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85
89. 외환위기(1)
서하나의 눈이 무섭게 빛났다.
“너… 요즘 개인적으로 선물 투자하는구나?”
강재민이 곧바로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숙이며 몸을 사렸다.
그녀는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며 다시 말했다.
“처음 여기에 입사할 때 가급적 개인적인 주식투자는 금한다고 했던 것 기억하니?”
“네… 그… 그게…….”
강재민이 제대로 대답을 잇지 못했다.
“특히 올해 들어서 개인적으로 선물과 옵션을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것도 알고 있지?”
강재민이 고개를 푹 숙였다.
서하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익이 쭉쭉 나는 회사 계정을 보다 보면 본인도 투자하고픈 욕심이 생긴다는 것을 그녀도 이해는 했다. 하지만 그런 욕심이 결국 본인을 망치고 회사도 망치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증권사에서는 직원이 주식을 거래하는 것을 금지한다. 물론 SJ 투자자문은 제도권이 아니기에 직원에게 법으로 강제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를 지켜주기를 권유했고 이에 합당한 보상도 해주었다. 그만큼 월급을 많이 주었다.
그렇지만 수익에 대한 욕망은 거셌다. 월급 몇 푼으로 해결 가능할 정도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선물 거래를 하고 있어?”
서하나가 다그치듯 물었다.
“네…….”
강재민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옵션은?”
“아직 옵션은 안 해요.”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하나의 눈길이 옆자리의 다른 트레이더에게 넘어갔다.
그녀가 호랑이 눈으로 매섭게 쳐다보자 그 트레이더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저… 전 아직 안 하고 있습니다.”
정말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그대로 믿어야 했다.
현재 파생상품을 거래하기 위한 개시증거금은 5천만 원이었다. 일단 초기에 이 돈이 있어야 거래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아는 바에 따르면 강재민은 이곳에 입사할 때 돈이 쪼들리는 상태였다. 그가 이곳에 입사한 지 거의 이 년. 월급을 꼬박꼬박 모았다면 5천만 원이 가능했겠지만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히 친척 등으로부터 일부는 빌렸을 것이다.
현재 선물 1계약을 거래하는데 500만 원이 채 안 된다. 그가 5천만 원으로 1계약만 거래할 일도 없을 것이다. 적어도 10계약은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게 일반 개인투자자의 생리다. 사실 그녀 역시 리스크 관리를 위해 항상 잔고 대비 일부만 매매하기를 지시하던 유서준을 이해 못 했으니까.
서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강재민이 우물쭈물하며 말을 꺼냈다.
“그래도 이익은 많이 났어요.”
그녀는 할 말을 잊고 있다가 재차 물었다.
“그럼 오늘 네 계좌의 것도 정리했니?”
강재민은 잠시 말을 못 하다가 대답했다.
“요즘 그냥 두면 무조건 수익이 나잖아요? 그래서 하지 않았어요. 그냥 두면 계속 이익이 될 거니까…….”
서하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모든 불행은 욕심에서 다가온다.
그녀의 기분을 짐작한 강재민이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준이 형도 올 연말까지 계속 주가가 내릴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여전히 강재민의 얼굴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가가 내릴수록 이득이 커지는 것이 선물 매도다.
서하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조만간 빨리 정리해라.”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하나였다.
**
유서준은 서하나와 명동거리를 걸었다.
다소 활기가 떨어진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오가는 인파는 많았다.
두 사람은 부근의 이동통신 전화기 판매점으로 들어갔다.
10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이동전화 통신 시대가 시작됐다. 셀룰러폰인 011 SK 텔레콤, 017 신세기통신, PCS 폰인 016 한국통신 프리텔, 018 한솔 PCS, 019 LG 텔레콤까지 5개의 이동통신사의 경쟁이 시작됐다. 드디어 전 국민 1인 1전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전에도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에서 휴대용전화를 내놓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 이동전화는 속칭 벽돌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을 만큼 커다란 크기를 갖고 있어 휴대가 힘들었다. 대부분 자동차에서 사용했기에 카폰이라 불렸다.
당연히 유서준은 차가 없었기에 그 이동전화를 살 이유가 없었다. 또 밖에서 업무를 볼 경우가 많지 않아 사실상 필요 없기도 했다.
