속으로 지점장을 비웃었다. 조금 전에도 열심히 놀고 있는 것 같더니만.
지점장이 메모지에 적힌 계좌번호 두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알았어. 예전 직원 예우 정도는 해주지. 이 계좌 담당이 누구지?”
“최훈재 씨입니다.”
“아, 예전에 서대리가 데리고 있던 부하 직원?”
지점장이 최훈재를 불렀다.
최훈재가 지점장실로 들어왔다.
지점장이 메모지를 툭 던지며 말했다.
“서대리가 돈을 찾아갈 모양인데 이 두 계좌에 들어있는 거 몽땅 현금으로 찾아줘 버려.”
메모지를 주워 계좌번호를 확인한 최훈재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 지점장님.”
지점장이 인상을 찡그리며 최훈재를 노려보았다.
“왜? 얼른 주라니까. 문제 있나?”
최훈재가 서하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대답했다.
“혀… 현금으론 좀 곤란합니다.”
“왜 그래?”
지점장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최훈재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이 두 계좌의 잔고가 총 61억입니다. 현재 우리 지점 최대 계좌이고요.”
“뭐? 61억??”
지점장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점장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서하나를 쳐다보았다.
“우… 우리 지점에 그렇게 큰 계좌가 있었어?”
서하나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6년 전 처음 만들었을 때 단돈 25만 원으로 시작했던 계좌죠. 그게 불어서 61억이 되었고요.”
지점장은 경악하여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별별 생각이 맴돌았다. 저 자식이 주식의 신이었나? 아니, 서대리가 주식매매를 그렇게 잘했나? 61억이 얼마야? 61억이 빠져나가면 지점 수신액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이번 분기 실적은 얼마가 되지? 나 망한 거야?
지점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서대리, 다시 생각 좀 해보게나. 이곳 지점 생각도 좀 해주라고.”
서하나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이 금액을 유치하고 싶어 하는 증권사가 널렸더군요. 고객은 더 좋은 조건을 내거는 증권사와 거래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요?”
지점장의 안색이 다양하게 변했다. 그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그러잖아도 가도건설 계좌가 깨지면서 지점 실적이 개판 났어. 이 계좌마저 빠져나가면 난 죽음이야. 난 처자식도 있는 몸이라고. 어떻게 좀 안 되겠어?”
서하나가 그를 노려보며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자식까지 있는 사람이 저를 그렇게 내몰아요? 아버지의 병환까지 언급하며 날 수렁으로 밀어 넣었어요? 마음 같아선 당신을 경찰에 고발하고 싶지만…….”
지점장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냐. 내가 잘못했네. 제발 계좌만 유지해 줘.”
사정하며 벌벌 떠는 지점장이 애처롭게 보였다.
서하나는 예전에 있었던 가도건설 김사장 사무실의 사건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온갖 굴욕적인 행위를 요구했던 끔찍했던 그 날. 어째 분위기가 그때와 비슷했다. 김사장의 계좌를 유지하고자 굴욕을 감수하던 그녀와 그녀의 계좌를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지점장.
서하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날 저는 계좌를 유지하고자 무릎을 꿇었었죠. 김사장은 저에게 더한 것을 요구하더군요. 치마를 올려보라고.”
지점장은 서하나의 섬뜩한 눈빛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서하나가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당신도 똑같이 무릎을 꿇고 바지를 내린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죠.”
70. 프로포즈
1993년 주식시장은 12월 28일 폐장했다. 종합주가지수는 866.18로 하반기를 대폭 상승으로 마무리 지었다. 전년 대비 +27.7%로 상당폭 상승한 수준. 상장기업 수는 1044개였고 시가총액은 112조에 달했다.
주가 하락기에 설립된 증시안정기금이 폐장일 처음으로 매도주문을 쏟아냈다. 시장이 과열되면 매도하겠다는 사전고지는 있었지만 실제로 매도에 나선 것은 상당한 충격이었다. 향후 증안기금의 매도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지만, 경기회복이라는 내년의 장밋빛 전망에 곧바로 파묻혔다.
11월에 만호제강을 매도한 이후 유서준은 평범한 매매로 돌아섰다. 사실 50억이 넘는 자금을 움직이는 것은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전략을 필요로 했다. 한두 종목에 치우친 매매도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장세에 영향을 주지 않고 매매를 하는 것도 어려웠다. 일단 대형우량주 위주로 정석 매매를 할 수밖에 없었다.
12월은 상승장이었기에 대형우량주 매매로 소소한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통상적인 매매는 서하나가 월등히 잘하는 분야여서 유서준은 간섭할 필요가 없었다. 주가지수가 다시 1000을 넘어서 역사적인 고점을 찍을 94년 말까지 그는 이런 방식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이 정도의 금액을 움직인다면 서하나 역시 증권사에 출근할 때 보다 더욱 바쁜 시간을 보내어야 해서 굳이 취업 자리를 알아보지 않을 것이란 그의 생각도 있었다.
28일 주식시장이 마감하면서 연말이 시작됐다.
이제 유서준이 계획했던 서하나와의 이벤트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는 다이어리에 연말 총자산을 써넣었다.
