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86
90. 외환위기(2)
[1997년 11월 4일]10월 31일, 종합주가지수 470.79로 500선을 깨고 폭락했던 종합주가지수는 11월 1일 토요일에 극적인 반등을 했다. 명목은 정부의 증시안정대책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최근 4달 동안 너무 많이 내렸기에 더 내리기 어렵다는 투자자의 자신감도 있었다.
1일 상승은 결국 폭등으로 이어져 전일보다 무려 +5.6% 상승한 497.22를 기록했다.
모니터로 주가지수를 확인하던 강재민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제와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주말에 해외에서 나쁜 소식이 들려오면 분명히 다시 방향을 틀 거야. 동남아를 믿어야지.”
그는 스스로 자위했다. 하지만 슬금슬금 걱정이 일었다.
강재민은 SJ 투자자문의 자산 계좌에서 선물을 매매하면서 자신의 개인 계좌를 개설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아왔었다. 사실 그가 학생운동에 빠져든 것도 그 영향이 컸다. 대학에 들어가서 가난을 벗어나고자 주식에 손을 댔다. 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주식에서 돈을 좀 버는가 싶었지만, 곧바로 잃기를 반복했다.
졸업 후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학생운동 이력을 가진 그를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간신히 유서준과의 안면으로 SJ 투자자문에 입사했다. 월급은 나쁘지 않게 받았지만, 월급만으로 돈을 모아 인생역전을 이루기는 불가능했다.
그는 선배인 유서준이 부러웠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지만 주식에서 돈을 벌어 작지만 번듯한 금융회사를 일구었다. 거기에다 눈이 번쩍 뜨이는 미모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다.
그는 단순히 월급을 받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바라는 미래를 이루는 것이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이 그를 개인적으로 선물 옵션 계좌를 개설하게 만들었다. 자금은 친척에게서 절반을 빌려 개시증거금인 5천만 원을 맞추었다.
지난 10월 23일, SJ 투자자문의 고유 자본 계좌에서 선물 매도를 진입했다.
강재민은 동일한 시각에 자신의 계좌에서도 마찬가지로 선물 매도를 진입했다. 금액으로는 최대 10계약을 매도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왠지 겁이 났다. 그는 마음을 졸이며 일단 1계약만 매도 포지션을 걸었다. 이때 선물가격은 61.10.
예상대로 주가는 폭락하고 수익이 크게 났다.
그는 1계약만 들어간 것을 후회했다.
주가지수가 정신없이 떨어져 28일이 되자 500선이 깨졌다. 선물가격은 49.80. 하락할수록 이익이 발생하는 그의 포지션에 의해 그의 계좌는 수익금만 565만 원이 불었다. 총자산은 5565만 원. 선물은 세금도 없고 수수료 역시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
강재민은 이익보다 더 큰 이익을 못 낸 것을 후회했다. 만일 10계약이었다면 그 다섯 배인 5천만 원 이상의 수익을 내지 않았을까. 미치도록 아까웠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28일 남은 돈마저 대부분 선물 매도를 질렀다. 추가 9계약을 합해 모두 10계약이었다.
며칠 후인 31일까지 폭락은 이어졌다. 그는 2650만 원을 추가로 벌어들였다. 그의 계좌는 모두 8215만 원이 되었다. 온 세상이 자신의 것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날 서하나에게 딱 걸렸다.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계좌에 든 돈이 자신감을 가지게 했다. 단 며칠 만에 월급의 몇 배나 되는 2천만 원 이상을 벌었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는 서하나의 경고를 무시했다.
11월 1일, 이번엔 반대로 주식시장이 폭등했다. 무려 +5.6% 상승이었다.
선물가격은 이날 46.70으로 끝을 맺었다. 전날보다 +2.20이 올랐다. 10계약의 매도 포지션을 갖고 있던 그는 이날 하루로 1100만 원을 잃었다. 그래도 그의 자산은 7115만 원으로 2115만 원이나 수익이 난 상태였다.
“분명히 하락장이야. 하루 정도는 오를 수 있지. 아직 많이 벌었어. 절대 동요하지 말자. 서준이 형도 연말까지 주가가 내린다고 했었어.”
그는 수도 없이 자신을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웠다. 마음 한쪽에선 일말의 불안감도 있긴 했다. 회사 고유 자산 운용에 대해 다시 선물을 매도하라는 지시가 없었던 탓이다. 그렇다고 반대로 선물 매수 지시도 없었기에 그는 안심했다. 일시적으로 횡보하는 정도라고 판단을 내렸다.
11월 3일 월요일. 그의 바람과 달리 주식시장은 다시 상승했다. 외국인의 매도가 진정된 듯하다는 이유였다. 이날부터 그는 좌불안석이 되었다.