최근 들어 급격히 이동전화 크기가 급격히 작아지고 통화품질도 좋아졌다. 이제야 쓸 만해진 것이다. 주변에 이동전화를 가진 사람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유서준은 아내인 서하나와 항상 붙어있다시피 했지만, 가끔 이동전화가 필요한 때가 있었다. 그가 밖에 나와 있을 때 고객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이리저리 재보던 두 사람은 결국 전화기를 마련하기로 했다.
“요금은 PCS가 훨씬 쌉니다.”
폰팔이가 두 대를 팔 수 있게 되었다며 극진히 두 사람을 맞이했다.
폰팔이가 내미는 광고지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PCS 기술은 단연 LG입니다. LG 싸이언 019.’라는 문구와 함께 박진영이 은빛 우주복 비슷한 옷을 입고 최신식 폰을 선전하고 있었다.
서하나가 선전을 보고는 입을 헤벌쭉 벌리며 웃었다.
“이것도 마음에 드네.”
“야, 그거 폰 산다고 남자 안 끼워준다.”
유서준이 곧바로 다른 광고물을 펼쳤다.
“스피드 011. 이게 나을 것 같다.”
“음, 그건 한석규인데? 한석규 팬이었나?”
이동전화 가입 유치전이 치열해지면서 톱 클래스 연예인이 선전에 총출동했다.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SK 텔레콤 011로 정했다.
사실상 전화 요금에 그리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두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통화가 연결되는 휴대폰이 필요했다.
휴대폰을 구입한 두 사람은 명동거리를 걸었다.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걷다 보니 다시 연예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최근 연이은 우울한 뉴스에 두 사람의 기분이 반응하여 그런 느낌이 든 때문인지도 몰랐다.
인파 속을 헤치던 서하나가 제안했다.
“김밥 먹을래?”
“응.”
유서준이 한쪽에 있는 음식점을 가리켰다.
명동에 있는 충무김밥집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한때 자주 들리던 곳이었다.
양념한 갑오징어와 무를 김에 말린 밥과 함께 입에 넣었다. 과연 충무김밥은 맛이 일품이었다.
매콤한 맛에 감탄을 발하며 바쁘게 젓가락을 놀렸다.
“요즘 증권사에서 슬슬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고 있나 봐.”
서하나가 주변 친구에게서 들은 증권사 소식을 풀기 시작했다.
“항상 주가지수가 떨어지고 거래량이 줄어들면 나오는 말이잖아?”
유서준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서하나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좀 다른 것 같아.”
최근 연이은 대기업의 부도로 온 동네가 난리였다. 대마불사란 말이 무색해진 요즘 직장인들 사이에선 무 연락이 희소식이란 소문마저 돌았으니까.
국내 어떤 기업도 최근의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든 기업이 구조조정이다 다운 사이징이다 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과정에서 실업자가 양산되고 있었다.
“명예퇴직을 받는 증권사가 대다수인가 봐. 이 년 전만 해도 인력이 부족해서 난리였는데 세월 무상이다.”
서하나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들은 괜찮데?”
“아니, 이번에는 좀 다칠 것 같아.”
그의 질문에 그녀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김밥을 입에 쏙 넣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난 그래도 잘릴 염려가 없으니 좋네.”
“잘리는 친구가 많아?”
유서준이 다시 물었다.
서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내가 있던 그 D 증권사도 요즘 퇴직 때문에 난리인가 봐. 향후 2년간 월급 보전해주는 조건으로 명예퇴직을 받고 있다네.”
그나마 구조조정 초기인 지금은 퇴직금이라도 많이 받으며 나올 수 있었지만,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잘리는 직원은 그마저 어려워졌다.
“투자금을 잃어 망연자실한 고객을 보다 보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가 있어. 그 상태에서 약간의 자극만 더 가해지면 직장을 때려치우고 싶어지는 거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유서준이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하나 누나. 예전에 둘이서 처음으로 이영호 대표를 찾았던 적 있잖아? 그날 이영호 대표가 물었던 말 기억해?”
“금융회사의 설립 목적을 물었던 거?”
“응. 그때 누나 대답이…….”
유서준이 기억을 되새기자 서하나가 냉큼 대답했다.
“고객의 자산을 불려주는 증권사, 장기적으로 고객이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금융기관을 원한다고…… 그것을 서준이가 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서하나는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유서준이 그녀의 상념을 깨트렸다.