*
1993년 12월 31일, 총자산 59억 원.
*
**
[1993년 12월 31일]연말과 새해를 맞이하는 날은 항상 복잡하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동해로 새해 첫날 떠오르는 태양을 보러 가고 서울을 벗어나기 힘든 사람은 보신각 타종행사를 종로에서 참관하기도 한다.
주식시장도 열리지 않아 한결 여유 있는 시간인 이날, 유서준은 오늘의 이벤트를 계획했다.
오후 무렵 유서준은 서하나와 종로에서 약속을 잡았다. 이때는 누구나 그러하듯 만남 약속을 잡을 때 강남역에서 만나면 뉴욕제과 앞이고 종로라면 종로서적 앞이다. 서울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만남의 명소다.
서하나는 진한 남색 투피스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나타났다. 유서준이 보기에 오늘 만남을 위해 다소 차려입은 티가 났다. 그렇다고 그녀가 특히 더 예뻐진 것은 아니다. 원래 그녀는 항상 예뻤으니까.
그녀가 입고 나온 남색 스커트는 증권사 직원 유니폼을 연상시켰다. 옷맵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색상이 비슷해서 그런가.
그에게 물어오는 서하나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갑자기 왜 여기에서 보자고 해?”
종로서적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러 사람을 두리번거리며 그녀가 물었다.
유서준은 가볍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대답했다.
“예전에 내기했던 것 있죠?”
“아, 만호제강?”
서하나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유서준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진 것을 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흐음, 이거 불안한데? 너 이상한 소원 말하려는 것 아냐?”
“딩동뎅!”
유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나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흘겼다.
“진짜 이상한 거면 나 집에 가버린다?”
“앗, 그건 약속 위반인데요. 오늘 소원 말할 거니까 꼭 들어주셔야 해요.”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하나가 우물쭈물하더니 그에게 주먹을 들어 보였다.
“혼날 짓 하면 두들겨 팰 거야.”
유서준은 웃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자자, 일단 움직이죠.”
서하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랐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그의 팔짱을 꼈다. 거리에는 오가는 청춘으로 만원이었다. 이런 날 애인이 없다면 그냥 집에 들어박혀 있는 게 속이 편할 것이다. 길을 걷는 모든 이들이 한결같이 쌍쌍이니.
두 사람은 종로를 벗어나 명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유서준 일행이 도착한 곳은 명동 끄트머리에 자리한 중앙극장. 지금 그곳에는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 주연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상영 중이었다. 따뜻한 운명적인 사랑을 그린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갑작스러운 영화 관람에 서하나는 어리둥절했지만, 군말 없이 그와 함께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서하나는 그의 몸에 꼭 붙으며 살짝 기댔다. 유서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영화를 즐겼다. 영화 내용도 그렇고, 옆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데이트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절로 났다.
영화를 보고 나니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유서준은 그녀를 데리고 롯데백화점 본점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백화점에는 왜?”
서하나가 그를 따라 발걸음을 맞추며 물어왔다.
“옷 사드리려고요.”
“옷은 왜? 난 필요 없는데?”
“제가 사드리고 싶어서요.”
연신 필요 없다며 투덜거리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유서준은 백화점을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고급 명품이 즐비한 숙녀복 코너.
판매 점원이 서하나의 미모를 칭찬하며 옷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서하나가 그의 팔을 잡고 속삭였다.
“여기 너무 비싸.”
“이 정도는 사셔야죠.”
유서준은 만류하는 그녀를 무시하고 옷을 고르게 했다.
점원이 골라주는 옷은 모두 세련되고 맵시가 있었다. 서하나의 표정을 보니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았지만 가격 때문에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월급 대부분을 병원에 쏟아부었을 테니 이런 옷을 사본 적이 없을 것이다.
유서준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통장에 돈이 얼마 있는지 생각해봐요. 이런 정도는 티도 안 나요.”
“그렇긴 하지만 차라리 네 차라도 한 대를 사는 게 낫지 않아?”
“아직 차 몰고 다닐 일도 없는데 뭘요. 그건 나중에 고민하죠.”
연신 망설이는 그녀에게 옷을 한가득 안긴 다음 피팅룸으로 들여보냈다.
고급 새 옷으로 단장한 서하나는 과연 여신이었다. 유서준 뿐만 아니라 판매 점원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 서하나를 향해 유서준은 엄지를 들어 보였다.
서하나가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을 때 점원이 그에게 물었다.
“혹시 여자 친구가 연예인이세요?”
“아뇨.”
“아, 아니었구나.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유서준은 칭찬에 마음이 흡족했다.
정장을 산 다음 그는 서하나를 속옷가게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도 만만찮게 비싼 속옷 세트를 고르게 했다. 그가 속옷 사이즈를 물었을 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등을 때렸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점원에게 넘겼다. 유서준은 멀리 떨어져서 그녀가 물건을 고르는 것만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구두 가게. 오늘 산 정장에 맞는 구두를 골랐다. 높진 않지만 약간 굽이 있는 하이힐이었다. 서하나의 키는 다소 큰 편이었다. 그런데도 겉으로 보기에 그리 커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녀의 몸이 마르고 연약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힐을 신은 그녀의 다리는 길쭉길쭉 그 자체였다.