하루 뒤 11월 4일 주식시장은 다시 한차례 폭등세를 이뤘다. 말 그대로 브이자 반등이었다.
종합주가지수는 전날 대비 +5.96% 상승한 542.13. 10월 말 대비 무려 10%가 훨씬 넘는 +71 포인트나 상승했다. 선물가격은 53.30까지 올랐다. 이 이틀간 그는 3300만 원을 손해 봤다.
그의 계좌는 3815만 원으로 원금 이하로 떨어졌다. 처음으로 손실이 났다.
그는 손을 벌벌 떨었다. 손실에 대한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는 이빨을 꽉 깨물었다. 하락을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주문했다.
다음날인 11월 5일에도 주가는 다시 올랐다. 전날보다 오름폭은 줄었지만, 여전히 꽤 올랐다. 그간의 하락을 만회하려는 듯 그야말로 미친 듯이 올랐다. 4일 연속 상한가를 친 종목이 무려 134종목이나 되었다.
선물가격은 55.45. 그는 이날도 1075만 원의 손해를 봤다. 계좌잔고는 2740만 원으로 줄었다.
파생상품 거래는 대단히 위험하다. 자칫하면 계좌 전체를 털어 넣어도 그 손실 대금을 지불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사실상 주식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 파생에서는 발생한다. 주식은 매수한 주식 기업이 부도가 나서 주식 가격이 0이 되면 계좌 잔고 또한 0이 되며 끝이 난다. 파생상품은 그렇지 않다. 계좌에 넣은 돈 이상을 물어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방지하고자 증권사에서는 대비책으로 유지증거금이란 제도를 만들었다. 선물의 경우 보유 포지션 가격의 10%를 항상 유지하게 한다. 만일 이 10%가 깨지면 증권사는 다음날 정오에 반대 매매를 실시하여 만일에 발생할 위험에 대비한다. 이를 마진콜이라 불렀다.
강재민의 계좌는 5일 마진콜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의 계좌는 다음날인 6일 정오에 강제로 전 포지션에 대해 반대 매매가 일어날 예정이었다.
11월 5일 저녁,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했다. 반대 매매를 방지하려면 부족분만큼의 돈을 다시 넣어야 했다. 사실상 돈도 없었지만, 더 잃을까 두려워 넣을 수도 없었다. 자칫하면 내일 하루 더 폭등하면 계좌는 마이너스로 바뀔지도 모른다.
그는 온종일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손실에 온몸이 절로 떨렸다.
그날 저녁 퇴근 직전에 서하나는 강재민의 이상한 행동과 안색을 보고 상황이 나빠졌음을 깨달았다. 저런 행동이 나올 때는 단 한 가지 경우뿐이었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날려버린 것이다.
그녀는 강재민이 지난번 그녀가 말했던 경고를 듣지 않고 선물 거래를 계속했음을 짐작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유서준에게 말했다.
“어떡하지?”
정작 유서준은 태연했다.
“본인이 한 일은 스스로 책임져야지. 난 그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있었어. 누나도 알고 있지 않았어?”
서하나는 과거 증권사의 사례를 떠올렸다.
증권사에서도 가끔 주식거래로 유명한 사람의 계좌를 관리하게 되면 그 사람의 매매를 추종해서 수익을 보려는 직원이 있기도 했다. 강재민의 경우는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본인이 해결 못 할 정도로 일을 벌였을지도 몰라.”
“괜찮아. 만일 지금 도와주면 다음에 또 일을 저지르게 돼. 본인이 해결 불가능한 일은 저지르지 않게 만들어야지.”
유서준은 전혀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서하나도 그의 뜻을 짐작했다. 주식을 하다 잃은 사람은 대부분 옆에 있는 친구에게서 돈을 빌려 다시 투자하고 그것을 잃고 나면 이번에는 친척에게 또 돈을 빌린다. 그러다 점점 수렁에 빠진다.
“크게 망가지지는 않을 거야. 그에게는 손실이 다소 클지 모르지만, 인생이란 긴 시간 속에서 본다면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어.”
유서준은 담담히 말했다.
내일의 장세를 이미 알고 있는 유서준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단기 상승은 오늘로 마무리 되었으니까. 만일 그가 계속 버틸 수만 있다면 다시 다가오는 하락 장세에서 수익을 낼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 수익을 내는 것 역시 훗날을 보면 좋은 결과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검토 없이 막연한 기대감으로 행한 투자는 언제든 커다란 손실로 귀결될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의 문제는 강재민이 하루를 더 버틸 자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선물 10계약의 유지증거금을 마련하기 힘들었던 강재민은 사실상 손을 들었다. 고민의 시간을 가지다 더 큰 손해를 방지하기 위해 일단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답이란 결론을 얻었다. 증권사에서는 그의 포지션을 다음날 반대 매매로 환매했다. 다행히 다음날은 보합에 머물렀다.