“그래서 만족해?”
“일단 비슷하게는 하는 것 같아. 아직 우리에게 와서 돈 물어내라는 고객은 없잖아?”
서하나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유서준은 이런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자신의 이익보다 고객의 이익을 우선하는 그런 태도가 좋았다. 사실 결혼 후의 생활에서도 그녀는 항상 그를 잘 보살피고 이끌어주었다. 언제나 그가 편하도록 대해주었다. 옛사람이 말하던 내조형이랄까.
유서준은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도 가끔 후회하지 않아? 증권사 그만둔 거. 솔직히 SJ 투자자문은 남에게 드러낼 만한 훌륭한 직장은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 크다고 좋은 직장, 작다고 나쁜 직장은 아니니까.”
서하나는 금방 아니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유서준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 대부분은 경제통이다. 경제학 대학교수도 있고 정부 관료도 있었다. 대형 은행이나 증권 투신에 취업한 사람도 무척 많았다. 그런 친구에게 떳떳하게 나는 여기에 다닌다고 말하기 힘든 직장이기도 했다. 적어도 아직은 제도권이 아닌 사설이었으니까.
물론 그녀의 성격으로 보아 직장의 간판 때문에 자괴감에 빠질 리는 없다고 하지만 유서준의 입장에서는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예전의 그녀는 누구에게도 어느 방면에서도 뒤지지 않는 재원이자 자신감 덩어리였으니까.
“그 꿈 아직 버리지 않았지?”
유서준이 그녀에게 물었다.
서하나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래서 이번에 펀드 고객 모집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았잖아.”
유서준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D 증권에 돌아가고 싶어?”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유서준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 그대로야.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해줄게.”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유서준이 웃음을 지었다.
“돌아가는 거야. 증권사 사장으로 어때?”
“응?”
서하나의 젓가락질이 멎었다. 그제야 뭔가 감을 잡은 것 같았다.
유서준의 말이 이어졌다.
“정부에서는 아직 위기가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위기는 시작되었어. 올해 말이 지나면서 그 위기는 모두가 체감하게 되고 내년 상반기가 되면 모두에게 아픔으로 돌아와. 문을 닫는 기업이 곳곳에 나타나고 은행마저 적어도 절반이 사실상 부도 상태에 빠져. 정부의 지원 없이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는.”
심각한 말이 이어졌다. 은행에 돈이 없는 현상을 어떻게 믿을까.
“은행마저 그러한데 증권사가 버틸 수 있을까? 대형 증권사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을 닫거나 인수 합병될 운명이야. D 증권사도 마찬가지.”
서하나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유서준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D 증권사의 운명도 이미 정해졌어. 문 닫아야 해. 만일 우리가 원한다면 인수 가능해. SJ 증권사로 거듭나는 거지. 어때?”
그제야 서하나는 예전에 유서준이 말했던 몇 가지 단편적인 이야기를 이을 수 있었다.
신규로 종합 증권사를 허가받기란 하늘의 별따기라고. 허가권을 쥔 정부를 상대로 로비를 해서 증권사를 설립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다른 방법은 기존의 증권사를 인수하는 방법. 지금 당장은 어렵지만 오래지 않아 수많은 증권사가 매물로 나올 거라고.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합병을 승인해주지 않을 수 없다고.
가끔 증권사 설립이라는 주제로 그가 이것저것 내뱉은 말이 하나로 통합되어 이어졌다.
“내년 초 D 증권사가 매물로 나오면 우리가 인수하자.”
서하나의 손이 떨림을 일으켰다. 너무 엄청난 이야기여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들어가 보면 인수 자금은 지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제야 유서준이 현재 보유한 자금이 절대 작은 것이 아니란 사실을 실감했다. 단지 계좌에 숫자로만 머무는 그 돈이 현실 속으로 튀어나올 때는 엄청난 파괴력을 쥐고 있었다.
멍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뺨에 유서준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배시시 웃음을 짓는 그녀에게 그가 물었다.
“그…… 박필석 지점장 아직 살아 있어?”
“여전히 지점장 하고 있을걸?”
“명줄도 기네. 이번엔 잘라버릴까?”
대답하지 않는 그녀를 두고 계산하러 나가며 유서준이 말했다.
“아니면 본사로 불러서 하인으로 부리던가.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