누가 여자의 자존심은 손가방이라고 했던가? 그런 말이 나왔을 때 서하나는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그녀는 변변한 가방 하나 없었다. 당연히 유서준은 그녀에게 적당한 가방을 하나 안겼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귀금속 가게로 갔다. 이곳에서 고를 것은 반지와 목걸이, 귀걸이. 점차 서하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녀가 유서준을 보며 오늘 왜 이러냐고 캐물었다. 일 년간 수익이 많이 나서, 사주고 싶어서라고 답변했으나 그녀는 수긍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물러설 유서준은 아니었다. 그녀는 크기가 작은 액세서리를 선호했다. 예쁘게 세공된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그녀에게 안겼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떨어지지 않았다.
백화점을 돌며 쇼핑한 물건을 넣은 가방을 양손에 들고 유서준은 그녀를 백화점 내 고급식당으로 안내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먹는 것은 돈 낭비 아냐?”
음식 가격을 보며 서하나가 놀라서 속삭였다.
유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 번쯤은 이렇게 호사를 누려볼 필요도 있어요.”
“어째 평소의 너랑 다르다?”
서하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금을 운용하다 보면 항상 이율과 기회비용을 고민한다. 예를 들어 오늘 1천만 원짜리 승용차를 한 대 산다고 하자. 이 돈을 차를 사지 않고 투자를 하게 된다면 이 돈은 매년 이율만큼 복리로 불어난다. 만일 주식 투자를 했다면 주가지수 상승률만큼 오를 것이다. 아파트 같은 부동산을 사더라도 마찬가지. 지금까지의 주가 상승률로 판단한다면 이 1천만 원은 10년 후면 10배인 1억으로 불어난다.
그래서 투자가 아닌 곳에 자산을 소비하는 것은 긴 시간을 놓고 보면 치명적인 결과가 된다. 사실 유서준이 아직 차를 사지 않는 이유도 이런 이유가 컸다. 불어날 게 뻔히 보이는 자산을 지금 소모하는 것은 너무 큰 낭비가 아닌가.
그런 그가 오늘처럼 이렇게 돈을 쓴 적은 없었다. 그래 봐야 그의 자산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지만.
서하나는 밥을 먹는 내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소원이란 것이 무엇일지 궁금하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여튼 수상해.”
그녀는 고개를 저의면서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
신년을 맞이하는 군중의 열기는 엄청났다.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보신각의 타종을 구경하려는 인파가 종로를 가득 메웠다.
1994년을 ‘서울 정도 6백 년 기념의 해’로 선포한 서울시는 서울 시민의 신년메시지를 비롯하여 각종 민속놀이와 축제를 개최했다. 보신각 타종행사는 1100만 서울 시민을 대표하는 110명의 시민이 나섰다.
뎅!
뎅!
자정을 기해 보신각 종소리가 울리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가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축제에 참여했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멀리서 타종행사를 구경했다.
서하나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신년을 이렇게 맞이하는 것도 처음이야.”
유서준은 뒤에서 그녀를 안아주며 대답했다.
“저도 종 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길게 이어지는 타종을 구경하는 많은 연인이 인파 속에서 때때로 입을 맞추는 장면도 보였다.
유서준도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그녀의 뒤통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유서준의 뜨거운 입김을 느낀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소원이 뭔데? 이제 말할 때가 되지 않았어?”
그녀의 눈빛이 긴장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유서준은 그녀와 마주 본 상태로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저랑 결혼해주세요.”
“응?”
뜻밖이었을까. 서하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유서준이 말을 이었다.
“제가 만드는 금융사를 맡아줘요.”
유서준의 말은 보신각 타종 소리와 함께 인파의 환호성 속에 금방 묻혔다.
서하나는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눈동자를 맞추었다. 그녀의 안면이 살짝 굳어있었다.
자신이 연상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와의 결혼은 생각보다 쉽게 연상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유난히 함께 한 시간이 많았음에도 그리고 많은 부분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그는 멋진 후배라는 선입견이 남아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의 배우자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도 염려스러웠다. 비록 학벌은 좋다고 하지만 이제는 직장에서 쫓겨난 실업자 신세에 가난한 집안의 딸일 뿐이었다.
서하나가 답변을 해주지 않자 유서준은 속이 타들어 갔다.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내기에서 졌으니까 무조건 들어줘야 하는 거예요.”
“피이, 이건 경우가 다르잖아.”
“그때 뭐든 들어주는 거로 약속했었다니까요.”
서하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말했다.
“반칙이야. 넌 요구사항을 두 가지나 말했어.”
“어차피 같은 거니까 하나예요.”
유서준은 어깨를 잡은 손을 품 안으로 당겼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그의 품속에 쏘옥 들어왔다.
그의 귓가에 그녀가 수줍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나라도 괜찮겠어? 난 이제 나이도 많고, 가진 것은 없고…….”
유서준은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