약 보름간의 선물매매에서 강재민의 성적은 처참했다. 그의 계좌에 남은 돈은 2700만 원으로 원금에서 무려 2300만 원이나 손실이 났다.
강재민은 며칠 사이 천국과 지옥을 경험했다. 사실 이것은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대부분 개인투자자가 흔하게 겪는 경험이었다.
유서준은 그에게 별도의 주의를 주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 느끼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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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6일, 훗날 국민에게 지옥의 사자라고 불렸던 캉드쉬 IMF 총재가 극비리에 방한했다. 정부에서는 상황이 더 악화되면 다른 방법이 없음을 인지하고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이 시간에도 외환 보유고는 바닥을 모르고 줄어들고 있었다.
11월 20일, 정부는 손을 들고 환율 안정을 위해 환율 변동 폭을 확대했다. 하지만 상한선까지 곧바로 폭등하여 외환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1월 21일, 대한민국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외치던 정부에서도 마침내 공식적으로 국제통화기금 IMF의 지원에 대해 언급했다.
1997년 12월 3일. IMF와 공식적인 구제금융 지원이 합의되고 1차 지원금 56억 달러가 제공됐다. 회사채 금리가 법정 상한선인 25%로 치솟아 사실상 금융시장 전반이 마비됐다. 자금난에 빠진 9개 종금사는 정부의 업무 정지 명령에 따라 사실상 폐쇄상태에 들어갔다.
IMF는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재벌의 과다차입을 들었으며 재벌의 해체를 요구했다. 사실상 대한민국 전체가 IMF의 영향권에 들었고 정치와 문화 전반에 걸쳐 국가의 주권이 제약당하는 상황에 들어갔다. 예를 들어 세금을 얼마나 거둘 것인지 세금을 어떻게 쓸 것인지 하는 모든 정치 행위조차 IMF의 손으로 옮겨졌다.
12월 6일, 고려증권이 부도났다. 약정순위 8위의 이 증권사는 유명 배구단을 운영해 인지도가 높았으나 결국 부도가 난 첫 증권사가 됐다.
국내 모든 금융사가 사실상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이 무렵 국내 유명 은행 26개, 증권 27개, 보험사 12개, 종금사 12개를 모두 인수하는데 드는 비용은 불과 5조에 불과했다. 국내 모든 기업의 시가총액은 세계 76위 기업인 네덜란드의 은행 하나와 그 가치가 동일할 정도로 폭락했다.
주식시장의 폭락은 계속됐다. IMF의 지원이 결정되고 첫 지원금이 들어온 며칠 후인 12월 13일 종합주가지수는 97년 최저치인 338.94를 찍었다. 전고점인 94년 11월의 1145.66에서 무려 -70%가 폭락한 수준이었다. 이날 업계 4위였던 동서증권이 부도나며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환율 움직임에 따라 주식시장은 널뛰기를 계속했다. 부도 기업이 폭증하면서 거리에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사람으로 넘쳐났다.
정부에서는 금융기관과 기업의 연쇄 부도 고리를 끊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정부는 모든 기업의 은행대출을 2개월 연장시키는 특단의 대책을 단행했다. 외화가 폭등하며 휘발유를 비롯한 에너지 가격이 사상 최대로 뛰었다. 모두가 살아가기 힘든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2월 18일, 외환위기 여파로 국민은 정권 교체를 원했다. 김대중 후보는 세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크리스마스이브였던 24일 환율은 사상 처음으로 2000원을 돌파했다. 국민 모두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외환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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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31일]유서준과 서하나는 집에서 조용한 연말을 맞았다.
호주에서 보냈던 일 년 전과 달리 올해는 국내에서 조용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부도가 나서 무너지는 기업 앞에서 수익이 크게 났다고 떠벌릴 단계도 아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 분위기도 활기를 잃은 모습이었다.
유서준은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보며 미래에서 온 편지를 떠올렸다. 제 이의 외환위기 사태. 지금이 첫 번째 외환위기 사태이고 지금부터 30년 후 두 번째 위기가 도래한다.
아마 그때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다.
힘들었던 97년이었다. 5월까지 상승을 보인 주가 덕분에 약 20%의 수익을 올렸고 그 이후에는 소소하게 들어간 선물에서 대략 30%의 수익을 냈다. 더 수익을 낼 수 있었지만, 오히려 수익을 자제한 측면도 있었다. 아직 여물지 않은 국내 선물시장에서 홀로 큰 수익을 내며 휘저을 수도 없었기에.
유서준은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 다이어리에 기록할 총자산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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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2월 31일, 총자산 240억.